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호수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지나면 비포장 산길이 나왔다. 입구에는 ‘공사중’이라고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는데 ‘ㅇ’이 넓적하게 펼쳐져 ‘ㅁ’같아 보였다. 동생과 나는 그곳을 지날 때 마다 ‘곰사줌’이라고 읽으며 낄낄거렸다. 산을 하나 넘어 내려가는 길은 개울이 나란히 흘렀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왼편에 버스정류장이 있고 오른편에는 개울을 건너 산으로 들어가는 작은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를 건너면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영동리 산37번지, 우리집이다.
다리를 건너서도 50미터 정도 더 올라가야 했다. 가운데 아스팔트길이 있고 오른쪽은 논, 왼쪽은 사과밭이 있었다. 산비탈에 지어진 집이라 길도, 밭도, 논도 다 경사가 져 있었다. 집 건너편에는 긴 창고건물이 있었다. 길은 산 위까지 이어졌지만 아스팔트는 집에서 끊겼고 나머지는 흙길이었다. 집과 창고는 사과밭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사과밭 너머 위쪽으로는 밤나무도 있고 소나무도 있는 야산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일곱살이 되던 해 3월까지 부모님과 살았다. 어느 날, 나는 할머니와 언니들이 살고 있던 대구로 갔다. 집이 워낙 시골이라 우리 네 남매는 입학할 나이가 되면 비교적 교육여건이 좋은 도시의 할머니집으로 갔다. 나는 언니가 둘, 남동생이 하나 있다. 여자 형제 중에서는 유일하게 유치원을 다녔는데 나의 유치원 입학은 원래는 부모님의 계획에 없었던 것 같았다. 유치원을 다닌 첫 날, 선생님이 반 아이들앞에 나를 앞에 세워놓고 소개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근처에 가게 하나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엄마는 평소에는 아빠차를 얻어타고 다니셨지만 한번씩은 버스를 타고 장에 가셨다. 개울에서 놀고 있으면 엄마가 곱게 차려입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엄마를 향해 뛰어갔다.
“엄마~ 나도 같이 가자~!”
혼자 얼른 갔다오겠다는 엄마를 붙잡고 계속 떼를 썼다. 엄마는 결국 이기지 못하고 꾸질꾸질한 내 얼굴을 개울에서 대충 씻겨 같이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면 아빠차를 타고 갈 때와는 많이 달랐다. 곧장 우리의 목적지로 가지 않고 이 마을, 저 마을 들르는 버스를 따라 구경꺼리가 많았다. 시장에 가면 엄마를 졸라 꼭 순대를 얻어먹었다.
개울을 건너면 집 아래로 논이 있었다. 겨울이면 논에 받아 놓은 물이 얼어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맥가이버처럼 뚝딱뚝딱 얼음썰매를 만들어 주셨다. 썰매는 길쭉한 나무판을 여러 개 붙인 정사각형 모양이었다. 아래에 나무로 다리를 두 개 붙이고 철사를 둘둘 감아 박아 얼음위에서 잘 미끄러지도록 만드셨다. 범버카를 타듯이 동생과 일부러 부딪히기도 하고 뒤쫓기도 하며 씽씽 썰매를 탔다. 집에 갈 때면 바지가 다 젖어 있었다. 엄마에게 혼날까봐 옆집 아궁이불 앞에 한참 앉아 바지를 말렸다. 우리집 옆에는 빈 집이 하나 있었는데 엄마는 무말랭이 같은 반찬거리나 빨래를 말리기 위해 그 집 아궁이에 불을 때곤 했다. 아궁이불 앞에 앉아 있으면 얼었던 발이 간질간질했다.
창고와 집 사이의 경사진 아스팔트 길은 눈이 오면 눈썰매장이 되었다. 차도 다니고 사람도 다니는 길이라 아버지가 눈을 치워 놓으면 동생과 나는 가장자리에 치워진 눈을 꾹꾹 다져 썰매장을 만들었다. 지붕에는 주렁주렁 고드름이 열렸다. 고드름을 따서 동생과 칼싸움을 하고 아버지에게 비료포대를 얻어 눈썰매를 탔다. 눈썰매를 한참 타다 보면 잠바도 벗어 던지고 볼은 빨개졌다. 내 사진첩에는 그때의 눈썰매장 앞에서 털모자를 쓰고 트실트실한 얼굴에 입술은 하얗게 터서 찍힌 사진이 있다.
창고 끄트머리에 또다른 개울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 개울에서 엄마는 빨래를 했다. 여름이면 아빠와 일꾼 아저씨들은 등목을 하기도 했다. 개울은 천천히 흐르다가 창고 시작점 즈음에 작은 폭포처럼 뚝 떨어졌다. 폭포 아래는 우리가 버린 음식쓰레기들로 항상 더러웠지만 위 부분은 맑았고 물고기도 많았다. 종아리 정도의 깊이라 수영은 못했지만 물고기나 가재를 잡으며 놀았다. 겨울에 얼음이 얼면 동생과 나는 개울에서 미끄럼틀을 타기도 했다.
