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의 테두리 -9-

by Dried Cognac

“송지유 넌 최고야. 우리 오빠들 보러 꼭 가야지. 난 죽어도 거기서 죽을 거야. 꼭 표 구해줘야해. 알라뷰 지유.” 하영은 손을 뻗어 지유를 안으려 하였지만, 그녀는 웃으며 몸을 뺐다.

“말했지만 표는 상황 봐서야. 보채지 마. 보챈다고 될 것도 아니고.” 지유는 상황을 정리하여 매듭지었다.

떠들썩한 소음 가운데에서도 수인은 자신의 스케치를 수정하고 있었다.

소란의 한가운데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는 것처럼.


2장


그토록 길게 이어지던 장마가 언제 마무리되었는가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어둠에 물들여진 하늘에서 예고없이 쏟아진 빗방울은 날이 저물고 새 날이 시작되어도 기세가 줄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흐린 비에, 내 붓의 채도는 씻겨 내려갔다.

호명에도 불구하고 멍하니 앉아있다 교무실까지 불려가 호된 질책을 받아도, 사람 좋은 학원장이 걱정어린 목소리로 개인 면담을 권하는 상황에도 내 눈 앞의 빗줄기는 폭우였다.


희망적인 말들을 늘어 놓았던 교진은, 그의 아버지와 형까지 나선 강렬한 압박에 '멈추었다'.

몸사리고 공부나 해야겠다며 나와 헤어진 그의 뒷모습은 비로 젖은 그의 머리칼보다 무겁고 축축했다.

‘당분간’ 이라는 말을 덧붙였던 그는 이후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습기 머금은 달력을 넘기고 피할 수 없이 세찬 비를 가르며 매일 지리한 걸음으로 학교와 학원을 오갔다.


오랜 시간 바닥을 적시고 또 적시며 나를 바닥으로 이끌던 무거운 물줄기들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멈춘 후 내리쏟아진 강렬한 햇볕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불현듯 고개를 들어보니, 습기로 가득했던 탁빛 도시는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만큼 작렬하는 태양으로 뒤덮여 있었고 나는 첫 방학을 맞이했다.


거리 전체가 달아오른 용광로였다.

이른 아침부터 달궈진 도로의 열기에 자동차 바퀴마저 아스팔트 속으로 녹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람조차 길을 잃었는지 젖은 수건처럼 얼굴을 맴돌았다.


“정말 미안한데 표는 구할 수가 없었어. 내 표도 못 구했어.” 가방을 내리며 고개를 내젓는 송지유의 말에 하영의 탄식이 쏟아졌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있어. 일단 표는 없지만, 내가 같이 가면 들어갈 수 있을거야. 그렇게라도 보고 싶으면 말 해. 엄마한테 부탁해서 경비보는 아저씨들한테 출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미리 말해 놓으면 된다니까. 몇 명이나 갈건지를 알아야하는데, 어차피 너희들 다 갈 거잖아? 안 갈 사람 있어?"

“그럼 당연히 가야지. 고마워 송지유.” 하영이 가장 먼저 손을 들며 방방 뛰었다.

“나도, 나도 간다.” 미성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다.

“야, 너넨 뭐야 왜 손 안들어. 안 갈거야? H.O.T인데 가서 구경이라도 해야지?" 미성은 내 등뒤에 서서 나와 수인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별로 관심 없어. 시끄러운 데잖아. 안 갈래.’ 수인이 연필통을 정리하며 답했다.

“채시문 넌?”

“글쎄, 내가 가도 될까…?” 내가 말 끝을 흐리자 미성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하였다.

“아유 답답한 것들아. 기말 고사도 끝났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있으면 선이 잘 그어지냐, 아님 물감이 잘 달라붙냐? 너넨 안되겠다. 강제로 내가 끌고가서라도 그 놈의 콧구멍에 바람이라도 밀어 넣어줘야지.” 미성은 지유를 불러 손가락 두개를 펼쳐 보였다.

“야, 송지유. 여기 2인분 추가.”

“안 간대두. 왜 맘대로야?” 수인이 미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끄러우면 어떠냐? 시끄러운 곳이니까 가는 거지. 너 요즘 맨날 학원에만 짱박혀 있잖아. 그림에 미친 것 마냥. 그러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같이 가. 허락은 내가 알아서 할거야." 미성의 우격다짐에 수인은 입술을 다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채시문. 넌 왜 대답 안해?”

