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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심일도 채남수 Oct 12. 2024

너야말로 천생연분

공장들이 채 반도 들어서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전주공단에 어슴푸레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할 때 즈음 내가 탄 버스는 팔복로에 들어섰다


전북대학교 앞을 지나자 늘 그랬듯이 내 가슴은 또 뛰기 시작했다


어젯밤 술집에서 시종 비아냥거리던 현진이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강형, 도대체 열아홉 번째가 뭡니까? 여자란 게 뭐 별거 있습니까? 그저 담담하게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선을 보세요. 겁먹지 말고."


그랬다. 장가 한번 가 볼 거라고 매주 토요일만 되면 상사 눈치 보며 퇴근 전에 회사를 빠져나와 울산에서 전주까지 멀다 않고 다녔다


어떤 날은 토요일 저녁, 일요일 아침, 점심등 연거푸 세 번씩이나 출전을 했지만, 타고난 성품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데다가 여자 알레르기(?)까지 있어 버벅대다가 수없이 완봉패를 당했다


그렇게 3년을 어정쩡하게 흘러 보내고 나니 대학교 세 번 미끄러진 것과 합하여 나이 삼십이 되어버렸고, 그 듣기도 싫은 '총각대장' 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녔다


“강형, 참말로 해병대 출신 맞소? 도시 믿기지가 않아. 여자 앞에만 서면 반편이 되시니--"


맥주를 병째로 나발 불며 이죽거리던 현진이 모습이 다시 떠올라 세차게 고개를 저어  떨쳐내 버렸다.


"반편이라고? 빌어먹을 자식!"


이런저란 생각으로 마음을 삭이고 있는데 버스가 흔들어대며 춤을 추더니 터미널에 멈추어 섰다


시계를 보니 7시 반이다


약속시간 30분 전이라 조금은 여유가 있어 선을 보기로 한 장미다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맞은편 흙다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음도 좀 가라앉히고 또 현진이가 애써 만들어준 각본을 한번 더 읽어보기 위해서다.


마침 흙다방에는 서너 사람이 앉아있을 뿐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어 혼자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레지들에게 얼씬도 못하도록 경고해 두고, 커피 한잔을 시킨 다음, 주머니에서 꾸역꾸역 각본을 끄집어냈다.


맨 위에 '선을 볼 때의 요령'이라고 현진이의 흘려 쓴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짜아식, 남 없는 애인 하나 있다고 재는 건가!'


사실 현진이야 으시대고도 남을만했다. 같은 대학 동기동창이지만 걸림 없이 학교에 들어와  나보다 세 살이나 아래고, 게다가 학교 다닐 때부터 사귀던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강형, 강형의 경우 나이가 드셨으니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나이를 고집하려면 직위를 속이세요. 곧이곧대로 4급 사원이라고 하지 말고 대리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실 강형 나이에 대리로 진급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굳이 4급 사원을 고집하려거든 나이를 속이세요. 결혼하면 그만이지, 결혼하고 나서야 사실을 안다 한들 무슨 문제가 됩니까?"


"하지만, 부인이 될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부인이라고요? 누가요? 사실대로 얘기하면 부인도 되기 전에 도망가버리는데, 무슨 얼어 죽을 부인이란 말입니까?"


'그래, 네말이 맞다. 우선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첫째지'


나는 드디어 불의와 야합하기로 작정했다.


"여자 앞에서 말을 더듬는 것은 너무 당황한 탓입니다. 강형 앞에 앉아있는 여자를 형수나 동생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아예 술집여자라고 생각하든지---"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 5분 전이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미다방에 들어서니 옛 하숙집 아주머니가 여자와 구석자리에 나란히 앉아있는 게 보였다


나를 발견하고는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수차례 실패했지만 또 맞선 자리를 마련해 주신 고마운 분이다


여자와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콩콩거리고 침이 마르며,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참말로 나는 여자 알레르기가 있나? 아니면 바보인가?'


침을 꿀꺽 삼키고 정신을 가다듬은 뒤 하숙집 아줌마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맞선 본 처녀가 에프터도 없이 황망히 도망가버리고 씁쓸한 마음으로 물만 홀짝거리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숙집 아주머니와 함께 영란이가 좀 전에 선본 아가씨가 앉았던 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깔깔대고 웃었다.


"오빠, 도대체 왜 그래? 왜 바보같이 식은땀은 뻘뻘 흘리고 , 말은 어째서 더듬어? 참 이상도 하네, 그렇게 똑똑하고 건장한 일등 청년이---"


"야, 말도 말아라. 도대체 난 여자 알레르기가 있나 봐. 여자 앞애만 서면 온몸이 쥐가 나고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그나저나 영란이 너 오랜만이다. 참 너 지금 몇 학년이지?"


"피, 금년에 졸업한다오. 뭐 나에게 관심이 있어야지. 그나저나 오빠 유감이유. 왜, 난 여자가 아닌가?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지도 않네?"


"에이, 너야 뭐?"


'허어, 이 몸도 이젠 스물셋이요."


지금까지 멀거니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숙집 아주머니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영란아, 너 연수오빠 어떠니?"


"뭐가 엄마?"


"네 신랑감으로 말이야?"


우린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웃음이 멎고 우리는 서로 멋쩍어져 잠시 눈길을 허공에 두었다.


"야~아, 뭘 어렵게 생각하니? 너희들 둘 다 서로 잘 알겠다, 나이가 일곱 살 차이 나는 게 좀 흠이긴 하지만 연수 정도라면 그까짓 것 뭐 문제 되니? 또 우리 영란이, 연수 네가 몇 년 가르쳐 봐서 잘 알겠지만 머리 좋고, 얼굴 예쁘고, 착하고---"


영란이의 발개진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본시 예쁜 얼굴이지만 어느 사이 성숙미까지 더하여 빛이 났다


사실 전부터 호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워낙 나이 차이가 많아 한 번도 결혼 상대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좋습니다, 장모님!"


큰 소리로 확실하게 대답했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든 영란이가 눈을 약간 흘기는가 싶더니 오른쪽 눈을 살며시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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