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9 - 영화 신작 리뷰 #1
*이 게시글에는 영화 <살인자 리포트>의 스포일러를 일부 담고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예민하신 분들 중 혹시라도 영화를 관람하실 계획이 있으시면 주의 바랍니다.
어제 <살인자 리포트>라는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처음 써보는 신작 리뷰이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보면서 느낀 부분들을 위주로 감상을 적어보려 합니다.
영화관에서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이 꽤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 사실 요즘은 꼭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셔도 - 공감하실 것 같은데 작년부터 지금까지 인상적인 국내영화가 저에겐 없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유명 배우 분들께서 공개적으로 한국 영화와 극장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시는 내용이 오히려 잔소리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니, 좋은 영화라면 제가 제 돈 내고 극장에 당연히 가죠. 재미가 없는데 왜 가야 합니까?'라는 약간은 반항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더욱이 영화를 제법 좋아하는 저는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인지 최근의 유행과는 다르게 '굳이' 극장에 자주 가는 사람이기에,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살인자 리포트>는 그래서 오히려 더 기대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단순하게 제가 스릴러 장르를 비교적 좋아하는 것도 있겠습니다만, 주제넘게도 거시적인 차원을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한국 영화의 연이은 실패는 영화 업계 전반에 일종의 패배주의를 불러오고, 안정성에 모든 것을 쏟는 식으로 영화계 전체의 도전적인 시도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별도로 리뷰하진 않았지만 안정적인 성공에 모든 것을 치중한 영화의 예가 바로 <좀비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안전하게 영화를 만들어서 대중성을 챙기는 것이 결코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영화=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에게는 분명 아쉬움이 남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인자 리포트>는 '저예산 영화로도 의미 있는 장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좋은 예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선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큰 그림입니다. 일단 기본 포맷이 꽤나 흥미롭습니다. 단순한 살인마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로서 치료를 위해 살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설정은 흔하긴 해도 좋은 캐릭터 설정이었습니다. 최근 중범죄의 형량에 대해 사회적 불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시의적절해 보였습니다. 후반부의 반전까지 영화의 전체적인 큰 이야기 줄기가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초기 구상이 저예산 영화라는 점을 감안한, 아주 좋은 시작이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설정을 뒷받침하는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도 좋았습니다. 조여정 배우가 연기한 백선주라는 캐릭터는 꽤 다층적인 인물입니다. 이성적이고 강인한 기자였다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부모였다가, 살인자와 같은 공간에 놓인 약자가 되기도 하죠. 따라서 꽤 여러 층위의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조여정 배우는 꽤 완벽하게 각각의 연기를 해냅니다. 이 때문에 주인공의 급변하는 상황과 감정이 잘 전달된다고 느꼈습니다. 정성일 배우 역시 정중하면서도 어딘가 공포심을 자아내는 캐릭터를 잘 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연출입니다. 사실 좋은 큰 그림을 그려놓고 디테일에서 점수를 따지 못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이런 이야기를 만들자"라는 초기 구상이 좋아도, 이 이야기를 10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어떻게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빌드업을 쌓을지는 오롯이 제작자의 몫입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훌륭한 이야기꾼은 더 재밌고 맛깔나게 이야기를 푸는 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연출은 너무 아쉽습니다. 특히, 초중반의 컷 전환은 스릴러 장르와는 맞지 않습니다. 상당히 스타일리시한 촬영 장면들을 여러 번 교차해서 보여주고는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스릴러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긴장감입니다. 조여정과 정성일 배우 사이의 긴장감이 지속되어야 할 초중반에서 자꾸만 힘을 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경찰이자 백선주의 애인인 한상우 역의 김태한 배우의 연기가 아쉽습니다. 그 때문인지 중간중간에 굳이 들어간 삽입 장면들이 자꾸만 극의 몰입을 떨어뜨립니다. 결국 신선한 큰 그림이 빈약한 연출력 때문에 희석되고, 캐릭터들의 매력도 반감된다는 느낌을 받아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종합하자면 이 영화에 줄 수 있는 점수는 C+ (2.5/5.0) 정도일 것 같습니다. 신선하고 좋은 캐릭터와 초기구상에도 장르적 재미를 충분히 챙기지 못한 연출력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감독이 어떤 고찰을 이 영화 속에 담고 싶었을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은 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표면적으론 도덕적 딜레마일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라는 질문은 인류사에 수없이 반복된 것이지만, 그만큼 강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조금 더 세부적으로 주인공인 백선주가 기자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인물의 직업은 종종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선주는 훌륭한 기자로 보입니다. 대기업의 비리와 잘못을 밝혀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서 그녀는 정의로운 기자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의로운 언론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일련의 사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입지에 불안을 느끼게 되고, 지금은 자신이 살인자라 주장하는 사람 앞에 앉아 있습니다. '특종'을 위해서 경찰에도 신고하지 않은 그녀는, 이미 도덕적인 선 위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기업을 취재하던 그녀의 마음은 진심으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대기업의 이름만큼 더 강한 파급력을 갖는 특종을 얻고 싶은 마음이었을까요? 정말로 그녀는 정의로운 기자였고, 잠깐 특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뿐일까요? 이런 지점을 인터뷰이인 살인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녀처럼 현대 언론과 미디어는 특종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조회수가 곧 돈이고, 자극적인 기사가 곧 권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미디어들은 사건의 대상들을 아주 손쉽게 타자화합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손쉽게 팔아치우고 또 소비할 수 있는 것이 현대 사회의 미디어입니다. 백선주 기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인터뷰를 하고 피해자의 유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남 이야기처럼 합니다. "반드시 그들 중 누군가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질문이었습니다.
타자화의 화신인 그녀가 비로소 그 속성을 포기하게 되는 순간은 이 모든 일이 비로소 그녀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 모든 문제가 백선주 자신의 일이 되자, 모든 판단이 복잡해집니다. 쉽게 말해 이런 것입니다. 그동안 남의 일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고 이야기할 수 있던 문제가, 자신의 것이 되자 사실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미디어와 언론이 얼마나 사건을 단순화해서 이야기하고 또 받아들이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를 받아들이는 수용자들도 굉장히 세상을 단순하게 보게 됩니다.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라거나, 넷상에서 가속화되는 악플 문제들이 바로 그 예입니다. 우리는 남의 일이기 때문에 손쉽게 사건을 소비하고 감정을 발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손쉽게 선과 악을 분리해 내어 나를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백선주의 마지막 대사처럼 스스로가 '죄를 지었으면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나 자신은 배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