“내가 가도 되는 곳이면 갈게. 나도 궁금하긴 해.”

“뭐야. 가도 되고 말고가 어딨어? 너도 무조건 가. 니 짝궁이랑 같이.”

순간 수인과 나는 시선을 마주쳤다. 모양이 갖춰진 기대는 없었다.

그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미성의 표현 때문일 것이다.

"..."

"..."

분명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듯 했지만, 뜻이 분명치 않은 그녀의 건조한 눈길에 나는 다시 눈을 돌렸다.

그리곤 아직 ‘마르지 않은’ 내 그림들을 마저 정리하였다.


다음 날, 집요하게 원장실을 들락거리던 미성이 양손을 불끈 쥐며 실기실로 들어왔다.

“히히. 오케이 됐어. 내가 뭐랬냐! 콘서트 끝나면 체육관 옆에 거기 오미 분식 가서 떡볶이 먹자. 우리 국민학교 다니던 때 이후로 자주 못 갔잖아. 간 김에 아줌마한테 인사도 드리고."


버스는 만석이었다.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며 몇 정거장인가를 지났다. 오래지 않아 체육관 앞에 펼쳐진 장관이 눈에 들어왔다.

“와...이게 다 뭐냐. 미쳤네. 저긴 A여상이고. 저긴 C고등학교, 저 교복 뭐지? 아 E여고. 온 동네 방네 싹 다 모였잖아.” 미성은 입을 반쯤 벌린채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표가 없이 왔지만, 출입은 허술하였다.

경비는 보이지 않았으며 검표원들의 손은 이미 처져 있었다.

혼잡했던 줄은, 어느덧 인파에 뒤엉켜 형체를 잃었다.

내부는 밖에서 보이던 것보다 더한 상황이었다.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는 틈을 비집어 2층 출입문 근처 낡아빠진 철제 난간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우 시끄러워. 귀 떨어지겠네. 최하영 넌 목청도 좋다? 그건 또 언제 준비했다냐?"

가방에서 꺼낸 플랜카드를 펼쳐 연신 소리를 지르는 하영에게 미성이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을 파고드는 칼칼한 먼지 속, 모여있는 여자애들 대부분이 똑같은 '오빠'를 찾는 기묘한 세상이었다.


세 곡.

하염없이 이어지던 오프닝 공연의 끝자락에 떠나갈 듯한 비명속에 등장한 H.O.T는, 준비된 노래를 마치고 빠른 인사와 함께 무대를 빠져나갔다.

지루했던 기다림에 비하여 너무나도 짧은 시간 배정에 웅성임이 일렁인 것도 잠시, 이내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외침은 전염처럼 퍼져나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되었다.

"오빠들 버스로 가자!"


누구랄 것도 없이 뒤엉킨 그들이 향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수인이 있었다.

무대를 향해 있던 그녀의 시선에 맺힌 찰나의 흔들림, 짧고 분명한 그 표정.


나는, 내밀었다.

거대한 창을 통해 굴절되어 쏟아지는 강렬한 볕,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환호성과 웃음 소리.

그리고 내가 붙잡은 교복 옷깃을 따라 전달되던 그녀의 미세한 진동.


“놔, 이제."




공연은 끝났다. 그 많았던 인파도, 녹아버린 눈처럼 흔적만 남았다.

"우리...그냥 집에 갈까?."

미성이 한숨, 혹은 탄식인지 가를 수 없는 긴 숨을 내뱉었다.

적막 속에 누구도 긍정, 혹은 부정하지 않았다. 공연 시작 전 나누었던 말들은 어느 결에 사라졌다.

그렇게 자리했던 모두는, 선명하지 못한 인사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덜그럭거렸다.

느렸고, 쉼 없이 멈추어 서며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이윽고 같은 표지판에서, 나와 그녀는 함께 내렸다.

끓어올랐던 도로는 석양과 함께 온기가 남았다.

나는 피어오르는 온기를 곱씹으며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까."

앞장서 걷던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춰 말을 꺼냈다.

나는 대답 대신 눈맞춤으로 그녀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마웠어."

"..."

"그럼 잘가."

내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듯, 그녀는 몸을 돌렸다.

처음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날과 똑 닮은 표정과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가 떠나간 갈래에 서서 석양 속으로 번져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