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의 테두리 -8-

개정판 + -8-

by Dried Cognac

-1장-


그녀와 처음 마주한 건, 97년,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을 기다리던 시기,

만화를 따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사물 스케치에도 제법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신문 한 귀퉁이의 ‘시각 디자이너 전도유망’ 이라는 기사를 보고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 판단했다.

적당한 기업에 들어가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재능 있다 믿는 분야를 발판삼아 직업을 가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막연함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노래하는 딴따라 따위는 ‘집에 필요 없다’며 내 취미용 기타를 모조리 박살냈던 편부에게,어렵사리 내 고민을 알렸다.

우려와는 다르게 부친은 그런 얌전한 선택이라면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듯, 조용히 월 학원비가 얼마인지만을 물으며 낡아빠진 양피 지갑을 열었다.

그에게 매달 요청해 받던, 버스 회수권 구입비를 수령하는 과정과 다름없었다.


나의 진로는 그렇게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나는 곧바로 미술부에 입부했다.

학교에서는 진학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두 개의 미술 학원을 추천해 주었다.

위치를 들으니, 남고인 내 주변에는 없었고 모두 멀리 떨어진 여고 인근에 자리한 곳들이었다.


걷기엔 먼 곳인데,

투덜거리다 보니 이 미래가 남학생들의 주된 선택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크게 중요하진 않은 문제였다. 그저 아직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이 메마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두 학원과 면담을 마친 뒤 최종적으로 한 곳을 선택했고, 간단한 신입 소개 과정을 거쳐 바로 다음날부터 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자 아이와 마주치게 되었다.


‘표수인’.

내가 사는 해안 도시는, 마음먹으면 발로 경계를 볼 수 있는 좁은 곳이었다.

자그마한 일이라도 며칠이면, 바닷바람처럼 순식간에 번화가를 타고 퍼지는 그런 동네.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는 폭력, 그리고 술과 담배 등 고교생과 연관 짓기 어려운 단어들로 가득했다.

도시의 조직폭력배와 깊이 얽혀 있다는 듣기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야기는, 그녀를 유난히 조심스러워하는 선배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확정적 묘사로 번져 있는 상황이었다.

전학 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내게도 닿아 있는 풍문이었기에, 가슴팍에 새겨진 명찰을 본 순간 그녀가 그 ‘주인공’임을 직감하였다.


그녀는 한기가 아로새겨진 듯 오똑한 코와 깊게 패인 쌍꺼풀이 또렷한, 서구적 선을 가진 얼굴이었다.

큰 키에 팔과 다리는 길었고, 피부는 유난히 희었다.

표정의 변화가 적고 늘 같은 온도의 도도함을 장식처럼 두르고 있었기에 예쁨을 말하기 전, 그 차가움이 먼저 다가오는 유형의 아름다움이었다.

사람은 겉모습만 봐선 알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다. 내가 느낀 첫인상은 그러했다.


학원은 한 시간의 수업이 끝나면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곳은 유독 여학생 비율이 높은 장소였고, 쉬는 시간이 되면 그 특유의 소란스러움으로 강의실이 들썩였다. 남중, 남고를 연달아 거쳐온 내게는 꽤나 독특한 광경이었다.

대개 같은 동년배들이 끼리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간식을 먹었는데 1학년 무리들 몇은 항상 고정멤버를 이루어 그녀 주변에 모이는 편이었다.

그녀는 주로 듣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가끔씩은 깔깔 소리를 내며 크게 웃기도 하였다. 어쩌다 들려오는 말투는 새침한 인상 그대로, 다소 신경질적인 악센트를 품고 있었다.

간간히 그녀의 목소리가 흘려 나올 때마다, 나는 ‘조화’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사전적 의미와는 별개로 그 목소리와 얼굴은 분명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울렸다.


한편 호의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외모와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그 이질적인 결합은, 타인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익히 들어왔던 이야기들, 그리고 멋대로 덧붙인 상상력은 그녀를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남아있는 호기심은 꽤 많았지만, 학원의 생경한 분위기는 더 이상 그녀를 ‘관찰’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매일 태어나고 버려지는 그림들은, 내가 반드시 그려내야 할 것이 존재하는 세상에 발을 내딛었음을 알려주었다.

가르침과 다르게 자기 것을 추구하거나 요구받은 것을 그려내지 못하면, 이곳의 답은 폭언과 체벌이었다.

희미한 밑그림으로만 그려두었던 나의 미래와는 전혀 결이 달랐기에, 초반의 몇 주간 이 생소한 ‘풍경’의 일부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삐걱대는 대로 시간은 잘 흘러갔다.

나는 그리고 지우고 칠하며 정신없는 봄을 보냈다.

스스로 좋아서 해왔던 것과 다르다는 인식은 여전했으나, 이런 속도라면 빠른 시일 내에 대회 입상도 기대할 수 있겠다는 강사의 이야기는 그런대로 희망적이었다.


봄의 따사로움이 절정이라 생각했을 때쯤,

몇몇 학교 선배들이 한적한 뒷골목으로 나를 불러 새로 개원한다는 C학원으로의 이적 이야기를 꺼냈다.

좋은 시설, 서울대 출신 원장의 수준 높은 교육 등 그들이 입 밖에 낸 표현은 권유의 형태를 빌렸지만 그들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좁은 답안지를 들이민 상황에서 나 또한 현재의 학원에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남아 있는 ‘긴’ 학교 생활까지 고려해 이적에 동의하였다.

선배들이 강한 체벌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그들이 내세웠던 허울 좋은 표면적 이유가 아니라 그저 그 체벌의 여파에 휘말렸을 뿐이었음을 알게 된 건, 아주 먼 나중의 일이었다.


그렇게 장소를 옮겨, 또 한 번 지루한 적응의 시간이 시작됐다.

해안 도시 특유의 후덥지근함과 끈적임이 거리를 잠식하기 시작했을 무렵.

뜻밖에도, 처음 보았을 때 겨울 교복을 입고 있던 그녀를 내가 옮긴 미술 학원의 원장실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시문아, 너도 잠깐만 이리 와봐.”

간단히 인사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

아른거리는 형광등 불빛 아래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D여고 하복. 익숙해야 하지만, 왜인지 최근 본 적 없는 낯선 실루엣.

“네, 원장님…?”

“서로 인사해. 오늘부터 우리 학원으로 옮기는 친구야. 너랑 같은 1학년. 이름은 표수인이고.”

완전히 잊혀진 줄 알았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다 지워지길 반복하였던 그녀의 콧날. 나를 올려보는 서늘한 옆 얼굴선.

