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를 관람하며
※ 이 글에는 「어쩔 수가 없다」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보셨다면 다소 이질적인 장면이 있었을 겁니다. 바로 주인공 만수(이병헌)가 아내 미리(손예진)를 만나러 들어간 어느 무도회를 말이죠. 이곳에서 만수는 중세 유럽풍의 제복을, 미리는 아메리카 원주민 의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감독은 이 장면의 필요성을 이어지는 장면에서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외도를 의심한 남편에게 미리가 화를 내는 방식으로 말이죠. 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 그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였다고.
디즈니 애니메이션「포카혼타스」는 영국에서 배를 타고 온 존 스미스와 신대륙의 원주민 포카혼타스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포카혼타스의 약혼자였던 코쿰은 두 사람의 밀회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지만 말이죠. 미리에게 관심이 있는 듯한 치과의사도 원주민 의상으로 그녀와 춤을 췄습니다. 미리가 의도한 관계로 본다면 미리는 포카혼타스, 치과의사는 코쿰, 만수는 존 스미스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코쿰이 아닌 존 스미스가 두 사람의 댄스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만수는 정말로 존 스미스였을까. 「포카혼타스」의 존은 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수는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존 스미스가 총을 쏘았다면, 포카혼타스는 그를 사랑했을까. 저는 이번 영화「어쩔 수가 없다」를 「포카혼타스」라는 틀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도입부로 본 만수의 공간은 낙원이었습니다. 나무는 푸르고 주택에는 손수 그네를 설치할 정도로 자유롭습니다. 흩날리는 꽃잎은 마치 포카혼타스의 등장처럼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죠. 이곳에서 만수네 가족은 원주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지 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결코 순수한 원주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포카혼타스」 속 총독은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나무를 베었죠. 실직한 만수 뒤로 통나무를 실은 트럭이 지나간 걸 여러분도 보셨을 겁니다. 따라서 만수는 원주민인 동시에 문명에 오른 선원이었습니다.
그는 일자리를 얻어야 했습니다. 누가 봐도 악당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당장이라도 집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니까요. 자신의 터전에서 쫓겨난다는 건 만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남편으로서의 자존심이 달려 있었습니다.
「포카혼타스」 속 총독은 신대륙에 황금이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디언들이 황금을 가졌다는 망상으로 전쟁을 일으키려 했죠. 마찬가지로 만수도 다른 구직자를 없앰으로써 자신의 직업을 얻겠다는 비정상적인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첫 번째 희생자 범모도 자신만의 터전을 가진 원주민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지팡이를 휘둘러 뱀을 피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죠. 만수라는 낯선 남자가 느닷없이 나타나도 직접 다리의 뱀독을 빼줌으로써 생명을 중시하는 윤리적 태도도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만수는 범모에게 총구를 겨눴습니다. 범모도 원주민임을 감독이 두 눈으로 보여줬는데도 말이죠.
이러한 흐름은 포카혼타스가 존을 일깨우는 장면과 일치합니다. 인간 중심적 문명을 믿었던 존은 포카혼타스의 노래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죠.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이를 위해 움직이니 겉으로 본다면 만수는 존 스미스가 맞는 듯합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주변에서 발견됩니다. 만수네에는 몇 분간 포옹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만수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으며 그들을 지킬 사람은 만수 말고는 없었습니다. 존 스미스는 포카혼타스의 연인이지 그녀의 남편이 아닙니다. 존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지킬 부족민은 많이 있었죠. 이런 점에서 만수는 존처럼 전쟁을 막으려 자신을 희생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죽는다면 가족을 지킬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존은 총독의 총알로부터 추장을 지켜냈습니다. 그 덕분에 추장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선언하죠. 반면 만수는 원주민으로서 같은 원주민이었던 범모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존 스미스나 포카혼타스라도 멈출 순 없습니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만수는 오랜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때 마트에서 일한 적이 있고 두 번째 희생자 시조(차승원)는 종이와 무관한 구두 가게에서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죠. 미리는 만수에게 원예 사업을 해보라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수는 자신이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부족장이 전쟁 준비로 포카혼타스의 말을 무시한 것처럼 만수 역시 경쟁에만 매달려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죠.
만수는 언제부턴가 ‘전쟁’이라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미리는 시체를 발견할 때까지 그 말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죠. 이는 포카혼타스가 존으로부터 전쟁 소식을 접한 상황과 대비됩니다. 미리와 아들도 결국에는 만수의 살인을 알게 되지만, 가족을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의 섬뜩함은 이들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정상적인 인간이 비정상적인 계획을 이해하는 순간, 결코 건드려선 안 될 선악이 마치 하나의 수단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죠. 범모의 아내는 이 문제의 극단적인 예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을 쐈다는 사실을 형사에게 말할 수 없었죠. 그녀는 자신과 형사마저 속일 만큼 거의 완벽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2016년 3월 13일, 이세돌 9단은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처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한 기자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78번 수에 대한 질문입니다. 중국의 구리 9단은 ‘신의 한 수’라 했는데 어떤 생각으로 그 자리에 두셨나요?"
“뭐, 그 수를 둔 이유는 그 수뿐이 없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구글 개발팀은 이세돌의 78번째 수를 분석했습니다. 그 수를 알파고가 두었을 확률은 0.007%. 이 수치는 이세돌이 그 당시에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죠. 그러나 만수는 이세돌이 아닙니다. 범모를 미행하는 장면은 어딘가 어설프고 증거 인멸마저 깔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반인이 생각해 낼 수 없는 방법이었다는 점에서 만수의 선택은 묘수일지도 모릅니다. 원주민이 총이라는 신식 문물을 몰랐던 것처럼, 엄연히 총기 규제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권총을 사용한다는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선택이 이세돌처럼 전략적인 판단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기에 저는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동화는 포카혼타스의 사랑과 용기로 선악을 지켜냈습니다. 영화는 미리의 이해를 근거로 선악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렇다면 현실 속 우리는 만수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서술어에 해당하니 문장을 완성하려면 주어가 필요합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걸까.
「어쩔 수가 없다」의 마지막은 기계가 나무를 자르는 장면입니다. 등장인물 간의 전쟁을 일으킨 건 만수였지만,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사건의 시작은 만수가 아닙니다. 그가 제지 공장에서 일할 때도 기계는 나무를 잘랐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전쟁은 사실 오래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수는 ‘어쩔 수 없다’의 주어를 어렴풋이 느꼈을 겁니다. 개인으로는 감히 특정할 수 없는 수많은 주체를 말이죠. 그렇지만 그는 가족이 무너지는 전쟁만큼은 막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절도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모습에서 만수는 전쟁을 인간의 영역으로, 또 외지인의 영역으로 몰아내죠.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저항이었을 겁니다.
「포카혼타스」는 전쟁이 일어나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쟁터였습니다. 이미 일어난 전쟁을 막을 방법은 정말로 없을까. 자라나는 나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