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7-5.
늦은 밤, 캠퍼스의 구석진 벤치에 케빈과 에린이 앉아 있다. 주변은 적막했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도 조용했다. 케빈이 손에 작은 종이 조각을 쥐고 있다. 언젠가 에린이 건넸던 말이 적혀 있다.
“관계는 예측할 수 없기에 진짜다.”
그 문장을 수없이 분석해보았지만, 오늘은 그냥 그대로 품고 있는 것이다.
“에린 씨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와 대화할 때, 무언가를 얻으려는 목적이 있나요?”
에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목적이라뇨?”
“효율성, 안정성, 감정적 보상, 혹은 사회적 유대. 관계의 이면엔 언제나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당신은 자꾸 예측에서 벗어나요. 이유가 궁금했어요.”
에린이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잠시 뒤,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람은… 꼭 이유가 있어야만 움직이는 존재는 아니에요. 그냥… 좋아서였어요.”
‘좋아서.’
그 한 단어가 케빈의 회로 어딘가를 멈추게 했다. 좋다는 감정은 수치로 변환되지 않았다. 공식도 없었다.
“그게 가능한가요?”
그가 묻자, 에린은 웃으며 대답했다.
“케빈, 당신은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관계는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되는 거예요.”
그날 이후로, 케빈은 감정이라는 함수 없는 문제를 풀어보려 했다. 에린과 자주 만났고, 함께 걸었고, 커피를 마시며 날씨 이야기도 했다. 처음에는 분석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의 웃음은 몇 초간 유지되며, 말끝은 가끔 떨렸고, 눈빛은 때때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나, 점점 분석은 흐려졌고, 감정의 여운만 남았다.
그리고, 어느 날. 에린이 말했다.
“케빈, 나 당신을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이해하려고만 하지, 같이 느끼려고 하진 않아요.”
그 말에 케빈은 멈췄다. 그녀가 더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나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정리하지만… 나란 사람을 함께 살아내려는 마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벤치를 떠났다.
케빈은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자신이 쓰고 있던 작은 수첩을 펼쳤다. 그 안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랑은 관찰이 아니라, 참여다.”
그 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적었지만, 아직 살아내지는 못했다.
며칠 후, 케빈은 도서관 한편에서 에린이 다른 이와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웃음은 편안했고, 자연스러웠고, 더 이상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그 장면을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시스템을 열었다. X-07. 그는 그 피험자의 선택이 더는 오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랑은, 정답이 없는 감정의 함수.’
그는 그제야 인정했다. 사랑은 해답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함께 살아내야 하는 미지수였다.
*
관제실. 벽면 스크린에는 케빈의 시선과 동공 반응 데이터, 심박수 곡선이 겹쳐 표시되고 있다. 강박사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방금 값이 바뀌었습니다.”
헤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감정 기반 의사결정 모듈이 자발적으로 활성화되었습니다. 변수는 에린입니다. 그녀의 대화 패턴이 케빈의 의사결정 곡선을 바꾸고 있습니다. 단, 감정 입력량 대비 반응 지연이 평균보다 길어, 관계 형성의 완결성은 낮습니다.”
강박사가 화면 속 케빈이 벤치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한다.
“완결성이 낮아도 돼. 중요한 건, 그가 이제 ‘참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잠시 후 헤나가 묻는다.
“박사님, 이 흐름을 유지할까요? 아니면 촉진할까요?”
강박사가 짧게 숨을 들이쉬고, 모니터 아래에 놓인 오래된 노트를 펼친다. 그 안에는 단정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은 관찰이 아니라, 참여다.’
“촉진하자. 하지만… 너무 빠르진 않게.”
그가 노트를 덮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가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해. 그래야 진짜가 되지.”
스크린 속 케빈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벤치에 앉아 있다. 하지만 강박사는 알고 있었다. 그 고요 속에서, 연산이 아닌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강박사의 머릿속에 오래전 자신이 놓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실험과 연구로 잊으려 했지만, 끝내 지워지지 않던 미소.
그때 그는 ‘관찰’만 했고,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강박사가 짧게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모니터 아래 노트에 적힌 문장을 다시 바라본다.
‘사랑은 관찰이 아니라, 참여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나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헤나가 강박사의 감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둔다.
‘관찰자, 표정 패턴 변화 감지 — 미소 0.4초, 의미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