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통근러들에게 기저귀를 허하라
급똥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에 평등하다. TV 예능에서도 급똥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비친다. MBC <나 혼자 산다>에서는 박나래의 '급똥 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급똥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했다. 특히 제주도의 섬 비양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도보로 걸어가는 도중 찾아온 급똥을 맞이한 박나래의 모습은 보는 나까지 지리게 만들었다(?).
왠지 그런 날이 있다. 급똥이 찾아올 것만 같은 그런 아찔한 느낌. 얄궂게도 급똥은 언제나 내가 가장 취약하고 준비가 안돼 있을 때 불쑥 찾아온다. 이를테면 출근을 위해 광역버스를 기다릴 때, 한 번 놓치면 30~40분 뒤에 오기 때문에 ‘못 먹어도 고’와 같은 태도로 버스에 몸을 싣다가 변(?)을 당한다.
버스에 올라타면 일정 기간 동안은 괜찮다. 급똥 사태라는 것을 억지로 잊기 위해 헤비메탈이나 록 같은 노래는 피하고,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다. 마인드 컨트롤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먹잇감을 보고 날뛰는 한 마리의 맹수처럼, 뱃속에서 꾸륵꾸륵되는 녀석을 잠재울 만한 무엇이 필요하다. 아직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었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뛰쳐나오려고 하는 그놈을 다시 밀어 넣어야 하는 힘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급똥을 지연시키는 데 좋다는 안쪽 손목 부근을 지압해 준다거나 상체를 뒤로 숙여서 그놈이 나오는 각을 좁히는 기술 등은 위약효과에 불과하다. 그저 급똥일 때는 화장실에 가는 것만이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광역버스는 도시와 도시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도시고속도로를 달린다. 알다시피 지하철처럼 잠깐 내려서 화장실로 뛰쳐갈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 오로지 "참을 수 있다. 나는 참아낼 것이다."와 같은 경건하지만 공허한 다짐뿐.
내 인생에서 급똥이 찾아왔었을 때, 나는 화장실까지 잘 참아냈던 기억밖에 없다. 전장에서 총알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병사처럼 나에게는 괄약근밖에 없으나, 쪼였다 풀었다 하는 조절 능력이 화장실로 인도해 주었다. 그러나 이번 급똥은 심상치 않다. 가진 건 괄약근밖에 없는데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아들의 기저귀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가져왔을 리가 만무한데도 가방을 뒤졌다). 이미 그때는 남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만원 버스 안에서 '지리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몸은 베베 꼬이고, 배를 움켜잡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내 모습을 봤을 내 옆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 그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모두 화장실로 보였다. '저 건물에는 화장실이 있나? 근데 있으면 뭐 해. 내릴 수가 없는데!'
출근길은 막혔다. 오늘따라 더 막히는 느낌이었다. 이 세상 나쁜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 차를 끌고 나온 것처럼. 그래도 버텨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온 정신을 부여잡았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힘이 조금이라도 풀어지면 나는 '광역버스 똥 지린남'으로 SNS에 영상이 풀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엄청난 정신력으로 버텨내자 어느덧 버스는 고속도로 끝에 다다랐다. 그곳은 여러 공장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많이 남았다. 아직도 도시 초입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버스 기사님에게 지린 듯한 표정으로 공장이 즐비한 갓길에 세워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거기서 회사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는 생각조차 안 했다. 당연히 정해진 버스 정류장도 아니거니와 버스 정류장조차 없는 곳이라 버스 기사님은 난처해하셨다. 그렇지만 얼굴이 창백하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나를 보며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기사님은 빠르게 눈치를 채셨다. 버스를 안전한 갓길에 세우고 문을 열어주심과 동시에 나는 바로 공장으로 뛰쳐 들어갔다.
아마 공장 주인분께서는 내가 넷플릭스 <킹덤>의 좀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화..장...실 좀요..." 하는 말에 다급한 손짓으로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주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기'이다.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을 때까지 절대 안심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이러한 쾌감을 또 느낄 수 있을까? 엄청난 고통 뒤에 찾아오는 미친 듯한 쾌락. 무소유처럼 모든 걸 비워내자 현타가 왔다. 정말로 여긴 어디고, 이젠 뭘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에게 이런 선행을 베풀어주신 공장 주인분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커피와 빵을 사서 드린 후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퇴근 후 와이프에게 '급똥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내려 뛰쳐나가는 남자'라고 SNS에 떠돌아다니는 거 아니냐고 말했더니 '지린남'보다는 낫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래, 그게 낫지. 적어도 싸진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