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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어쩔 수 없는지 묻지 않고 묻는 사회

2025.10 | 영화 신작 리뷰 #2

by 안형섭

*이 게시글은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강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영화를 관람하실 계획이 있으시다면 주의 바랍니다.



오늘은 신작 리뷰로, 가장 화제작이라 손꼽히는 <어쩔수가없다>를 리뷰해보려고 합니다.


어쩔수가없다 | 감독 박찬욱 | 출연 이병헌 손예진 이성민 차승원 염혜란 박희순 | 139분 | 15세 이상 관람가


9월 마지막 날, <어쩔수가없다>를 관람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전의 박찬욱 감독의 작품인 <헤어질 결심>을 매우 매우 좋아했던 터라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수가없다>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꽤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출연하는 배우들 역시 유명한 배우들이 많았고, 박찬욱 감독이 직접 여러 채널을 통해 홍보하는 것이 낯설어서인지 재밌게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잘하던 사람이 잘한다


야구판에는 '야잘잘'이란 말이 있습니다. 야구는 잘하던 사람이 잘한다는 뜻인데요. 저는 <어쩔수가없다>야 말로 '영잘잘'이 성립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도 잘하던 사람이 잘합니다. 이름값이 훌륭한 배우진들은 각자 자신의 맡은 바를 충실하게 해냅니다. 우선 가장 비중이 큰 '만수'역의 이병헌 배우는 역시나 훌륭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여러 장르를 훌륭하게 소화해 내지만, 코미디 연기 역시 이렇게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성민/염혜란 배우가 연기하는 부부 역시 극의 코믹함을 잘 살려주고 있고, 박희순 씨는 감정의 간극이 큰 인물임에도 아쉬움 없이 잘 인물을 소화했습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만수'의 아내 '미리' 역의 손예진 배우였습니다. 만수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다층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꽤나 난도가 있는 연기였음에도 손예진 배우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합니다. 오히려 '미리'라는 인물이 손예진의 연기 때문에 훨씬 더 강한 인력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층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손예진 씨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력은 구멍이 없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드러나는 데에는 물론 배우 개개인의 연기의 능력치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제작진 전체의 많은 수고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한 배우의 연기가 혹평을 받는다면 배우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그런 배우의 연기를 보고도 '오케이'사인을 내린 연출자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꼼꼼한 연기 디렉팅과 연출, 배우들의 연기, 편집, 미술, 소품, 의상, 음악에 이르기까지,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블랙 코미디란 이런 것, 그렇지만...

"이번 영화의 유머는 더 노골적이다"라고 언급한 감독의 인터뷰처럼, 이 영화는 대놓고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피식하게 만드는 부분이나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웃음은 슬랩스틱 코미디나 <극한직업>과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닙니다. 웃긴 장면이지만 어딘가 씁쓸하거나 짠한 마음이 듭니다. 이는 아마도 이 영화의 유머가 우리가 사는 현실의 신랄한 풍자이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어리석음과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웃게 되지만, 사실 그 모습은 관객인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제대로 된 '블랙 코미디'(부조리극과 같은 어두운 소재의 풍자적인 코미디)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이병헌과 이성민이 만나는 장면은 블랙 코미디의 정수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전작인 <헤어질 결심>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들이 느껴집니다. 특히 <헤어질 결심>의 촬영과 미장센은 여러 평론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요. <어쩔수가없다>의 촬영은 이에 비하면 지나치게 장식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후술 하겠지만 주제에 대한 사고방식이 "중년 남성"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쉽게 말해서 약간은 '아저씨 냄새'가 나는 영화입니다.


이런 부분이 비판받을 이유는 되어도 영화 전체가 재미없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평점을 A(4.0/5.0)로 주고 싶습니다. 혹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꼭 영화관에서 관람하시기를 추천합니다. 영화 중에는 가볍게 웃을 수 있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무겁게 생각하는 영화인데. 그만큼 <어쩔수가없다>에 담긴 메시지가 풍부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풍부한 만큼 관객들의 상상력이 발휘되어 다양한 해석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주의적*(영화감독 개인의 개성과 철학을 중시하는) 작품의 좋은 특징이라 할 수 있겠네요.