“안녕! 여기서 만나네?” 끝이 높은 인사를 건네는 그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색채가 다른 목소리다.

“어...? 어.”

“반가운 척 좀 해줄래? 난 진짜 반가운데.”

그녀는 쭈뼛거리며 서 있는 내게 좀 더 말꼬리를 올려 말을 건넸다.

나는 좀처럼 이 상황의 맥을 파악하지 못했다.

진짜 ‘반가운’ 사람에게 건네는 말투가 아닌데다 나에겐 반가울 만한 기억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반갑다는 표정을 억지로라도 ‘그려서’ 보여줘야 하는 걸까?

그녀가 손을 흔들며 말을 건네는 지금의 상황이, 기이하기만 하다.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 보아도 손까지 흔들 만한 ‘관계’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말의 구석에 얽힌 그 앙칼진 느낌만은 전과 같다.

아마도 저 콧날 끝 어딘가 즈음에서 만들어지는 구조일 것이라 짐작하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당기진 못했다. 적당히 멀리.


“수인이가 시문이 너랑 올 초에 A학원에 같이 다녔다고 하던데.”

날… 알고 있었구나.

하기는 나는 거기에서도 단 둘 밖에 없는 1학년 남자였다.

알고 싶은 존재는 아니었다 해도, 모르긴 힘든 사람이었겠지.

어색하고 쓴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네. 거기 두 달 좀 넘게 다녔어요.”

정확하게 76일이다. ‘같이’ 다닌 것은 아니었다고 말을 바로잡고 싶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한꺼번에 여러 명이 우리 학원으로 새로 들어오게 됐어. 시문이가 이 친구들 초반에 잘 적응할 수 있게 챙겨줄 게 있으면 챙겨주도록 하고. 우리 학원이 아직 새로 시작하는 단계니까 우리 의기투합해서 으쌰으쌰해보자.”

“네.”

“조금 이따 부원장님 지도로 자리 배치 다시 할 거야. 그때 시문이 네가 도와주면 좋겠는데, 괜찮지?”

“문제없어요.”

“좋아. 선생님은 나머지 친구들 면담 마무리되는 대로 따라 올라갈 테니 너희들은 먼저 소묘실로 가 있어.”

그녀와 나는 원장실을 나서 복도로 나왔다.

느릿느릿 주변 공간을 감싸기 시작한 어색함이 이내 내밀면 만져질 것 같은 덩어리가 되었다. 새로 칠한 복도의 페인트 색만큼 머릿속이 뿌옇다.


하필 이런 색으로 칠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맴돈다. 불필요한 생각이었다.

잿빛 벽에 ‘가로막힌’ 채 나는 뭔가를 말해보려 하지만, 상황에 걸맞은 적당한 말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데생실 2층이 맞지?”

그녀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 숨결이 닿을 것 같은 거리의 얼굴. 자주 봤기에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턱 선, 콧날, 그리고 길다란 속눈썹. 아, 눈동자가 투명한 갈색이다.

흔치 않은 색이네.

문득, 거울처럼 비쳐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이야. 내가…”

갑자기 목소리가 갈라졌다.

“응? 뭐라고?”

“데생실 2층이라고. 내가 같이 갈까?”

목소리를 갈라지게 만든 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낯설음’ 때문이리라 애써 짐작했다.

“아, 그래?” 눈썹을 치켜 올리며 미간을 찡긋거리는 수인.

그녀는 뒤로 손을 모아 벽에 걸려 있는 구성 전시품들을 무심히 살폈다.

“아니 됐어. 나 혼자 갈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고 다시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온 그녀.

오늘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의 눈은 웃을 때조차 웃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는 말을 마치자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갤 돌려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목을 간질이던 그 ‘낯설음’이 사라질 때까지 복도 한복판에 멈춰 서 있었다.

계단 끝에 남은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회색 벽면을 따라 천천히 번져갔다.

마치 더 짙은 회빛 물감이 경계를 무너트리며 퍼지는 것처럼.


데생실에 올라가 신입 원생들을 위해 자리 조정을 했다.

창고에 있던 이젤을 새로 가져와 자리를 채우자, 처음 열두 명으로 시작했던 강의실은 이제 적잖이 북적이는 공간처럼 보였다.

나는 마지막 줄, 그녀는 내 앞자리에 배정되었다. 자리 배치가 끝남과 동시에 익숙한 얼굴들이 한 명씩 데생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야 표수인 여기가 니 자리야?”

시끌벅적 부산스러운 그녀, 조미성.

그녀는 내가 마주쳤던, 이 도시에서 가장 시끄러운 열일곱 살이었다.

나는 휴식 시간, 그녀가 트럼펫 같은 박자감으로 방귀를 뀌어 대다 선배와 언쟁을 벌이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생리 현상임을 강조하며 성깔 있는 인물로 소문난 선배에게 단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그런 인물은 쉽게 잊힐 리가 없다.

연이어 데생실에 들어온 여자아이 둘도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최하영, 송지유.

A학원 시절부터 이 넷은 유독 사이가 좋아 보였고, 뭔가 계기가 있어 한꺼번에 같이 학원을 옮겼으리라 짐작했다.


수업이 시작되어 과제로 받은 석고상은 ‘쥴리앙’이었다.

윤곽만 잡은 채 애꿎은 지우개로 지우고 그려 내길 반복하다 마감 시간을 맞이했고,

결국 선배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흥분한 그가 열을 올려가며 내 얼굴에 침을 튀기는 동안, 나의 뇌리에는 “잘 부탁해”라는 말이 빙빙 돌고 있었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그녀와의 ‘재회’, 그리고 그 미소의 ‘온도’에 대해 생각했다.

돌부리에 발가락을 찧었으며, 빗물 고인 웅덩이를 지나는 차가 뿌린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질금질금 내리는 여름 밤 비.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몸이 젖어 있었다.

곧 온몸이 젖어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이 꺼진 현관은 고요함마저 숨을 죽인 공간이다.

드넓게 펼쳐진 거실에 넘실거리는 암흑에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멈춰 서 있다. 창 사이로 스미는 달빛에 젖어 널브러진 신발들의 윤곽이 또렷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몸을 숙여 주섬주섬 신발을 정리하였다.

전에 보지 못했던 반짝이는 하이힐 몇 켤레가 눈에 띄었다.


부친과 새어머니가 운영하는 성인주점은 밤을 팔아야 먹고 사는 곳이었다.

별이 지는 새벽이 되어 문을 닫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이른 해가 뜬 등굣길에서조차 두 사람의 신발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다섯 살 터울의 형은,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사라졌다’.

