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럽게, 미숙하게, 무책임하게, 나답게

홍대입구역(중)이 내다보이는 카페의 작고 높은 의자 위에서

by 안형섭

홍대의 여러 스타벅스 중 저는 홍대동교점 스타벅스를 가장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스타벅스의 2층에서는 길 건너 연남동도 볼 수 있고, 각각 합정/신촌 방향으로 달려가는 버스들과 차들도 구경할 수 있고, 일정한 시간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수도 셀 수 있고, 저 멀리 광고판에서 저를 날카롭게 보고 있는 이름 모를 모델의 시선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제 마음을 가장 먼저 가져가는 것은 늘 버스입니다. 무슨 버스 노선이 그리도 많이 지나가는지, 버스 전용 차로에는 항상 색색의 버스가 줄을 섭니다. 시내버스뿐 아니라 경기도에서 출발하는 광역버스, 통학하는 학생들을 태운 노란 통학버스, 관광객들을 태운 고속버스들까지. 그렇지만 제 마음을 버스에 뺏기는 이유는 다양한 색깔 때문은 아닙니다. 조금은 식상하지만 제가 타던 버스 노선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학교를 다니는 기간 내내 이 스타벅스 앞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통학하곤 했습니다. 지하철로도 학교를 갈 수 있었지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종점이 있어서 항상 앉아서 갈 수 있는 시내버스를 저는 더 좋아했습니다. 비록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눈을 붙일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앞을 지나는 여러 버스 중에도 항상 제가 타던 6**4 버스를 눈으로 좇게 됩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버스의 내부를 떠올려봅니다. 생각해 보면 버스를 타고 이 길을 달리는 중에는 이 위치에 스타벅스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 홍대동교점 스타벅스는 계속 이 자리에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어느 저녁 6**4 버스 창문에 기대서 졸고 있는 저를 이 자리에서 누군가는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봤다면 퍽 재밌는 구경이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으니 말이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는 관찰자의 위치에서 보니, 조물주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타인의 인생의 찰나를 구경하는 입장이 되자 왠지 이 자리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없는 덕담을 나누고 싶어 집니다. 늦가을 바람에 코가 맵싸한 날, 건강 조심하시라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시길 바란다고. 멀리서 보는 저는 한없이 맘 좋은 산타 할아버지가 된 기분으로, 선심 가득한 오지랖을 부리게 됩니다. 쉽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내심 기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기분이 무색하게 저는 금세 무기력함에 빠집니다. 이 홍대 동교점의 높은 의자에서 내려오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다리가 닿지 않아서 땅에 발을 딛는 것을 포기하고 엉덩이를 아예 의자 뒤에 붙여버립니다. 이 의자에서 내려오면 다시 저 횡단보도를 건너, 누군가에게 관찰당하는 객체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몸을 딱 붙이게 됩니다. 제가 저 버스에 탈 것을 생각하니 곧바로 마음이 답답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동교점에 앉아 관찰하기를 즐거워하는 저라는 관찰자는 눈앞의 6**4 버스를 탄 사람의 인생을 도무지 알지 못하면서 (어쩌면 오히려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몇 마디 덕담으로 스스로 선하다는 만족감을 챙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니 앞에서 던졌던 덕담들이 순식간에 무책임한 단어들이 되고, 문구점의 공장에서 만든 카드 문구들처럼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당장 제가 6**4 버스에 앉게 된다면 저는 다시 제 인생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어느 것도 제 뜻대로 가지 않습니다. 제가 좌회전하기를 아무리 빌어도 버스는 노선을 따라 직진하거나 우회전할 뿐입니다. 제가 아무리 더 빨리 가기를 바라도 이 버스는 제 조급함을 듣지 못합니다. 그렇게 저는 시간이라는 버스에 늘 승객으로 타 있습니다.


제가 너무 감상에 빠져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마음속에서 올라옵니다. 이렇게 감상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하나라도 원서를 더 쓰고, 교육 하나라도 더 찾아보고, 하다 못해 진로를 제대로 정하기 어렵다면 어떤 잡일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신문 기사에 달린 댓글들처럼, 수많은 중소기업의 일자리를 두고 구직난이나 쉬는 청년이 웬 말이냐는 비판. 저 스스로도 이 비판에 너무나 동의합니다. 사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며 돌팔매를 가장 거세게 던지고 있는 것은 저 자신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맘 좋은 어른들처럼, 다들 이런 시간을 겪는 거라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파우스트의 문장이 플래카드가 되어 마음 반대편에 걸립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성장하고 시간이 지나게 되면 그 방황의 시간이 열매가 된다고, 그리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너의 나이엔 잘하고 있는 것이라는, 그런 따듯하고 햇살 같은 말. 저는 이런 포근한 말들이 언제나 믿고 싶어 집니다. 그렇지만 이런 어른들 앞에서는 언제나 감사하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삼키기에 급급하게 됩니다. 이미 지금의 저와는 멀리 떨어진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스타벅스의 의자에 앉아 버스를 보고 덕담을 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인생은 저마다 다른 곡선을 그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과 제 인생은 너무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저와 지금의 저 역시 너무도 다른 위치에 있을 것입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의 저는 이런 덕담들을 충분히 진실로 받아들이겠지만, 지금의 제가 이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동의하지 못하면서) 아는 척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게 제 마음속의 여러 언어들을 제하고 나면, 남는 말이 무엇인지 잠잠히 생각해 봅니다. 삶을 폭력적으로 단순하게 재단하지도 않으면서도 지금 저 버스를 타는 승객들에게 (그리고 곧 승객이 될 저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지. 성숙한 사람이라면 되려 침묵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각 사람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을 얹는 것은 오히려 미숙한 처사일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의 성숙함에서라면, 저는 아무리 고민해 봐도 아직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뜬구름 잡는 일이더라도 미숙한 덕담을 계속해서 건네고 싶어 집니다. 제 앞가림조차 못하는 사람의 미숙하고 무책임한 응원이지만 어째서인지 아직은 미숙한 채로 남고 싶습니다. 시간이라는 버스의 동승객일 뿐이지만 같이 탄 아저씨에게 괜히 말이라도 걸어보려는 어린아이처럼. 또 괜히 앞에 앉은 학생의 펴진 카라가 신경 쓰여서 펴주시던 이름 모를 어르신처럼. 지나가는 버스의 승객들과 또 앞으로 탈 승객들에게 잠시 고민하다 인사를 건넵니다. 건강하게 지내시고, 내일 조금 더 행복해지시기를, 그리고 행복하기를 포기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여 생각나신다면 지날 때마다 한번 이 위를 보고 작은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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