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우의 《전지적 독자 시점》(2025) 인트로를 보며
[이 글은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에 대한 감상평이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세계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당신의 세계에서 나는 조연이나 엑스트라, 혹은 배경일지도 모른다. 똑바로 걷는 법을 알지만, 그게 우리의 중심은 아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군중과 함께 걸어온다. 스크린 너머로 여러 얼굴이 있었다. 그들은 초점에 따라 선명했다가 희미해졌다. 그중에 김독자를 찾는 건 쉽지 않았는데,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모두가 흰 셔츠에 정장을 입었다는 것. 문득 ‘직장’이란 단어가 떠올랐고, 그러자 모든 얼굴이 픽셀로 박혔다.
김독자는 내몰린 곳에서 발견된다. 그곳은 폭력에 짓눌린 교실이거나 침대의 벽면이기도 했다. 뒷사람이 나올 때까지 문을 붙잡는 동안, 그는 편의로 세워진 NPC와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한 건, 이렇게 방치된 곳에서 그는 오히려 선명해졌다는 것이다.
유중혁(멸살법의 주인공)은 김독자의 대척점으로 잡히는데, 세계는 그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유중혁이 죽어 회귀능력이 발동되면, 이전 세계가 소멸하는 방식으로. 이런 곳에서 김독자가 살아갈 방법은 없다. 잠시 유중혁과 동행할 순 있겠지만, 그 역시 주인공의 서사를 위한 장치로 소모될 테니.
하지만 현실에서는 유중혁이 떠난다고 김독자가 사라지진 않는다. 멸살법이 연재된 사이트에는 아직도, 늘 밀려났던 한 남자가 조회 수‘1’로 남아 있었다. 지하철에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도 김독자가 바라본 시점과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앉아있을 때 빈자리로 시선이 몰리듯, 중심이란 멸살법처럼 그리 절대적이지 않다.
‘이 결말은 최악입니다.’
따라서 김독자가 작가에게 보낸 메시지는 그처럼 내몰린 모서리에도 중심이 있다는 항의를 담고 있다. 직장 상사가 유상화에게 추파를 던지는 순간, 중심은 회사라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옮겨진다. 정규직과 계약직이라는 위계질서 아래, 유상화에서 김독자를 향한 상사의 시선은 끝내 두 사람을 대등하게 묶으며 퇴장한다. 그렇게 계약을 벗어난 김독자는 서사를 위한 NPC에서 더는 상사가 개입할 수 없는, 독립된 주체라는 NPC로 거듭난다.
김독자는 결말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데 멸살법이 실체화되는 과정에서 주어는 모호해진다. 그가 바라던 공존의 서사란 주변을 희생하지 않는, 누구든 자기만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되는 결말이었다. 그러려면 모든 걸 아는 김독자도 관여할 수 없는, 유상화와 같은 현실 인물로 주체적인 NPC를 보여주어야 했다.
하지만 김독자가 만난 인물들이란 대부분 멸살법에 넘어와, 각 스테이지에서 대기하는 NPC로 서 있었다. 멸살법의 김남운이 현실의 할머니를 발길질하듯, 그들은 멸살법에 귀속된 채 이야기를 전개한다. 반면에 유상화와 이길영처럼 현실에서 멸살법을 맞닥뜨린 인물은 그 중심을 잡기는커녕, 실을 뽑는다거나 벌레를 부르는 등, 조력자로서 주변부로 밀려난다.
김독자에 의해 결말이 바뀐다 해도, 양쪽의 인물들은 구조나 행위에 있어 서사를 위한 요소로 계속 소모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존의 서사는 원동력을 잃어버린다. 더군다나 원작을 모르는 상황에서 본 나로서는, 이 사람이 현실 인물인지 소설 인물인지를 김독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결국에는 문을 잡아두던 김독자만 선명해지고, 그가 말하려던 메시지는 멸살법의 희생 없는 버전으로 되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