대학 진학 실패 후 부친과의 마찰이 끝없이 반복되던 어느 날, 그는 집에 있던 나를 내쫓고 집 문을 걸어 잠갔다. 영문도 모른 채 현관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 외치던 나는, 곧이어 들려오는 굉음에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무언가 부딪쳐 깨지고 박살 나며 산산조각 나는 소리. 그리고 그의 괴성.

외출했다 돌아온 부친이, 강제로 문을 개방하는 순간까지도 돌발행동은 계속되었다.

현관문을 열고 마주한 광경에 잠시 말문을 잃었던 부친은 이내 격노했고, 냉장고를 발로 차며 부수고 있던 형은 이내 부친에게 달려 들었다.

옥신각신 몸싸움 끝에 형은 부친을 넘어트렸다. 그리고 넘어진 그의 면전에 입 밖으로 내어선 안 될 말들을 퍼부었으며, 손에 든 것 하나 없이 그대로 집을 뛰쳐나갔다.

이후로 작정한 사람처럼 모든 연락을 끊은 그의 행방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부친과 새어머니는 그에 관한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였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처럼 취급되었다.

그의 ‘완벽한 실종’ 뒤로 이 넓은 집은, 서로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만 남은 공간이 되었다. 그가 미처 다 부수지 못한 몇몇 물건은 모습 그대로 덩그러니 자리에 남아, 가끔씩 그날의 혼란을 떠올리게 하였다.


우두커니 식탁 의자에 앉아 있자니 배가 고파왔다. 학교 점심 이후로 무언가를 먹은 기억이 없다. 손목시계의 조명을 켰다.

10시.

밥솥을 열자 약간의 쉰 냄새와 뜨거운 증기가 동시에 코끝을 찌른다. 온기 없이 솥바닥에 눌어붙은 국을 조금 덜고, 뻑뻑하여 떨어지지 않는 냉장고를 힘주어 잡아당긴다.

플라스틱 병마다 가득 담긴 보리차. 볶은 멸치와 보리새우들로 들어찬 커다란 반찬통 두 개. 조그만 반찬 그릇에 그것들을 옮겨 담는다.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아마 일주일 전도 이 반찬이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내버려’ 두어도 상하지 않는다.


몸을 일으켜 전등 스위치를 올릴지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귀찮아졌다.

어차피 어제와 같은 걸 먹는데,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맞은 편 집에서 새어 나오는 환한 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밥알이 까끌거려 국을 떴지만 국에서마저 꼬릿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묵묵히 씹히는 쌀밥에 어둠까지 함께 삼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통에 그릇을 툭 던지고 나서야 뒤늦은 한기가 스며들었다.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훌쩍 굵어진 수염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며, 수납함을 뒤져 일회용 면도기를 꺼내 들었다. 여느 때처럼 피가 흘러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샤워를 마친 뒤에도 핏방울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혈할 ‘무언가’를 찾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한참을 뒤적여 찾아낸 것은 반으로 쪼개진 워크맨 플레이어, 형의 어릴 때 사진, 버려진 줄 알았던 내 기타 피크.

그리고 검정색 전기테이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전기테이프로 대충 상처를 감쌌다. 테이프를 붙여서인지, 아니면 멈출 때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내 피가 잦아들었다.


침대에 눕자, 지나온 오늘이 천정에 필름처럼 펼쳐진다. 새삼 그 웃음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지나온 시간을 당겨, 그녀의 미소를 다시 떠올리려 해보지만 그 경계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흐릿하다. 처음부터 없던 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리 없이 거세진 빗소리가 어느 결에 창문을 두드린다. 답이 없는 질문에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다 보니, 어느 순간 침대 아래의 납덩이 같은 손이 무겁도록 나를 끌어당긴다.

강제로 코드가 뽑혀 나간 기기처럼, 의식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떨쳐내지 못한 납덩이를 껴안은 몸으로 눈을 뜨니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꼭 움켜쥔 손에는 아직 기타 피크가 쥐어져 있었다.

현관의 신발은,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집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혼자 집을 나섰다.




간밤 세찬 비의 여파로 분주해진 아침 거리.

빗방울은 당분간 멈춘 듯하지만, 아직은 보이는 모든 사물이 탁빛에 잠겨 있다.

다시 돌아가 우산을 챙겨 나올지, 순간 멈칫했다.

어제에 이어 또다시 젖은 교복을 벗어 놓는다면, 새어머니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2차 모의 수능 날이라는 사실이 내 걸음을 여유롭게 만들지 않았다.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난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왜 굳이 지금 이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잰 걸음 중 다시 가느다란 비가 내려, 나는 뛰어서 정문을 통과했다.


2년 전 어느 날, 서로 간 왕래 없던 어머니와 친부가 한 밤에 전화로 나눈 이야기.

아무리 자는 척을 하려해도 귀를 파고드는 바늘 같은 말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서로에게 떠 맡겨야 할 이유가 가득한 ‘짐’ 그 자체였다.

그로부터 며칠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나를 ‘소포’처럼 정리하여 고향으로 보냈다.

떠밀리듯 고향에 도착하자, 이 바닷 바람이 부는 도시의 동급생들은 내게 친밀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전학 당일 점심 시간, 몇몇 패거리에 둘러싸여 학교 뒷산 공터로 향한 나는, 한 녀석에게 맞짱을 ‘요청’받았다. 자리를 잡은 그가 앞 뒤 없는 욕설과 함께 주먹부터 날리자, 나 또한 짜증과 불안감이 뒤섞인 주먹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싸움닭을 구경하듯 몰려 있는 패거리들의 중재로 싸움이 마무리되었을 무렵, 그가 어린 시절 동네 놀이터에서 ‘졸병’ 노릇을 하던 국민학교 동창이었음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내가 서울로 떠나가기 전, 나름 큰 덩치로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골목 대장 노릇하던 1~2학년 ‘꼬맹이’ 시절의 이야기였다.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연이어진 ‘결투’ 또한 비슷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그들은 게임 순서를 정하듯, 차례로 나를 싸움터에 불러내었다.

말은 대결이었지만 점점 그 상대가 역도부, 권투부 등 힘깨나 녀석들로 바뀌어 갔기에, 종내엔 일방적 ‘구타’나 다름없게 되었다.

맞은 배를 움켜쥐고 땅바닥을 굴러다니며 어렴풋이 알게 된 폭행의 까닭은 내게 ‘서울냄새’가 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모두 한때 ‘어렸던 골목’을 공유했던 이들이었다는 것.

철저히 혼자였고, 맞서기엔 버거웠던 나는 ‘조용히 지내라’는 그들의 말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내 ‘굴종’의 제스처를 확인한 그들은, 내게 흥미를 거두고 다음 전학생을 표적으로 잡았다.


