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함이란 게 존재할까
사이코패스나 살인자를 볼 때마다 나는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마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걸까?”라는 안타까움? 이 들기도 한다.
물론 피해자를 생각하면 연민과 분노가 앞선다. 그러나 피해자의 관점은 잠시 배제하고—순수하게 가해자의 존재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면—이것은 꽤 불편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생각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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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는 스스로 선택해서 된 것일까? 아이는 잘못을 저질러도 “어리니까”라는 이유로 쉽게 용서받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되면, 더 이상 그 이유는 통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아이가 갑자기 성인이 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하루하루의 작은 잘못, 왜곡된 습관들이 쌓여 변곡점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어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어느 날, 세상은 돌연 그를 죄인으로 낙인찍는다. 마치 어제까지 허용하던 행동을 오늘부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죄악으로 선언하는 것처럼.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은 연속적이다. 어제의 작은 일탈이 오늘의 죄악이 되고, 내일의 파멸이 된다. 그 사이에 따뜻한 선함의 개입이 있었다면, 그 아이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 그런 이들에게 ‘좋은 사람’이나 ‘따뜻한 손길’은 오 않는다. 그 결과, 그는 결국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괴물이 된다.
그렇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어떤 아이는 유전적으로 결핍을 안고 태어날 수 있다. 또 어떤 아이는 환경 속에서 폭력과 방치, 혹은 차갑고 왜곡된 사랑만을 배우며 자라날 수 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 아이를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아직 어려서 판단력이 없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아이가 열악한 환경에서 스무 살까지 자라나, 똑같이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때는 더 이상 사회가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는 단순히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다. 다섯 살의 폭력성과 스무 살의 폭력성은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사회는 어느 시점부터 돌연 그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죄의 무게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만약 누군가(범죄자)가 어렸을 때부터 ‘악마가 되는 법’을 배워버렸다면, 그 잘못은 아이의 것일까? 아니면 그를 방치한 사회의 것일까?
하지만 사회는 언제나 책임을 분명히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러기 때문에 나이라는 경계와 기준들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