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중턱에 올라서자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8월의 따가운 햇빛이 여봐란듯이 쏟아부었다.
더 힘든 것은 등에 업은 막내였다.
친구들과 칡뿌리를 캐러 오르내리던 길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동생을 업은 탓인지 만만치가 않았다.
그나마 잠이 들었는지 한쪽으로 머리가 쏠려 중심 잡기도 힘들고 바지까지 아래로 조금씩 흘러내려 더 힘들게 했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녀석이 왜 그리 무거운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아이와 맞닿은 등은 뜨거운 물을 부은 듯 덥고 찐득거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 버스를 타지 왜 힘들게 산을 타고 가는데?”
벌써 몇 번인가를 투덜댔지만, 어머니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등에서 칭얼대는 아픈 동생만 걱정이 되는지 연신 한 손으로 토닥거리며 주문 외우듯 중얼거리셨다.
”아무 걱정하지마. 내가 이 나라를 다 뒤져서라도 네 다리를 나을 의사를 찾을 거야. 나만 믿어, 내가 꼭 낫게 해줄 테니까.”
화가 치밀어 소리를 꽥 질렀다. “왜 힘들게 산을 넘냐고요?”
그제야 어머니는 정신이 돌아온 듯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울고 계셨는지 눈이 벌겋고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 보였다. 어머니마저 쓰러질까 봐 걱정이 앞섰다.
“힘들지,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 너까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아기가 아기를 업었으니 쯧쯧.”
더는 목이 메시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소나무 그늘을 찾아 어머니가 먼저 아픈 동생을 조심스럽게 앉히고 띠를 풀어 막내를 받아안았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돌며 땀을 식혀 주었다.
“아, 시원하다!”
미안함에 괜스레 더 큰 소리로 말하며 옆눈질로 어머니의 표정을 읽었다.
산 아래 동네를 멀거니 내려다보는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통곡하며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생은 다섯 살이 되던 그해 초여름에 다리가 아파 병원에 갔는데 갑자기 깁스를 하고 나타났다. 결핵성 관절염이라고 했다
그때 아픈 동생 나이가 5살, 나는 9살, 막내는 한 돌이 안 되는 기어 다니는 아기였다.
병원에 갔다 온 지 채 보름이 안 되어 다리가 너무 아프다며 울어대는 바람에 우리 식구는 총동원하여 깁스를 해체했다.
우리는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발목에서부터 무릎 사이가 온통 거무스름하게 썩어가고 있었고 발목 위 상처 부위에서 제법 자란 구더기 몇 마리가 툭툭 떨어졌다.
서둘러 병원에 찾아갔으나 더는 위험하니 무릎 위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의 고행은 그날부터 시작되었고, 완전히 웃음을 잃어버리셨다.
동생을 업고 큰 병원 작은 병원을 가리지 않고 찾았으나 모두 같은 말만 되돌아왔다.
“이 산만 넘으면 바로 그 유명한 의사가 있어. 이번에는 제발 고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텐데….”
우리 집에서 먼 거리는 아니지만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고 했다.
의사 면허는 없지만, 동생과 비슷한 환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아픈 동생을 업고,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내가 아기를 업고 산을 같이 넘는 중이었다.
큰 형은 고등학교에, 작은 형은 중학교에, 아버지는 소 장사 때문에 장기간 출타 중이라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따라나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의사의 집에 도착한 것은 점심이 다 되었을 때였다
그 집은 크고 웅장한 기와집이었다.
대청마루만 해도 우리 집의 10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의사는 동생 다리 상태를 살펴보더니 큰 가방을 들고 나왔다.
가방 안에는 수술용 칼을 비롯한 알 수 없는 여러 가지의 기기와 약품이 가득했다.
어머니에게 동생의 손과 발을 붙잡으라 하고 나에게는 뒤에서 동생을 끌어안으라 했다
갑자기 수술용 칼로 장딴지 위쪽을 쭉 갈랐다.
동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버둥을 치고 울부짖었다.
“아이 아파, 아파요. 아파~.”
그러다가 끝내는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소리쳤다.
끌어안은 나도 울고, 막내는 영문도 모르고 대청마루에서 자다 일어나 울고, 이를 악물고 동생의 손과 발을 휘어잡은 어머니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사는 긴 수저 같은 기기를 동생의 장딴지에 쑥 집어넣어 발목 바로 위에서 끄집어냈다. 피고름이 한없이 쏟아져 내렸다.
발 전제가 피 고름으로 꽉 차 있는 듯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의사 선생님이 네 동생 다리 고쳐주시겠대. ”
벌써 몇 번인가를 같은 말을 하고 또 했다.
정말 얼마 만인가,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동생 다리가 다 낫기라도 한 것 같이 좋아하셨다.
덩달아 나도 없던 힘이 생겨 오는 길은 더운지 아기가 무거운지도 모르고 금세 산을 넘었다.
3일 후 또 의사에게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명색이 반장인데 또 결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차라리 애를 데리고 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그 결단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하지 못하고 감히 일을 저질렀다.
담임 선생님은 어이가 없어 했지만, 다행히 책상 밑에 애를 내려놓고 수업을 듣도록 허락하셨다.
첫 시간은 잘 견뎌 주었다. 막내는 고맙게도 금세 잠이 들어 무사히 넘어갔다.
문제는 다음 시간에 터졌다. 녀석이 똥을 싼 채로 기어 다니며 온 교실 바닥을 똥칠하고 만 것이다.
애들은 코를 부여잡고 웅성거렸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거렸다.
결국, 선생님이 나서서 지휘 통제 아래 똥을 치우고 애를 씻기고 교실을 청소하는 등 한바탕 야단법석을 치렀다.
지금이니 웃고 넘어가지만, 당시에 얼마나 창피하고 선생님과 반 친구들에게 미안했던지, 누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담임 선생님은 반 친구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나를 놀려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말라고 강력하게 지시하셨다
그 덕에 친구들이 그날의 황당한 사건을 더는 확산시키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속상해하실 것 같아 그날 일을 어머니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훗날 누가 말했는지 아시기는 했지만.
다행인 것은 그날 이후로는 의사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직접 왕진을 와주셔서 나는 막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동생의 아픈 다리는 그 의사 선생님의 지략으로 차츰 고름이 멎고 3년 만에 완치되었다.
동생을 치료해준 그 의사 선생님은 동생이 나았던 그해에 정신 이상으로 더는 의사 생활을 못 하고 패인이 되고 말았다.
정신이 없어 자기 집은 못 찾고 헤매고 다니다가도 우리 집에는 들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정성스레 밥을 챙겨드리고 집에까지 모셔다드리곤 했다.
동생은 치료 과정에서 생긴 상처 등으로 다리 여러 곳이 엉겨 붙고 특히 오금 부위가 더욱 심하여 10도 정도가 굽어 걸을 때 제법 많이 절름거렸다.
하지만 처음 의사들이 주장한 대로 절단하지는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당시 의사들은 한결같이 무식하고 어리석은 처사라 나무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이 만든 인간승리가 아니겠는가!
그 동생이 잘 자라 장가들고 아들딸 낳고 어언 칠십이 되었으니, 어머니가 눈물과 사랑으로 세운 복 된 가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