그렇게 ‘부여된’ 평온 이후, 나는 중학 생활을 ‘버텨’ 냈다.

그들의 경고대로 말문을 닫았으며, 공부를 향한 최소한의 관심조차 내려놓았다.

중학 생활 내내 내 손에 들려진 것은 오로지 클래식 기타와 소설, 만화책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이상하게 내 시험성적은 추락을 겪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아주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역 명문고’에 입학 원서를 내었다.

연합고사 결과로 받아 든 143점과는 무관한 결정이었다.

진로 상담을 하던 중학교 담임은 타 지역 명문 사립 진학까지 넓게 고려해보라 아쉬워했다.

고교 입학 후 실시한 첫 모의고사에서는 280점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내 점수를 확인한 미술 전임 교사는, 학교에서 3년만에 다시 서울대 미대 진학 타이틀을 따낼 될성부른 떡잎이 나타났다며, 공공연하게 이를 떠벌리고 다녔다.




어제의 ‘미소’가 문득 떠오른 것을 제외하면 시험 과정은 특이할 것이 없었다.

시험을 위하여 따로 준비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막힘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나가는 OMR카드를 보며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어이. 채시문.”

복도 중간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가볍게 뛰어오는 박교진.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시험 잘 봤냐?”

“대충 그럭저럭. 넌?”

“뭔 또 그럭저럭이야? 이 새끼 엄살은. 이러다 이번엔 한 300점 나오는 거 아냐?” 그는 자세를 낮추어 내 얼굴에 연거푸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하였다.

“난 4교시 완전 찍었다. 4교시 똘빡이 시험 감독이었는데 걔만 아니었으면 한 숨 때렸을 텐데.”

“지난 중간고사도 빨리 풀고 자다가 너 담임한테 많이 맞지 않았나?”

“어, 맞아. 진짜 존나게 아팠었지! 너 그 큐 대 깎은 몽둥이 알지? 그걸로 한 열 대는 쳐 맞은 것 같다. 그건 어떻게 부러지지도 않냐, 씨발.” 그는 짧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너네 미술부 분위기 좀 어떠냐? ET는 안 빡세냐?”

미술부 전임 교사는, 그의 직무 이름 대신 학생들 사이에서 ‘ET’로 불렸다.

순전히 눈이 퀭한 그의 외모와 구부정한 자세 때문이었다.

“아니, 가끔 화를 내긴 하지만 괜찮아. 미술부에서 누굴 때리는 걸 본 적은 없어. 그런데 너 집에서 허락한데?”

내가 중학 시절 말문을 ‘닫았을’ 때, 교진은 만화를 다리 삼아 내게 다가온 동급생이었다.

그는 나와 살았던 동네가 달라 겹치는 기억이 없는 친구였지만, 같은 관심사를 매개체로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그는 광적으로 만화를 좋아했고, 받는 용돈은 족족 만화책을 구하는 데 소비했다.

그와의 만남으로 나는 서점에서 구하는 것이 어려웠던 원서 만화책까지 섭렵할 수 있었고, 공유하는 관심사를 토대로 그에게만큼은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학기초부터 미술부 입부를 고민해왔던 교진은, 그간 어머니의 심한 반대로 바램을 이루지 못했다. 법대와 교대를 진학한 그의 형과 누나와 대비하면, 어머니의 반대는 그런대로 ‘합리적’이어 보이는 사유가 있었다.

“어. 엄마도 이제 더 이상 전처럼 심하게 닥달할 순 없을 걸? 오늘 내가, 공부 같은 건 내 길이 아니란 걸 딱 부러지게 보여 줄 거니까!”

”무슨 말이야?”

“사실 오늘 나 4교시만 찍은 거 아니다. 1교시부터 시험지 받자마자 그냥 다 찍었어.”

그는 과장되게 양팔을 벌려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며 말했다.

“이미 끝난 일이다 이 말씀이야. 이젠 되돌릴 수 없다고.”

“난 좋아. 네가 미술부에 들어온다면. 근데 네 말 대로 1교시부터 다 찍었다면 그건 진짜 극단적인 방법 같은데? 너희 어머니 충격 받으시겠다.”

“극단이고 뭐고간에 시문아. 이번엔 나 말리지 마라. 진짜 확 들이받는 거지 뭐!”

“어쨌든 결과가 좋았으면 한다.”

“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우선 지켜나 봐라 친구. 오늘이 그 시작이니까.”

그는 손가락을 연신 튕기며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희망적으로 튕겨지는 그의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그 발걸음의 리듬은 엇박이 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미술실로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ET’는 숨김 없는 반가움을 티 내며 말을 걸어왔다.

“오오, 우리 채시문, 시험은 잘 치렀겠지? 이번에는 한 290점 이상 나올 것 같은가?”

“예상한 적이 없어서 아직 결과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감이 그리 없으면 쓰나, 미술을 하는 우리는 자신감이 있어야 해.” 그는 허공에 느릿하고 우아한 팔을 휘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자, 차곡차곡 코스를 준비하는 거야. 이 선생님은 믿는다.”

그는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교무실로 돌아갔다.

미술실에서 화구통과 몇 가지 물품들을 챙기는 도중, 주머니안의 삐삐에 진동이 울렸다.

낯선 지역 번호.

잘못 보내 것이라 생각한 나는 삐삐를 주머니에 넣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건 명백한 실수였다.

종일 내 우울하던 하늘에서, 다시 가느다란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학원으로 향하기엔, 이 비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화구통에 젖으면 안 되는 켄트지들이 몇 장 들어 있어 나는 급한 대로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하릴없이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중, 주머니를 다시 울리는 삐삐.

나를 호출한 번호는, 아까와 동일했다.

빗방울을 닦아가며 다시 쳐다본 액정에는, 분명히 ‘55’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55’.

그 사람이 약속해준 호출 번호.

빗물 때문에 뿌옇게 번진 LCD창을 연신 닦아가며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55로 할 게, 시문아. 이건 엄마가 너랑 통화하고 싶을 때…”


작년 초 중학교 3학년에 올라선 직후, 아무런 소식이 없던 친모는 뜬금없이 나의 학교를 찾아왔다.

분명 봄이었으나 아직 칼바람이 매서웠던 그날.

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지 움츠러들어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하교하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땅의 질감을 확인하듯, 느린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시문아…”

“…”

순간, 뒤죽박죽 뒤엉켜버린 수많은 단어들이 눈 앞을 앵앵거리며 떠다녔다.

추위와 피곤함이 서린 얼굴과 달리, 친모의 구김 없는 투피스와 굽 낮은 뾰족 구두가 유달리 눈에 박혔다.