<어쩔수가없다>의 이야기 구조는 크게 '낙원 - 낙원의 상실 - 낙원의 복구'로 구성됩니다. 첫 시퀀스에서 만수(이병헌)는 가족들을 꽉 껴안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만수의 삶은 일에서나 가족에서나 개인으로나 완벽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영화는 이런 그의 낙원이 상실되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낙원을 복구하려는 모습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게 결말에 다다르면 만수는 자신의 낙원을 어느 정도 복원해 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관객들은 의문을 갖게 될 겁니다. '이게 정말로 잘된 걸까? 이게 정말로 아까의 그 낙원이 맞을까?' 하고 말이죠. 이 의심은 다시 또 다른 의문으로 연결됩니다. '만수와 가족들이 나온 첫 장면, 처음의 낙원은 정말로 낙원이 맞았을까?'


아담과 만수, 에덴과 노동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영화는 만수가 자신의 낙원을 잃으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태양 제지 공장에서 잘 근무하고 있는 성공한 제지업자입니다. 그러던 그가 회사로부터 선물로(사실은 해고 선물이었지만) 장어를 받으면서 그는 해고됩니다. 3개월 내 복직이라는 목표와는 달리 그는 1년이 넘게 실직 상태에 머무르게 되고 그의 낙원은 하나씩 상실됩니다. 만수의 가족, 만수의 집, 만수의 직업이 모두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죠.


재밌는 것은 그의 이런 상황이 마치 성경의 '아담' 그리고 '에덴동산'의 이야기와 맥락이 닿아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동시에 아담은 '노동'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게 되는 저주를 받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 창세기 3장 17, 19절
일하는 것이 저주였지만, 이제는 일하지 않는 것이 저주이다.

만수 역시 '장어'를 받고 직장이라는 낙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장어를 보고 만수의 아들이 "이거 뱀이야?"라고 물어보면서, 영화는 장어와 뱀을 동일시합니다. 뱀으로 인해 낙원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아담과 유사하지만 사실 둘의 성격은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다릅니다.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나면서 '노동'을 저주로 받게 되지만, 만수는 '노동'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즉 아담과는 달리 만수가 사는 이 시대에는 일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합리주의적 논리 하에 '일할 능력이 없는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노동이라는 것이 아담에게는 저주였을지 몰라도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단순히 땀 흘려 일해야 하는 저주보다, 현대의 이런 논리가 인간에게는 더 저주일지도 모릅니다.


레드페퍼 컴퍼니, 실종된 남성성


이런 논지를 더욱 강화하는 것은 극 중 남성 캐릭터들의 '남성성'의 부재입니다. 실직한 남성들은 하나같이 남성성에 있어서 의문부호가 달립니다. 특히 이 부분을 잘 보여주는 인물은 범모(이성민)입니다. 범모는 젊은 시절 아라(염혜란)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남성성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아라가 그에게 반하게 된 모습은 어두운 극장에서 라이터를 켜고 "나만 따라와"라고 적극적으로 이끌 때였습니다. 그러나 실직 후 그는 이런 남성적인 모습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부부간의 성적인 관계에서도 남성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범모(이성민)는 가장 남성성이 사라진 인물이다.

남성성을 외면으로 드러내지 못하던 그가 딱 한 순간 영화에서 극적으로 남성성을 드러내는 장면은 극 중 만수가 만든 가짜 회사인 "레드페퍼 컴퍼니"에 지원할 때였습니다. 즉, 범모는 일할 때 혹은 일하기 위해 노력할 때에만 비로소 바지를 벗는 모습으로 남성성을 외면화합니다. 이외에도 만수가 일을 할 때만 수염이 자라 있다는 것도 이런 테제를 강화합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일하지 못하는 상태를 극 중의 남성 캐릭터들은 남성으로서의 실패와 동일시하는 듯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만수가 다른 많은 화분 중에 굳이 '고추'가 열린 화분을 선택하고, 이에 기인해서 유령 회사의 이름을 '레드페퍼'로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지독한 유머 감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돼지', '나무' 그리고 인간

돼지 등급을 매기듯 사람에게 등급이 매겨진 장면

이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개인'이 취업시장에서 어떻게 파괴되는가입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등장인물들이 인간적으로 대우받기보다는 하나의 부품 혹은 평가대상으로 보이도록 조명합니다. 이런 인간과 유사성을 갖는 소재가 영화 내에 여럿 등장합니다.