집은 두 채가 붙어 있었는데 둘 다 우리가 썼다. 우리가 주로 썼던 집은 두 채 중 경사로 위 쪽에 있는 집이었다. 집은 경사로를 따라 길쭉하게 지어졌다. 문으로 들어가면 아궁이가 있고 오른편에 부엌이 있었다. 아궁이와 부엌 사이에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방은 부엌바닥에서 무릎만큼 높이 올라가 있어서 문 아래에 계단이 한 칸 있었다. 계단을 밟고 들어가면 안방이 있고 안방 오른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방이 나왔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안방에서 메주를 말렸다. 방 한쪽에 나무로 메주걸이를 만들어 메주를 나란히 걸어 두었다. 집안 가득 메주 냄새가 났다. 자다가 걸어 놓은 메주를 걷어차기도 했다.
몇 살인지 기억나지 않는 어느 겨울날, 낮잠을 자고 있었다. 꿈에서 뚜껑이 없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행기에 불이 붙어 추락을 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서 보니 내 발 밑으로 이불에 불이 붙어있었다. 아궁이의 불이 너무 쎄서 아랫목의 장판이 시커멓게 그을리고 이불까지 불이 붙은 것이었다. 꿈 덕분에 살았다.
두 채 중 경사로 아래쪽에 있는 집은 방이 한 칸인 것만 달랐고 나머지 구조는 같았다. 그 집은 평소에는 비어 있거나 창고로 사용하다가 손님이 오거나 언니들이 방학 때 오면 사용하도록 했다.
과수원 너머 야산에는 가끔씩 군인아저씨들이 훈련을 하러 왔다. 훈련을 하다가 집까지 내려와 물을 얻어 마셨다. 근처에서 쭈뼛쭈뼛 하고 있으면 건빵을 한 봉지 주셨다..
과수원 옆에서 일하시는 부모님 옆에서 참을 먹고 빈 그릇으로 소꿉놀이를 했다. 사과 꼭지
따는 것을 돕기도 했다. 지루해지면 나무상자를 블록삼아 성도 쌓고 길도 만들어 놀았다. 슬쩍 동생과 빠져나와 산을 돌아다니면서 떨어진 밤을 주워 아궁이에 구웠다. 그러나 먹으려고 보면 썩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아버지가 만들어 준 낚시대를 들고 다리 건너 큰 개울로 갔다. 낚시대는 나뭇가지에 실을 달고 끝을 날카롭게 갈은 철사를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려 실 끝에 매달은 것이었다. 낚시를 하기 전엔 수영을 해서 물속을 헤집어 흙탕물을 만들었다. 물고기가 우리를 못 보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도 물고기는 잘 잡히지 않았다. 낚시대보다 맨손이나 바가지로 잡는 것이 나았다.
한참 놀다가 사과밭으로 가면 아버지는 나무에 달려 있는 사과를 따서 슥슥 옷으로 닦아 맨손으로 쪼개어 주셨다. 사과를 동생과 나눠 먹고는 또 놀꺼리를 찾아다녔다. 집주변은 맨날 다녀도 맨날 새로운 것들이 있었다. 계절따라 모습이 바뀌기도 했지만 같은 계절안에서도 매일이 새로웠다. 얼음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물고기가 잘 잡혔다가 안 잡혔다가 못보던 꽃이나 곤충들이 갑자기 보이기도 했다. 정신없이 다니다보면 어느새 집에서 한참 멀어져 있었다.
중학교 1학년때 부모님도 과수원을 정리하고 대구로 내려오셨다. 25년여가 지났지만 초등학교때 부모님께 썼던 편지의 주소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2021년 봄. 기억속의 주소를 네비에 찍고 영동리 산 37번지를 찾아갔다.
개울은 아스팔트로 덮혔고 그 위에 주유소가 들어섰다. 논이 있던 자리에는 허브용품들을 파는 가게가 생겼다. 창고 자리에는 소규모 워터파크가 새로 지어졌지만 한참전에 망해서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살던 집이 있던 자리는 철조망으로 둘러쳐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붙이고 있었다. 나는 관계자인가 아닌가를 생각하다가 허브용품가게에 들어갔다.
“아저씨, 여기 땅은 왜 이렇게 버려져 있는지 혹시 아세요?”
“뭐하는 사람이길래 그런 걸 궁금해하세요?”
“한 30년전쯤에 여기서 살았었거든요. 우리집이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나 궁금해서요.”
“그래요? 장사하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옛날에 살았던 사람이 다 찾아오고.”
아저씨는 워터파크가 망한 이야기, 땅을 개발하려고 누군가가 또 샀지만 부도가 났는지 더이상 공사가 되지 않고 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셨다. 가게에서 모기를 쫓아준다는 향초를 두개 샀다. 그리고 동탄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