“엄마가 정말 미안해 시문아. 엄마가 널 너무 늦게 찾아왔네.” 그녀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순간적으로 손을 뿌리치려 하였으나, 친모는 그런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아픈 덴 없지? 학교 생활은 괜찮아? 엄마는 늘 시문이 생각을 많이 했어.”

그녀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였다.

나는 고개를 틀어 친모의 손길을 피하며 급격히 어두워진 친모의 표정을 보았다.

순간 묘한 쾌감 같은 것이 등허리를 스쳤지만 이내 그것은 쾌감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걸 깨달았다.


“시문이가 보고 싶을 때, 목소리라도 듣고 싶을 때, 이걸로 연락했으면 해서…”

그녀는 쇼핑백에 들어있던 작은 하얀색 박스를 꺼내 들었다.

“삐삐 알지? 친구들도 삐삐 쓰는 애들 많이 있니?”

“…알아요. 사용법.” 나는 상자를 받아 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학교에서 몇몇은 암암리에 사용중이었고, 교진도 그 중의 하나였기에 나는 삐삐를 이용하여 그와 소통하곤 했다.

“그래 사용법 알고 있다니까 다행이네. 그럼 55로 할 게, 시문아. 이건 엄마가 너랑 통화하고 싶을 때...그 때 남기는 엄마와 시문이 사이의 약속이야. 호출할 때 55를 붙여서 보내면, 엄마가 우리 시문이 목소리를 정말 듣고 싶은 거니까, 엄마한테 연락해줄 수 있겠어?”

나는 애꿎은 박스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물음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어려운 부탁하는 거니?”

“…네. 어머니. 원하신다면 그렇게 할 게요.”

나의 호칭을 듣자, 그녀는 물끄러미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눈동자에서, 나 또한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은 살아오며 마주한 적 없는, 내가 알지 못하는 '눈'이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가야 할 시간인데.

하염없이 나를 쳐다보던 그녀는 무언가 감추듯 고개를 돌려 핸드백을 열었다.

한참을 뒤적이던 그녀가 내미는 두툼한 하얀 봉투. 나름의 두께가 있었다.

“자, 받아. 엄마는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 또 다시 연락할게.”

“…그게 뭔가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받아. 엄마가 미안해서 꼭 챙겨주고 싶었어.”

그녀는 나의 손에 억지로 봉투를 들려주었다. 그리곤 토막처럼 서 있는 나를 뒤로 하고, 또각 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야 눈에 들어왔지만, 저 멀리에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뿌연 김이 서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친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봉투를 열어 보았다.

40만원.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어디에 써야 할 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큰 ‘돈’을 꼭 쥐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비릿한 빗물이 튀어 정신이 번쩍 든다.

얼마나 오래 부스에 있었는지, 주위를 둘러보니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비는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일 년 넘게 ‘간직’하고 있던 만원짜리 전화카드를 꺼내 들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수화기를 드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액정에 표시된 번호를 따라 전화 버튼을 누르자 한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전화를 거셨으면 말씀하세요…누구시죠?”

"..."

“너…너 시문이 맞지?”

“…”

“시문아. 시문이 맞다면 정말 미안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겠어? 금방 다시 돌아올게."

익숙한 목소리와 전화기 뒤로 들려오는 작은 소음들. 모든 청각을 동원해 전화기 너머의 상황에 집중하였다.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여러 종류의 발걸음 소리.

전화 노이즈 사이로 웃음 소리와 TV 아나운서의 멘트가 섞여 들렸다.

나는 말없이 수화기를 귀에 대고 ‘차곡차곡’ 줄어드는 카드 잔액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카드의 잔액이 절반 즈음 떨어진 것을 헤아렸을 때 다시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시문아. 너 아직 있니?"

“…”

“너 듣고 있는 거지? 괜찮아. 편하게 말해도 돼. 엄마는...엄마는 사실 계속 연락하려고 했지만…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 바로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첫 말을 떼었다. 다음 말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일 년 하고도 아주 여러 날만의 대화. 어제 만난 사이처럼, 끈을 찾아내어 말을 이어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시문이 엄마가 정말 많이 미안해. 네 마음 많이 상했을 거 알아.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잠시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어 나갔다.

“너 전에 서울에서 엄마랑 같이 살 때 만들었던 조흥은행 통장, 아직 잘 쓰고 있니?”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왜요?”

“너 곧 생일이기도 하고 하니까, 엄마가 이번에…”

“돈 보내 주시려고요?”

나는 그녀의 말 허리를 잘라내었다.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갈증이 떠오르며 입안이 바싹 말랐다.

전화기 밖으로 어떻게든 다시 말을 이으려 애쓰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우선 네 말이 맞아 시문아. 하지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엄마 이야기를 더 들어봐. 단순히 돈 보내주겠다 그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엄마는…”

“지난 번에 40만원이었죠? 이번에도 똑같이, 다 쓰지도 못하게요. 덕분에 아주 좋았어요.”

어떤 이름을 붙이면 되는지 모를, 오랜 시간 간직했던 ‘무언가’를 쏟아냈다.

문득 ‘그 날’의 형이 떠올랐다.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하니 흰웃음이 새어 나왔다.

“더 할 말이 없어서요. 이만 전화 끊을게요.”


멋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인도 한가운데로 흘러나왔다.

젖으면 안 될 그림도, 뽑지 않은 전화 카드도, 새어머니의 잔소리 따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하여 걷고, 걸은 다음, 또 걸었다.

내가 걷는 길은 황량하고 건조한 한 가운데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아까 멈추었던 그 ‘어딘가’였고, 나는 다음을 향해 또 걸었다.

세우[細雨]는, 내내 멈추지 않았다.


막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둔덕 위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있는 대로 고함을 치려 했지만 입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단 한순간도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곳에서 돌아왔음을 인지했다.

안도감이 느껴질 줄 알았지만 내가 확인한 것은 방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밝은 빛이었다.

방 한 구석에 쑤셔 박힌 교복은 젖어 있었고,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호출기는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곧 울릴 자명종을 미리 끄고 거실로 나왔다.

양치와 세수를 마친 후, 당장 입을 교복 바지가 없어 드라이어로 물기를 말렸다.

다 말린 바지에서 스멀스멀 쿰쿰한 냄새가 올라와 친부의 스킨을 가져와 바지에 두드렸다.


오늘도 현관에는 두 사람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학원을 멋대로 결석했기에 3학년 선배에게 학원 뒤 공터로 호출되었다.

그는 어제 ‘왜’ 오지 않았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어째서 ‘무단’이었는가에 있었다.