그중 하나는 '돼지'입니다. 극 중 만수의 아버지는 아주 큰 돼지 농장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전염병이 돌자 만수의 아버지는 돼지 2만 마리를 산채로 땅에 묻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만수는 자신의 아들에게 아들이 훔친 스마트폰을 묻으면서 해줍니다. 그리고 그 스마트폰을 묻은 장소는 만수가 사람을 묻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미리(손예진)는 만수의 살인을 의심하는 아들에게 "아빠가 돼지를 묻었다"라고 사실을 왜곡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장면에서 영화가 돼지와 인간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온실에서 만수는 나무와 인간을 동일시합니다. 이 온실은 만수의 아버지가 자살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소재는 '나무'입니다. 나무는 여러 의미에서 만수와 밀접합니다. 만수는 나무를 잘라 종이를 만드는 제지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만수는 식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분재나 원예를 하는 온실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온실에서 만수가 사람도 분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시조(차승원)를 살해한 후에 시조의 사체도 분재하듯이 묶고 꺾습니다. 그 모양이 사뭇 기괴합니다. 그렇게 '분재'가 된 시조를 그는 나무 밑에 파묻습니다. 나무는 그 시체를 먹고 다시 자라게 되겠죠. 이런 장면에서 인간과 나무 역시 동일시됩니다.


그렇다면 영화 속 '나무', '돼지'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바로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길러지고 사용되고 처분된다는 것입니다. 극 중 만수가 제지 공장의 선출(박희순)의 인터뷰 영상을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선출은 "제지가 나무를 막 자른다고 오해하시는데, 그런 게 아니라 제지를 하기 위한 나무를 따로 심어요. 그리고 그 나무를 베고 나면 다시 다른 나무를 심고..."라고 언급합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따로 심고 베어낸 후에는 다시 필요에 의해 다른 나무가 심깁니다. 이는 돼지도 비슷합니다. 먹기 위해 돼지를 심지만, 필요 없어지면 바로 처분됩니다. 여기에 더해 나무의 경우에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분재가 되어 그 모양조차 꺾이고 묶인 상태로 자라게 됩니다.


이런 부분은 취업시장에서 사회의 개인들이 마주하는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 필요가 없어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나무들처럼 잘리고 돼지들처럼 묻히게 됩니다. 그 자리는 다시 필요에 맞게 길러진 새로운 나무와 돼지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혹 제멋대로 자라는 개인이 있다면 필요에 맞게 그 모양이 꺾이고 묶여서, 취업시장에 맞도록 자라게 만듭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섬뜩하고도 우리와 밀접한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이 영화에선 가장 인간성을 파괴하는 일인 살인/자살과 함께, 현대 사회의 비인간성을 드러나는 무대로 만수의 집이 활용된 셈입니다.




<어쩔수가없다>라는 제목을 처음 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띄어쓰기'에 대한 부분입니다. 왜 공식 제목을 전부 붙여서 표기했는지에 물음표가 달립니다. 진짜 이유는 알 수 없겠지만 아마도 영화의 주제인 '자리'에 관련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빈자리가 없는 것이 모든 인물의 고민이었기 때문에 제목에도 빈자리가 하나도 없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단순히 빈자리가 없는 것은 회사의 일자리뿐은 아닙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사람의 마음에도 빈자리가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문제를 묻어버리고는, 깊이 생각하거나 묻는(ask) 것을 포기해 버린 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포기들이 모여서 지금의 사회가 된 것은 아닐까요. 섬칫한 악순환 속에, 이미 우리는 문제를 땅에 묻고, 내가 사는 동안은 가만히 썩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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