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남의 미학
―김언 『모두가 움직인다』(문학과 지성사, 2013)를 읽고
황현산 평론가는 「시가 무슨 소용인가」(『밤이 선생이다』)에서 ‘시의 목적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하고, 새로운 감수성과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라 했다. 이를 단순하게 ‘낯섦’으로 이해한다면 김언의 『모두가 움직인다』는 황현산의 이 말을 증명하는 듯하다. 예문 같다. 그의 시는 문법적인 문장이 아니라 어긋남이며, 일반적 상상을 비껴가는 이미지다. 김언은 은연중에 시로 ‘시 쓰기’를 고민하고 어려움을 말하며 여러 방식으로 시에 다가간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놀지 않는다. 어딘가에 타인을 만들고 있다.
고요하고 거침없이 적을 만든다. 그를 사랑해도 좋다.
그와 무엇으로 대화하겠는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위험에 대해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미학」 중에서
혼자 있어도 혼자 놀지 않는다. 책을 읽든, 음악을 듣든 대상이 있다. 결국 삶 자체가 타인을 만들며 그사이에는 ‘적당한 간격이’ 있어 위험하기도, 아름답기도, 오해하기도 한다. 그 간격은 안전지대로서 그것을 넘어오면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적당한 간격이 필요함을 말한다. 글쓰기에서도 특히 감정을 표현하는 시에서 언어로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기는 어렵다. 이는 사람과 글 사이에도 간격이 있으며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에도 간격이 있음이다. 이 간격은 타인이 들어가 놀 수 있는 간격 이기도다. 이에 적당한 간격은 미학이다.
‘새벽에 유령처럼 떠돌다 누군가에게 발견되면 사람’이 된다.(「유령의 산책」)에서 김춘수의 「꽃」이 생각났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이 의미 있는 ‘나’가 될 수 있고, ‘시’ 또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때 진정한 시인으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시인이 되거나 ‘붕어빵이 물고기인지 밀가루인지’ 애매모호하듯 「정체성」에 고민이 있다고 시를 대하는 시인의 마음을 말한다.
인정받는 시인도 처음 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 쓰기의 어려움은 짊어진 짐이다. 이에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사람을 만나러 가다」)을 시로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비유하며, 조바심이 많은 문학이라고 에둘러 말한다. 또한 시인은 ‘식사하는 문장을 쓰며, 익사하는 문장 속에서 발버둥 한다’(「나는 식사하는 문장을 쓴다」)라고 그 어려움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써도 시가 되지 않는 공허한 문장 가운데’ 있다고 한다. (「공허한 문장 가운데 있다」)
‘문법에 맞는 문장을 포기하고 비유적’으로 써도 표현이 안 된다고 하며, 떠오르는 문장을 즉시 노트에 쓰지 않으면 ‘날씨를 바꾸는 나비의 형제’가 될 거라고 시 쓰기에 대한 방법을 길게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시 쓰기의 어려움을 다양하게 설명조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시를 쓰다 잠시 멈추는데, 그것은 “과일이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문체를 숙성 중”(「몽블랑」)이라고 희망적인 말도 한다. 시 쓰기는 ‘항상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나는 항상 실패한다」) 것이며 ‘불가능하고 홀로 써야 하는’ 시 쓰기가 어렵지만, 항상 실패만 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달아나는 영혼을 돌로 눌러놓는’ 노력이 필요하며,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에게「냉담자」가 되어 ‘반성하는 본능도 반성하지 않는’「기하학적인 삶」을 살아가는「먼지」가 아니다. ‘생일이지만 도착하는 말도 없이 자신이 선물인 양 바라보는’(「그런 생각」) 그런 삶보다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친구를 가지며,「뼈와 살」처럼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싶다.
잉카제국 수도였던 페루 쿠스코에는 거대한 돌이 각각의 모습이지만, 테트리스처럼 아귀가 꽉 막게 짜인 거대한 돌담이 있다. 이 시집을 읽으며 떠오른 이미지다. 생뚱맞기까지 한 단어와 문장의 조합은 서로 옆에서 위에서 아래에서 받쳐주고 의지하며,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추신」: ‘다른 사람의 입속에서’ 문장을 쓴 그의 시집을 읽다 보면 ‘넓은 사막이’ 나오지만, 거기에는 그의 말처럼 ‘물이 들어 있고 건드릴 때마다 다른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