화장실에서 가져온 걸레 자루를 내 엉덩이에 내리치는 동안, 그는 나의 미래를 ‘우려’ 하는 단어들을 나열하였다. 그의 매질이 마무리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가롭고 평화로운 토요일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땅바닥에 엎드리며 묻은 바지의 흙은, 굳이 털지 않았다.

“안녕, 채시문?”

가장 먼저 실기실 안으로 들어온 불방구.

조미성은 그녀의 무리들 사이에서 그렇게 불리었다.

마이크를 삼킨 것 같은 특유의 목청과 기질은, 이전 학원에서도 모두의 인정을 받는 바였다. 심지어 과묵했던 그 학원장까지도.

“어…안녕?”

“너, 내 이름 알지?” 그녀는 불쑥 가슴을 내밀어 자신의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알고 있어. 조미성 맞지?”

“그래. 내 이름 모를 리가 없지. 이제 우리 서로 말 좀 하고 살자? 전에처럼 힐끗힐끗, 그러지 말구.”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싱긋 웃더니 내게 손을 들어 커다란 목소리로 귓속 말을 하는 시늉을 했다.

“너, 힐끗거리며 수인이 가끔씩 쳐다보던 거, 그거 내가 다 봤다구.”

여전히 직선에 가까운 말투와 능글능글하기 짝이 없는 표정.

순간 얼굴이 약간 달아오름을 느꼈다.

“보...보다니, 내가 뭘 쳐다봤다는 말이야?”

“내가 뭘 쳐다봤다는 말이야.” 몸을 흔들며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한 그녀는 가지런하고 거대한 치아를 씩 드러내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니가 여기 터줏대감이잖아. 앞으로 잘 좀 부탁한다고. 그 말이 하고 싶었어.”

그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후, 부산을 떨며 들어오는 또 다른 아이. 최하영.

“야야야, 불방구. 이번 달 키키 부록으로 받은 립스틱인데 이것 좀 봐봐.”

“아유, 또 뭔데 호들갑이야? 보여줘봐.”

“핑크인데 색이 깨는 것 같지? 지난달에 에꼴 거는 괜찮았는데. 아 짜증나 쎄씨로 살걸. H.O.T 브로마이드 갖고 싶었는데.”

그녀는 조그마한 거울을 들고 자신의 입술에 립스틱을 연신 칠하였다.

“어때 미성아? 색깔 좀 싼티 나고 촌빨 날리지 않아?”

하영은 미성에게 자신의 입술을 보였다.

“뭐가 싼티나. 색은 예쁘기만 하구만. 니 주둥이가 문제라는 건 모르냐?”

미성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가방에서 물감을 꺼내어 실기대 위에 펼쳤다.

“뭐래, 이 지지배가. 그나저나 조미성. 너, 그 3반에 박수연 이야기 들었어? 걔 지난 주 일요일에 소개팅 했었는데, 소개팅에 나온 남자애. 누군지 알아?”


입.

최하영은 미성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진 '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작은 말이 많았다.

낮은 소리로 잘 들리지 않아, 더욱 그 사이에 끼고 싶은 이야기들.

그녀는 다른 누군가와 끊임없이 그걸 공유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실기실에 들어선 이들은 표수인과 송지유였다.

그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실기 담당 부원장도 입실하여, 곧바로 주말 특강이 시작되었다.

C학원 간판 중간에는 '자유'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박혀 있었지만, 간판명이 무색하게도 이곳은 모두가 시각디자인과, 단 한 개의 문을 열기 위하여 내달리는 곳이었다.

구성 실기실 한가운데의 둥근 원형 테이블.

테이블을 중심으로 빼곡히 모여 앉아 강의를 듣고, 구성 스케치를 하며 서로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곁눈질로 확인하였다.

대학 미술 대회를 며칠 앞두고 있는 와중이라, 스케치에 들어간 손들의 힘이 평소보다 조금 더 굳어져 있었다.

“학원 왜 안 나왔어?”

옆 자리의 수인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고개가 미세하게 나를 향한 듯하지만, 시선은 그림에 고정되어 있기에 내게 말을 건 것인지 불명확하다.

“혹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어제 학원 안 나온 사람은 너뿐이야.”

그녀는 연필을 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건 내게 건네는 말임이 분명했다.

별난 상황이었다. 꽤 긴 시간 말 한마디 못해 본 관계였는데, 이젠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눈다. 아마도 학원 규모가 너무 작아서, 혹은 내 옆자리여서 일지도 모른다.

이젠 경계가 거의 지워져 가는, 며칠 전의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럴만한 일이 있었어.”

“그래? 알았어. 네 그림 몇 개 봤어. 전보다 더 좋아졌던데? 오늘 사물 분할 소재 뭘로 잡을 거야?”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건넸다.

오늘은 베낄 카피본 없이, 순수하게 개인의 창의력을 기반으로 완성한 구성작품을 모아놓고 품평회를 하기로 한 날.

학원에서 내어준 구성의 주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의 재구성이었다.

“라디오로 하고 있는 중이야.”

스케치를 중간쯤 끝내고, 물감통을 들여다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바닥을 드러내 가는 몇 가지 색 때문에, 새 물감을 사온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를 잊고 말았다.

오늘 점심때만 해도 분명 기억하고 있었는데, 얼간이 같으니.

아차 싶었지만 지금 사러 가기엔 화방이 너무 멀다.


나는 망설이며 시간을 끌다 결국 옆자리의 수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그…미안하지만.”

“응?”

수인은 별 말없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조금 당혹스럽게도 정확히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꺼내야 할 말이 다시 속으로 들어갈 것 같았지만,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것들을 억지로 꺼내 들었다.

“물감이 다 떨어져서…마젠타하고 코발트 블루, 그리고 몇 개 더. 혹시 너한테서 빌릴 수 있을까 해서.”

“아. 물감?”

그녀는 아직 스케치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내 켄트지를 한번 훑어보았다.

“오늘 품평회인데, 내가 안 빌려주면 어떻게 할래?”

“분명 오늘 학교에서도 계속 생각 했었는데…미안해.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서.”

“칫. 진지하기는. 어제는 결석, 오늘은 물감. 자, 여기.”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빙긋 웃으며 물감을 쓱 밀어주었다.

“자 여기, 빌려줄게. 하지만 기억해 둘 거야. 다음에 두 배로 갚아.”

나는 알아차렸다.

물감을 건네는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 태는 명징하게 박혀, 도화지로 시선을 돌린 후에도 스케치 위에 아른거렸다. 설사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오랜 시간, 황량한 사막을 걸어오다 마주한 분홍색 꽃.’


