1. 번영의 정점에서 던지는 뼈아픈 질문
우리 사회의 오랜 숙원이자 지상 과제는 대한민국이 부강한 선진국이 되어 세계만방으로부터 존경받는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가난과 배고픔을 훈장처럼 달고 살았던 시절, 절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은 그 자체로 아득한 이상향이자 우리 세대의 간절한 구원이었다. 그리고 쉼 없이 달려온 끝에, 오늘날 우리는 그토록 염원하던 눈부신 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영위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반만년 역사의 찬란한 고전 문화 위에,
그렇다면 묻고 싶다. 넉넉한 곳간과 화려한 문화의 쇼윈도를 갖춘 지금,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선진국이 되었는가?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은 세계 시민으로서 존경받고 있는가?
나는 아직도 이 질문 앞에서 섣불리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외부의 시선에 있지 않다. 스스로를 향해 "나는 과연 선진국 국민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인격과 교양, 타인을 품어내는 넉넉함을 갖추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여전히 부끄러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진 사회의 조건은 화려한 경제 지표나 대중문화의 유행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을 떠받치는 가장 견고한 주춧돌은 바로 타인을 향한 '배려와 관용'이라는 보이지 않는 문화다.
2. 아미앙의 밤거리에서 배운 '먼저 가시라'는 신호
현역 시절, 나는 오랜 기간 제조와 비즈니스의 현장에서 프랑스, 영국, 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동료들과 부대끼며 일했다. 치열한 업무 속에서도 그들의 삶 이면에 깊이 스며있는 타인을 향한 배려의 문화는 늘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1991년 말,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가족과 함께 프랑스 아미앙(Amiens) 지역에 잠시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당시 현지 유학생들이 운전대를 잡는 나에게 유독 강조하며 주의를 주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야간 운전 시의 전조등 신호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의 경우,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나 좁은 골목에서 마주 오는 차를 향해 전조등을 깜빡이는 행위는 십중팔구 "내가 먼저 지나가겠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에게 그 불빛은 정반대의 언어였다. 그들의 깜빡임은 "당신이 먼저 지나가시라"는 양보의 신호였던 것이다. 이 상반된 해석의 차이를 모른 채 한국식으로 운전하다가는 대형 사고를 유발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당부였다.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내가 먼저 가겠다고 앞을 다투는 뾰족한 신호보다, 타인의 길을 먼저 밝혀주고 기다려주는 그들의 신호법이 훨씬 더 안전하고 따뜻했다. 그것은 단순한 교통 법규를 넘어, 오랜 세월 그들의 사회를 지탱해 온 '배려'라는 이름의 약속이었다.
3. 기둥 사이 세 칸, 누군가를 위한 여백
선진 문화의 척도는 이처럼 거창한 이론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밥을 먹으며 차를 모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현장 속에 숨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차량 세 대가 나란히 주차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른 저녁 귀가하여 주차장에 들어서면 세 칸 전체가 텅 비어 있는 여유로운 풍경을 마주하곤 한다. 텅 빈 세 칸 중 정중앙에 차를 대는 것이 운전자 입장에서는 문을 열고 닫기에도, 차를 넣고 빼기에도 가장 수월하고 편안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웃들은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듯 가운데 자리를 비워둔 채 기둥 옆 양쪽 끝자리에 먼저 차를 댄다.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올 누군가가 비좁은 틈새에서 고생하지 않고, 가운데 빈 공간에 편안하게 주차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여백을 남겨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작고 아름다운 배려의 현장이다.
4.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양심
하지만 어제저녁, 외출에서 돌아오던 길에 마주한 풍경은 내 마음을 오래도록 무겁게 만들었다.
우리 차와 앞선 차량이 거의 동시에 주차장 입구로 들어섰다. 다행히 출입구에서 멀지 않은 명당자리에 마침 세 칸이 나란히 비어 있는 공간이 보였다. 나는 앞차가 먼저 주차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앞차가 가장자리에 차를 대면, 내가 그다음 빈자리에 주차할 생각으로 후방 카메라를 켜고 화면을 주시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화면 속 앞차의 움직임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 차량은 넓게 비어 있는 세 칸의 정중앙에 당당하게 진입하더니 그곳에 그대로 시동을 끄는 것이 아닌가. 좌우로 애매하게 남은 좁은 공간 때문에, 뒤따르던 나는 결국 차를 돌려 다른 곳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순간적인 당혹감에 운전석을 바라보니,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주부가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딸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차마 화를 내기보다 깊은 한숨과 함께 씁쓸함을 삼켜야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역시 '배려'였다. 나 하나의 편리함을 위해 가운데 공간을 차지해 버림으로써, 뒤따라오는 이웃의 수고로움은 까맣게 잊어버린 얄팍한 이기심. 더 가슴이 아팠던 것은, 그 곁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걷던 어린 딸의 맑은 눈망울이었다. 아이는 세상의 모든 규칙과 도덕을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배운다. 가장 편안한 자리를 거리낌 없이 차지하는 어른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그 아이의 마음속에, 훗날 타인을 위해 기꺼이 나의 편안함을 양보하는 '배려라는 양심'이 자라날 수 있는 작은 틈이라도 허락될 수 있을까.
5. 진짜 해답은 일상의 현장에 있다
과거 우리가 이루어낸 눈부신 경제 성장이라는 성적표는 우리 삶에 안락함을 쥐여주었지만, 성숙한 내면까지 거저 안겨주지는 않았다.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국회나 정부의 거창한 정책에만 기대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깜깜한 밤거리에서 마주 오는 차를 위해 기꺼이 불빛을 양보하는 마음, 다음 사람을 위해 주차장의 가장자리를 먼저 채우는 작은 수고로움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유산은 넘쳐나는 부와 화려한 문화 콘텐츠만이 아니다. 나와 다름을 넉넉히 품어주는 관용, 나보다 조금 더 불편할 타인을 위해 내 삶의 여백을 조금씩 떼어주는 배려의 정신이다.
오늘도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선진 시민의 품격을 갖추었는가?" 이 무거운 질문에 우리가 모두 미소 띠며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날. 그날 비로소 대한민국은 번영의 껍데기를 넘어, 세계인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존경받는 아름다운 나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