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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랑 Sep 07. 2023

화장실에 들어갈 때만 안경을 벗어요

비위가 약한 사람 특

시력 0.1이 보는 세상. 눈에 뵈는 게 없다. (출처: 에펨코리아)


안경을 벗고 시력을 재면 양쪽 0.2 정도 나온다. 한때 안경 쓰는 게 너무 귀찮아서 벗고 다녔는데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대충 어떤 형태인지 '감'으로 파악하고 길거리를 활보했다. 큰 네모 형태의 차는 '버스'요, 차 지붕에 왕관이 씌워져 있는 형태는 '택시'라는 식.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라서 엄청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좋은 점이 있었다. 나는 원체 비위가 약해서 조금만 더러운 것을 보거나 만지거나(다행히 아직 그런 적은 없다!) 더 나아가 더러워질 것을 예상해서 미리 피하는 성격이다. 특히 다수가 이용하는 화장실이 가장 심하다. 화장실은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곳이라 몸에서 배출된 날것 그대로의 분비물들을 보기 쉬운 환경이다. 특히 공중화장실은 그런 것을 볼 확률이 더 높다. 


여행 유튜버 곽튜브는 여행을 하면서 묵게 되는 숙소의 화장실이나 길거리의 공중화장실을 소개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문을 열기 전에 "과연?" 하면서 앞사람이 용변을 보고 변기 물을 내렸는지 안내렸는지 긴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남들의 용변을 보고 싶지 않은 게 당연지사다. 용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용하기 때문에 화장실 바닥, 벽, 세면대 등 전반적으로 위생이 좋지 않을 수가 있는데 그런 것도 보는 게 힘들다. 그러나 안경을 벗고 다니면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오히려 깨끗해보이기(!) 때문에 장점이었다. 하지만 장점말고 단점이 더 많았다.


전역하고도 연락을 계속하던 군대 후임과 만날 약속을 잡고 지하철 역에서 보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만날 장소로 향했다. 근데 이미 군대 후임이 저 멀리서 휴대폰을 보며 서 있는 형태가 보였다. 그 후임은 내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다가갈수록 후임이 맞다고 확신했다. 자주 보는 사이는 발걸음, 걸을 때 나는 발소리, 실루엣 등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뒤에서 백허그를 해줄 생각으로 천천히 다가가 그를 와락 안아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웬걸? 후임은 전혀 반가워하지 않고 그대로 '얼음'이 돼버렸다.


'갑자기 뒤에서 안아서 너무 놀랬나?' 생각이 들어 이름을 부르며 그를 돌려세웠는데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내가 얼음이 돼버렸다. 마치 남자를 좋아하는 성적 취향을 존중은 해주지만 그게 자신이 대상은 아니였으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나는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안경을 안 써서 눈에 뵈는 게 없었다고. 서로 머쓱해하며 그는 "아... 예..." 하며 자리를 떴다. 나도 그 순간이 너무 부끄러워서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자리를 뜰 때까지 다른 곳에서 후임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후임과 비슷한 형태로 보이는 사람이더라도 절대 먼저 아는 체하지 않고, 후임이 아는 체 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런 일뿐만 아니라 대학교 강의실 건물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는 같은 과 선배, 교수님인 줄 모르고 인사를 하지 않는 등 잘 보이지 않아 생겨나는 갖가지 문제들 때문에 안경을 쓰고 다니기로 마음 먹었다.


안경을 쓰고 다니니 많은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더 잘 볼 수 있었고, 잘 보이는 만큼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바로 화장실이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안경을 벗어놓는다. 그렇게 오늘도 내 비위를 스스로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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