떠오른 이미지를 주 사물로 배치하여 스케치를 모두 뜯어 고친 후 채색을 마쳤다.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에 ‘분홍꽃’ 이 해당되는지, 약간의 지적이 나왔다.

그와는 별개로 작품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빌려준 몇몇 물감은 모두 사용하여 바닥을 드러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났는지 허기가 심해졌다.

품평회를 마치고도 무언가 아쉬웠는지, 부원장은 연필과 붓을 정리하는 원생들을 향해 검지를 펼쳐 보였다.

“애들아. 우리 딱 한 시간만 더 하자. 선생님이 꼭 정리해서 알려주고 싶어서 그래.”

“와, 말도 안돼요. 오늘 토요일이란 말예요!”

“선생님은 남친 없어요? 빨리 집에 가서 기쁜 우리 토요일 봐야 하는데.”

원생들의 볼멘 야유가 터져 나왔다. 낮은 학년일수록 원성의 목소리는 더 컸다.

“나도 남친 있다니까? 니들 대학 보내려고 내 데이트 포기하는 거야. 군말 말고 10분만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자." 부원장의 대꾸에 잠시의 소란은 이내 실기실의 눅눅한 전등 아래 흩어졌다.


휴식 시간, 송지유가 가방에서 파란색 금속 뚜껑이 달린 과자 통을 꺼냈다.

과자 그림이 그려진 금속 용기에 절로 눈이 갔다. 저런 용기에도 과자가 담겨 나올 수 있나 싶었다.

차고 단단해 보이는 뚜껑을 열자, ‘깡’ 하는 마찰음이 허기진 실기실 안을 울렸다.

“선배님들, 드셔 보세요.”

먼저 건너편의 선배들에게 통을 건넨 그녀는, 가방을 부스럭거리더니 한 통을 더 꺼냈다.

“너희들도 먹어. 두 통 가지고 왔어.”

그녀는 차례로 수인의 무리들, 그리고 타학교 1학년들을 불러모아 과자를 먹게 한 후, 정작 본인은 두어 개를 먹고 손을 털었다.

“넌 왜 안 먹어? 너도 먹어봐. 먹을 만해.” 그녀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손끝으로 파란 용기를 가리켰다.

나는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그들 사이에 합류하여 과자를 맛보았다. 세상엔 씹지 않아도 녹아 없어지는 맛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이런 건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가 본 모든 종류의 슈퍼마켓에서 접한 적 없는 신기한 미각이었다.

추가 특강이 끝날 무렵, 시간을 맞춰 나타난 학원장의 손에는 떡볶이가 가득 들려 있었다. 좁은 공간은 이내 환호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더 남을 3학년 선배들을 뒤로하고 건물 입구를 나서는 길, 수인은 저만치 앞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와의 간격을 크게 좁히지 않은 채 한동안 각자의 길을 걸었다.

가로등 빛에 늘어진 내 그림자가 그녀에게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져 가는 지점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뭐야, 너 채시문이지. 혹시 너 나 따라오는 중이야?”

“아니, 난 저기 뚝방 쪽 사는데.” 머리를 긁적였다.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가고 있는 경로가 나의 집 방향과 동일한 것뿐.

“야! 누가 계속 바짝 뒤따라오는 줄 알고. 그럼 날 불러서 같이 가자고라도 말을 했어야지. 아무 말도 없이 뒤에서 그렇게.”

그녀는 어이없단 듯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내 팔을 때리며 말했다.

“진짜 놀랐단 말이야. 너 정말 바보구나.”


보름달이었다. 밝고 둔한 빛.

가벼운 접촉의 순간, 그녀의 눈을 확인하기엔 충분한 밝기.

웃으면, 선명한 웃음이 실릴 수 있는 눈.

나는 그 표정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내가 확인한 것은 분명 전보다 윤곽이 또렷해져 있었기에 그것이면 족했다.


“달 참 밝다.” 반쯤 기지개를 켜며 한 발짝 앞서 나간 수인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달이 밝은 날에는 별자리가 잘 안 보여. 난 별자리 보는 거 진짜 좋아하는데.”

별자리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초여름 밤공기보다 가볍다.

그녀에게서 보름달 옆 자리의 처녀자리에서부터 반대편에 있는 견우, 직녀자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짧은 휴식일은 손에 잡히기도 전에 떠나갔다.

새롭게 맞이한 첫 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자 나는 우선 화방으로 향했다.

내 것과, 되돌려줄 것까지 합하여 포스터 물감 2박스를 샀다.

본격적인 여름이 머지 않았는지, 사방이 어둑해지기 시작하였지만 표면의 온기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새로 개원한 학원임에도, 자리잡은 곳은 인적 드문 주택가 근처의 허름한 건물이었다.

종종 선배에게 호출당하던, 건물 어귀 좁은 공터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석연치 못한 소리가 물기 머금은 끈적임에 섞여 울려 퍼졌다.

나는 물감이 든 종이봉투를 든 채,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그곳으로 다가서면 안 될 것 같은 꺼림칙함이었다.

숨으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 몸은 자연스럽게 어둠이 드리워진 담벼락 곁으로 붙어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남녀의 목소리였다.

남자의 음성은 매우 낮았고, 그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거리가 있어 대화의 전부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개새꺄…이건…할 짓이…씨발놈…”

“제발…니가…여기까지…면…사람도 아니…”

“오빠…부탁…다신…”

남자의 음성은 우물에서 퍼 올린 듯한 저음이었기에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상대를 부르는 호칭부터 불안했던 여자 쪽만의 목소리로도 충분했다.

희끄무레하게 끊기는 그녀의 단어 조각들은,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고막을 열어젖혀 박혔다.

이윽고 남자의 외마디 욕설과 함께, 유리로 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동이 켜지고, 거칠게 악셀을 밟아 튀어나가는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끝으로 내가 서 있는 곳은 골목으로 돌아왔다.

나는 긴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어둠에서 몸을 일으켜 가로등 아래로 나왔다.

걸음 걸음 조심스레 좁은 공터 입구에 들어섰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젠 그 ‘당사자’들이 사라져 있길 바랐다.

공터에는 새까만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어둠 속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내며 몸을 일으킨 이는,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들고 있었다.

“뭘 봐.”

짧고 나지막한 한마디.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과 누가 먼저랄 것 없는 기다림.

나는 어둠속에서도 또렷한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봤으면 조용히 지나가. 본 거 없는 것처럼.”

서늘한 말을 내뱉은 그녀는, 내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켰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붉은 꽃이 피어올랐다.

타들어가는 매캐한 연기가 코안을 자극하며, 돌연 오래전 ‘그날’의 냄새를 일깨웠다.


