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가 떠나간 갈래에 서서 석양 속으로 번져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휴우..."
몇 걸음 옮기지 않았음에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습기에 어느새 땀으로 얼룩졌다. 뒤엉킨 머리를 쓸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학의 끝자락이었으나 바람조차 길을 잃은 듯 더위는 한참이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길을 지나 학원으로 들어서자, 계단의 서늘함이 나를 반긴다. 복도 끝, 열린 문 안으로 이젤과 수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잠시 멈추어 그녀의 반 쯤 정돈된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안녕." 수인은 힐끗, 나를 확인한 후 인사를 건넸다.
"안녕."
넓은 소묘실 안은 수인 뿐, 아직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더웠지?"
"어. 땀이 좀 났어.”
"대회 얼마 안 남았네. 준비 잘 되어가?"
"그럭저럭...너는?"
"나도 그럭저럭."
“...음 저기, 내가...”
수인은 고개를 돌려 기다림 없는 눈빛으로 나의 말을 기다렸다. 오늘 따라 달그락대는 선풍기가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선풍기 목을 고정 시키고 싶다, 쓸데 없지만 강한 욕구였다.
길지 않은 대화는 계단을 울리는 여자애들의 목소리에 끊어졌다.
"덥다 더워. 뭔 놈의 더위가 끝나질 않네. 왜 비도 안 내리냐. 비라도 쏟아져야 날이 좀 식을텐데. 이 놈의 선풍기는 왜 이렇게 시끄러운거야. 틀으나 마나한게. 야 일기예보 뭔가 잘못 된 거 같지 않냐? 예보에선 덥다고만 했지, 이렇게 미치도록 덥다곤 안했다고." 실기 테이블 위로 책가방을 집어던진 미성이 큰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부산을 떨었다.
"그러게 말이야. 오늘은 어제보다 더 더운 것 같은데?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내가 가서 사올게." 뒤따라 들어온 지유가 말했다.
"아냐, 어제 니가 샀잖아. 오늘은 내가 살게." 수인의 만류에 지유는 빙긋 웃었다.
"괜찮아. 내가 말 꺼냈으니까, 내가 다녀올게." 자리에 가방을 내려 놓은 지유가 다시 소묘실을 빠져 나가자 미성이 손짓을 하며 달려나갔다.
"저 눔 지지배는 맨 날 돈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야, 송지유! 같이 가."
두 명이 빠져나간 자리엔 다시 고요함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입술을 맴도는 말을 추스르려 고개를 숙여 꺼낼 것 없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흙먼지에 뒤엉킨 교과서까지 탈탈 털어낸 후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으나 곧 하영과, 그녀와 최근 급격히 어울리고 있는 E여상 무리 몇이 한꺼번에 소묘실로 들어왔다.
"너네 어떻게 같이 왔어?" 수인이 물었다.
"어, 오다가 이 근처에서 만났지. 미성이랑 지유는? 안 보이네?"
"아이스크림 사러 은하슈퍼 갔어."
"아, 그래? 어제도 먹었던 거 아니었나? 뭐 아무튼 얘들아, 우리 실기실로 갈까?" 하영은 E여상 무리와 함께 소묘실을 빠져나갔다.
얼마 후 검은 봉지에 한가득 든 아이스크림과 함께 미성과 지유가 돌아왔다. 자리의 인원들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웃고 떠들며 달콤하게 사라지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어렵사리 윤곽을 찾았던 말도 어디론가 증발했다.
“오늘까지 모두 고생했어. 이제 너희 1,2학년들은 가도 좋아.”
추계 대학 대회를 앞 둔 마지막 점검이 끝났다.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한 부원장의 선언 같은 한 마디에 조여졌던 모든 끈이 풀렸다.
"와 피곤하다 피곤해. 너네 바로 집에 갈거야?"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던 미성이 턱 짓으로 벽시계를 가리켰다. 작은 시계 바늘은 어느덧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난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자려고.” 수인이 답했다.
“그래. 그럼 난 먼저 간다.” 미성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학생들도 연이어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은 입시를 코 앞에 둔 3학년 선배들 몇 뿐이었다.
건물 밖을 나섰다.
한낮의 볕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급작스레 시원해진 밤 공기였다. 희뿌연 전등 주변에 몰려든 하루살이들의 움직임도 마지막을 예감한 듯 분주해졌다.
“거기 서서 뭐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 이제 집으로 갈까 했지.” 나는 눈가에 달라붙는 날벌레를 치우며 그녀를 돌아 보았다.
“그럼 가자 집에. 갑자기 날씨 시원해 졌네.”
그녀의 목소리가 살랑이는 바람처럼 나긋하게 귀를 간질였다. 나는 가방을 둘러메고 발걸음을 내디뎌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걸어야 할 길에 두 개의 그림자가 교차하는 것은 생각보다 근사한 일이었다.
형체를 잃은 말은, 이젠 어찌 돼도 좋았다.
기척 없이 물러난 계절을 이어받은 가을의 팔레트는 말라붙은 색들로 가득했다.
좀처럼 내리지 않는 비 탓에, 물들어 가는 단풍조차 여윈 빛으로 덧칠되어 가고 있었다.
화단에 늘어진 이름 모를 꽃잎의 고운 먼지를 쓸며, 꽤 오랜 시간 이 땅이 적셔지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특선.
넘어가는 계절의 한가운데 치러진 대학 대회에서 받아든 이름.
모두의 관심이 쏠린 곳에서 나온 결과였다.
내 이름 앞에 붙기 시작한 수식어는 썩 달갑지 않은 부피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나만 겪는 것은 아니었다.
“표특선! 너 우산 안 챙겨왔지? 오늘부터 비 온대. 간만에.” 미성이 허공에 우산을 들어 검처럼 휘둘렀다.
“또, 너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이상하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눈썹을 치키우며 수인이 미성을 노려보았다.
“얼레, 특선을 특선이라 부르지, 그럼 입선이라 부르리?”
“그냥 이름 불러.”
“지난 번엔 표입선, 이번에는 표특선. 지지배 좋겠네? 담 번에는 표장려냐? 하지만 장려고 나발이고 우산은 없지롱?” 눈동자를 몰아 약을 올리는 미성의 모습에 수인은 모처럼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야 오늘 비 많이 와야 돼. 울 아부지 논도 맘도 다 타들어 간단 말이야.”
미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어둔 창문 사이로 빗방울이 부딪치는 기척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어 비오나 보다.”
누군가가 꺼내 든 말에 웃음과 탄식이 떠올라 허공으로 흩어졌다.
점점 비는 굵어져 갔다.
조바심, 초조함, 혹은 그 어떤 무언가로 불러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벌써 십 여분이 넘도록 그녀의 왼손은 불안함에 잠식된 채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삐삐였다.
늘 휴대하던 주머니에서 꺼내 든 그 작은 물품은, 쉼 없이 초록색의 LCD 창을 깜박였다.
기기의 조명이 새로이 켜질때마다 그녀의 왼손은 더욱 더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다.
“죄송해요.”
갑자기 일어난 수인은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소묘실 밖으로 사라졌다.
창밖의 빗소리가 요란해졌을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