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수인은 한 마디를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소묘실 밖으로 사라졌다.
창밖의 빗소리가 요란해졌을 무렵이었다.
그녀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서걱거리던 연필 소리가 멈춰섰다.
시선들이 모여 만든 자그마한 일렁임 속에서, 안경을 고쳐 쓴 부원장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조용히 해, 얘들아. 집중. 관심 끄고 각자 하던 거 마저 해.”
부원장이 두드리는 이젤 모서리를 따라, 거미줄 같은 적막이 다시 소묘실에 내려앉았다.
부원장은 반쯤 열려 있던 창가에 서서 한동안 밖을 내다보다가, 열려 있던 창을 모두 닫았다.
창틀을 두드리는 낡은 소리가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갔지만, 사라진 수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야, 조미성. 너는 또 왜 갑자기 일어나서 뭐 하는 거야?”
얼마쯤 시간이 더 흐른 뒤, 말없이 일어나 우산을 주섬대는 미성에게 부원장이 물었다.
“선생님, 죄송한데요. 저도 잠시만 나갔다 와야 될 것 같아요.”
미성은 큰 덩치를 굽혀 인사를 하고, 소묘실을 나섰다.
“이것들이. 단체로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허락도 없이…”
팔짱을 낀 채 수인과 미성의 데생을 둘러보던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손가락을 접어 흔들었다.
“30분만 쉬었다 하자. 다음 수업은 원장님께서 들어오실 거야.
수인이랑 미성이 그 안에 들어오면, 원장실로 좀 오라 그래.”
나는 몇 번인가 벽을 올려다보았다.
여느 때의 쉬는 시간처럼 소란스러웠지만, 벽시계의 재깍거리는 초침 소리는 유독 선명하였다.
창문을 열자 어느 결에 훌쩍 쌀쌀해진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좇고자 하는 것은 짙게 깔린 안개에 형체를 감추었다. 창을 닫고 그녀의 자리를 보았다. 테두리로 남은 그녀의 석고상, 그리고 떨어진 연필.
연필을 주워 이젤에 올려두고 겉옷과 우산을 챙겨 소묘실을 빠져나왔다. 어둑한 계단을 내려가며 벽을 타고 전해지는 빗소리를 더듬었다.
어디로.
오랜만의 빗방울은, 강렬한 리듬으로 땅을 적시고 있었다. 비가 씻어내린 흙냄새가 안개에 섞여 흩어진다.
흐릿한 건물 출구. 비를 맞을, 혹은 맞지 않을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선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거리를 향해 가만히 기대어 있는 그녀는 젖어 있었다. 겹쳐진 윤곽이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는 내가 꺼내고자 했던 단어들을 빗소리와 함께 씻어내었다.
내가 ‘향해야 할 곳'은 어디였을까.
나는 걸쳤던 교복을 벗어 쥔 채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야...이. 미친...사랑...개소...”
희미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미성의 그것이었다. 미성의 목소리임을 인지한 순간, 수인도 벽에 기댔던 몸을 온전히 일으켰다.
“잠깐만.”
수인은 나의 부름에 몸을 돌렸다. 그녀의 볼을 적시는 것이 방금 맞은 비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많이 젖었어. 이거, 그리고 우산도 필요할 거 같아서.”
내가 내민 교복과 우산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짧지 않은 시간 마주한 그녀의 붉어진 눈동자에서, 나는 순간 교차하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왜...”
“...”
“왜...이런 짓을 해?”
“별다른 뜻은 없어. 그냥...”
“너, 내가 분명 말했지. 본 것 없는 것처럼 지나가라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나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흐릿한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그녀의 뒤로, 내리지 못한 내 손에 들린 교복은 점점 젖어가고 있었다.
한참만에 홀로 돌아온 미성은, 원장실에 불려간 이후로도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말문을 닫은 미성의 모습에 누구도 수인의 이야기를 더 묻지 않았다.
수인이 다시 학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