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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만남

by 일심일도 채남수

집을 나설 때 나는 습관적으로 하늘을 본다. 그날 날씨를 점쳐보기 위함이다. 그럴 때마다 신통하게 잘 들어맞았다.


그날도 집을 나서기 전 습관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구름 사이로 검은 구름이 점령군처럼 휘젓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우산을 챙겼다.


“웬 우산? 하늘만 말짱하구먼.” 막냇동생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마디 툭 던졌다.


“야, 오늘 비 올 거야. 너도 우산 챙겨가라.” 큰소리치며 집을 나섰다.



그즈음 나는 대학 졸업반이고 9월이라 대학 생활 중에 가장 한가하고 신나는 나날이었다.


공기업 한곳과 대기업 두 곳으로부터 이미 합격통지서를 받은 터라 세상이 온통 내 것 같았다.


게다가 4학년 1학기까지 학점을 거의 이수하여 일주일에 4시간밖에는 강의가 없었다.


입사 전에 여자 친구를 만드는 것이 대학 생활의 마지막 목표였다.



교문을 들어서니 미팅을 주선했던 친구가 울상을 짓고 서 있었다.


여자 쪽에서 한 친구가 펑크를 냈다고 했다. 우리도 한사람이 빠져야 한다며 다짜고짜 사다리를 타라고 했다. 그 사다리에 하필이면 내가 걸려 넘어졌다. 기대했던 미팅은 사다리 패가 되어 연기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과대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한두 방을 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찝찝했던 기분이 갑자기 강한 햇살에 안개가 사라지듯 사라져 버렸다.


비로 엉망이 되었을 야외 미팅을 마음이 먼저 간파하고 반응한 것이다. 고약한 놀부의 심보다.


이심전심일까? 친구도 우산을 펼치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였다.


그때 바로 몇 미터 앞에 아가씨 하나가 비를 맞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마치 비를 즐기듯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같이 가던 친구가 우산으로 그녀를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며 미소로 감사 표시를 했다.


아~ 첫눈에 그녀는 내 마음속으로 들어 왔다.


결혼 상대자로 꿈꾸어 왔던 많은 것들을 그녀는 쏟아내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눈이 크고 눈썹이 선명한 귀염성이 있는 아가씨였다.


키는 작아 보였지만 약간 살이 찐 건강체로 생활력도 강해 보이고 수수하게 꾸미지 않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차림도 맘에 들었다.


내 여인이 비를 타고 홀연히 나타나 준 것이다.


잠시 후 그녀는 내 우산속으로 이사를 했다.


일이 잘되려니 나와 그녀의 집이 같은 방향이었다.


친구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잘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자기 집 쪽 골목으로 사라졌다.


소형우산이라서 비를 피하고자 몸을 바짝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10여 분을 더 그렇게 작은 우산 속에서 마치 연인처럼 몸을 비비며 걸었다. 마음이 풍선처럼 하늘에 붕 뜬 기분이었다.


그녀도 미팅이 있었는데 속이 좋지 않아 포기하고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좋은 사람 만나려고 미팅을 못 하게 했네요.” 일부러 ‘플러팅’을 날려 간을 보았는데 즉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녀의 집은 내가 막냇동생과 자취하는 집에서 채 백 미터가 안 되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빗속에서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되었고 급속하게 진전되어 내 여자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단풍이 산기슭 전체를 울긋불긋 물들이며 산을 휘감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즈음 나는 단풍놀이 미팅에 동참했다.


친구들이 애인이 있는 사람은 빠지라고 했지만, 못들은 채 꾸역꾸역 좇아갔다.


내 파트너와 나는 환상의 커플로 같이 참여한 모든 사람이 부러워했다.


그녀는 내 여자 친구와는 여러모로 달라 보였다.


키는 여자 친구와 비슷했지만 늘씬하고 예뻤다.


성격도 새초롬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공주 스타일이었다.


전공에서 이미 그들은 다른 향기를 풍겼다.


여자 친구는 간호학을 전공했고 그 친구는 미술을 전공했다.


산행 중에 힘들어하는 그녀를 위해 안아 옮기고 업어주기를 반복했다.


분명한 것은 결혼 상대자는 아니었다. 만약 결혼한다면 평생을 공주처럼 받들고 모시며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자꾸만 요동쳤다.


그녀의 작은 아버지가 내가 이미 합격한 기업체의 전무로 재직 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뜸 자기 작은아버지에게 부탁하면 요직으로 발령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마음에 든다며 에프터를 신청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내 여자 친구에 대해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틀 후 여자 친구가 급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녀는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헤어지자고 말했다.


세상은 참으로 좁았다. 알고 보니 미팅 파트너와 여자 친구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고 또 다른 친구도 있었다. 그날 미팅에서 있었던 모든 것이 가감 없이 여자 친구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사과하고 꺼져가는 불을 되살리는데 꽤 많은 진통을 겪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그 사건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고, 2년 후 드디어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만날 인연은 누구나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누가 비 오는 날 우연히 만나 결혼에 이를 줄 알았겠는가?


45년의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사랑과 가족들의 사랑이 함께 어우러져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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