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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Jun 30. 2023

함께, 그리고 혼자 노니는 놀이터

나만의 글쓰기


헤어질 결심을 하지 않아도 헤어지는 게 있다. 하루가 그렇다. 


시냇물 같은 일상이 졸졸 흐른다. 스치듯 지나간다. 내 의지에 따라 하루를 풍선처럼 부풀리기도, 쪼그라지게도 한다. 혼자 사는 일이 뭐 그리 특별한 게 있겠나. 올 4월에 국가가 인정하는 독거노인에 합류했다. 돌봐 줄 사람 없이 혼자 거주하는 만 65세 이상이 기준이다.  


늙어 간다는 것은 모든 힘이 빠지는 거와 비례한다. 생각하는 힘까지 흐물거린다. 집이 잠자는 장소와 물건 보관 외에 특별한 기능이 없었던 지난날과 달리,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럴 때 혼자서 언제든 놀 수 있게 문 열어 놓은 곳이 나만의 글쓰기, 놀이터다.      


내 유년 시절에는 정해진 놀이터가 없었다. 잔디가 푹신해 미끄럼 타기 좋았던 묘지, 땅 짚고 헤엄치던 개울, 진달래 따 먹던 야산, 논두렁 밭두렁, 신작로 등 발 딛는 곳이 놀이터고 친구였다.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놀았다. 요즘은 주위에 정리되고 기구도 다양한 좋은 놀이터가 많다. 이런 놀이터가 복도 많게 노년의 내게 올 줄 몰랐다. 혼자서 놀 수 있는 글쓰기다. 쓰라고 멍석까지 깔아 주는 브런치 글쓰기 플랫 홈도 있다. 노년의 놀이는 허리, 어깨 디스크 위험도 있고 아프다. 백내장과 노안 수술로 유난히 잘 보이는 컴퓨터 커서만 멍하니 노려보다 접고 일어나는 게 다반사다. 글쓰기는 쉽지 않은 놀이다. 어렵고 힘들다. 그래도 한 줄 두 줄 모내기하듯 내려가는 커서를 보면 뿌듯하다. 이 만족감이 글쓰기를 유혹한다. 잘 쓰고 싶다. 그래선지 아직도 보여주기가 부끄럽지만, 발 디딘 곳이 친구였듯, 클릭하는 곳엔 글 쓰는 든든한 sns 친구도 있다.     


주위에서 문창과 다닌다고 하면 “글 써야잖아? 난 못해.”라고 말한다. 나도 그랬다. 못 쓰니까 안 쓰기로 자신을 몰아갔다. 멀찍이 바라보며 읽기만 하는 쓰기 방관자도 좋다고 생각했다. 글은 못 써도 평생교육으로 좋고, 수필, 시, 소설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치매 방지에도 좋을 거라며 문창과에 왔다. 글쓰기만 목적이었으면 글쓰기 강좌 듣는 것도 한 방법이었을 터다. 수강 과목의 과제 외에 글쓰기를 해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고수리 교수님 덕분이다. 수필 쓰기 과제 피드백에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시면 안 될까요. 계속 써 주세요.’라는 문장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솔깃한 마음으로 쓸 결심을 했다.      


일기를 쓰는 것은 좋은데 하루 일도 잘 생각이 잘 안 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기 일부다. 한바탕 웃었다. 지금 기억력이야 오죽하랴. 세월이 주는 또렷한 흔적이 기억력 감소다. 11살 모습에 웃었지만, 앞으로 쓴 글을 보며 웃는 날이 있을까. 언제 방문할지 모를 죽음이 가까이 있다. 남기기보다 버려야 할 시기이다. 왜 자꾸 남기려 할까? 내 흔적을 잡고 슬퍼할 사람도 없다. 이 투명한 사실 앞에 현재도 남겨 놓으려 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진도 글도. 그런데 사라지는 기억이 안타까워 쓴다. 추억의 되새김도 좋다. 그렇다. 미래는 신의 영역이니, ‘지금’을 쓰는 것이 나의 영역이다. 미래를 위해 남기려 쓰는 게 아니라, 현재를 사는 글쓰기다.      


짧은 기간이지만 글쓰기 시작 후 조그만 행동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얼마 전 직장 후배한테 전화했다.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이야기 끝에 글을 써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이 말이 나왔다. 후배는 좋은 방법 같다며 써보겠다고 한다. 글쓰기를 추천하는 내가 낯설다. 퇴직한 동료 모임에서는 먹고사는 얘기, 직장 생활했던 과거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동안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공동화제가 아니면 흘려들었는데 귀 기울이는 모습에 스스로 놀랐다. 그들 삶에 보이지 않는 박수도 보냈다. 어려움을 묵묵히 헤쳐온 그들은 현재 단단한 모습으로 포용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혼자 사는 게 더 힘들 거’라고도 말한다. 아파트 입구 노상에서 야채 파는 할머니가 안 보이면 궁금해하는 마음도 있다. 주위 사람들, 사물에 대해 외면보다는 한 번 더 바라보는 모습도 좋다. 나의 언어로 쓰고 읽어주며 타인으로 인해 내 지평이 조금씩 넓어진다. 이상하게 마음이 선해진다.     


헤어질 결심을 해야 헤어지는 게 있다. 글 쓰는 날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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