새어머니는 어릴 때 내가 ‘본 적’이 있던 이웃 동네의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가 누군가의 아내였던 시절을 기억하였지만, 내가 다시 이 도시로 되돌아왔을 땐 내 친부의 ‘집사람’이자 내 ‘새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는 나를 맞이한 직후부터 담배를 태우던 그녀는,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그것을 내려놓지 않는 지독한 애연가였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조차 먼저 거실 식탁에 상을 차린 후, 본인은 안방 문을 닫고 담배 한 대를 습관처럼 태우곤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맞이한 첫 주말, 그녀는 차려 놓은 식탁에 앉아 가만히 내 밥 먹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얘, 너 그렇게 밥을 맛없게 먹으면 들어오던 복도 달아난다. 좀 맛있게 먹어. 아무리 찬이 맛없더래두. 차린 정성이 있는데 사람 무안하다.”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뜬 그녀는 안방 문을 닫았다.

곧이어 안방 문틈 사이로 혼탁한 안개가 스며 나왔다.

얼마 후 식사 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바로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지시를 어기지 않기 위해, 나는 ‘맛있는’ 소리를 내며 반찬을 씹고 뜨거운 국물을 들이켰다. 고개를 박고 연신 ‘잘 먹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내 목덜미는 그녀의 시선에 조여들고 있었다.

“어머. 얘 좀 봐바. 너는 어디 밥상머리에서 배워 먹은 것 없이 짭짭 소리를 내가며 밥을 먹니? 느이 애미가 그리 가르치든?”

새어머니의 입에서 풍겨 나오는 담배 잔향이 테이블 너머 내게 번져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소리를 죽여, 배웠거나 혹 배우지 못한 중간 어딘가의 소리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답이 정해진 것은, 아무리 기대하고 예상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지금도 같은 상황일지 모른다. 내 판단, 내 결정.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조용히, 지나가라, 본 게 없는 것처럼.

말 어디에 초점을 맞추든 상관없다.

그저 그 말을 잘 ‘이행’하면 그만이다.

나는 봉투를 굳게 움켜쥐고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등 뒤로 또다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공간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지난 토요일과 같은 공기는 없었다.

그저 붓을 씻어내는 손길, 연필을 깎고 남은 새카만 가루, 지우개로 무언가를 지워내는 둔탁함만이 사방에 가득했다.

나는 3학년 선배들과 더불어 가장 늦게 학원을 나섰다.

화방에서 사 온 물감은, 내게 빌려주었던 ‘상대’의 책상위에 올려두었다.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물감은 댕그러니 올려둔 그대로였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나를 없는 사람처럼 차갑게 관통하는 그녀의 시선과 말들은 지극히 건조했다.

학원에서 중요하게 강조하였고, 학교에서도 결과를 기다리는 대학 미술 대회였으므로, 나는 묵묵히 실기 준비에 매달렸다.

어느 순간 포장지조차 그대로였던 물감은 사라졌다.

내가 다시 그 물감을 발견한 곳은, 실기실 구석의 파랗고 거대한 쓰레기통 안이었다.


한 주가 더 지나 모의 수능 결과가 발표되었다.

290점.

나는 조회 시간에 받아 든 성적표를 몇 차례 꺼내어 다시 확인했다.

왜 이런 성적을 또 다시 받아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불현듯 어릴 적 바닷가에서 만들던 모래성이 스쳤다.

내 성적을 궁금해할 사람들을 떠올렸지만, 집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점심 시간.

뜨거운 볕을 피해 운동장 구석 그늘에 앉아 있을 때, 먼 곳에서부터 박교진이 절뚝이는 걸음으로 나를 찾아왔다.

“뭐야. 채시문. 외톨이야? 왜 이런 곳에 혼자 짱박혀 있는거냐. 날도 더운데.”

“나 외톨이 맞잖아. 너 어제 시험 결과 집에 말했어? 너희 어머니 충격 받으셨겠는데?”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무심결에 달궈진 철봉에 손을 대었다 놀란 그는, 욕지거리를 하며 조심스레 내 옆에 앉았다.

“야, 씨발 절름발이 된 거 보면 모르겠냐? 진짜 박터지게 맞았다. 손에 잡히는 암걸로나 닥치는 대로 때렸어.”

체육복 바지를 걷어 보여준 그의 다리에는 이곳 저곳 피 멍이 가득했다.

“실컷 다 때리고 엄마도 지쳤는지 갑자기 나한테 물어 보더라구.”

“뭐라고 하셨는데?”

“만화가 그리 하고 그리고 싶으냐고. 왜 고생길이 뻔한 걸 어쩌구 저쩌구 하길래 내가 엄마한테 그랬지. 엄마, 난 만화를 꼭 그려야겠다, 그걸로 먹고 살아야겠다 그거 아니고, 난 공부가 싫은 거야. 공부가 안 맞아. 만화는 내 선택지 중의 하나고. 형이랑 누나는 공부가 좋았는지 모르지만 난 다르잖아. 고등학교는 엄마 바라던 대로 됐으니 충분한데 나한테 계속 형처럼 되길 바래야 돼? 그랬더니 울 엄마 막 울던데?”

“…하하.” 나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울더니만 마지막엔 나한테 어디 니 맘대로 해봐라 하고 방에 들어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고?”

“뭘 어떻게 해? 울 엄마 입에서 그런 말 나왔으면 그건 허락이야. 무조건 만화 시작해야지. 학원은 당연히 너 있는 곳으로 가야겠지?” 그는 주변의 작은 돌을 주워 멀리 던져가며 말을 이었다.

“너네 학원 여자 많냐?”

“나 다니는 곳만 많은 거 아냐, 미술 학원에는 여자가 대다수야.”

“그게 뭔 말이냐?” 그는 몸을 돌려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학원에 거의 여자들 밖에 없어. 남자가 없다. 이게 네가 원하는 답이지?”

“와우. 채시문이 여태껏 야자 째고 천국에서 살고 있었구만? 거기 1학년 애들 누구 누구 있냐? 혹시 내가 아는 애들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말하면 다 알아?” 나의 구박에도 그는 고개를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빨리 말해 봐. 누구 누구 있는지를. 웬만하면 알 수도 있으니까.”

나는 마지못해 몇 몇의 이름을 나열하였다.

“조미성? 그 덩치 큰 애지? 아직도 말 많냐? 걔 내 국민학교 다닐 때 동창이야. 아마 국민학교 때 걔 한테 얻어 맞은 남자애들 좀 있을걸? 또 누구? 송지유? 걔 엘리트 교복 집 딸래미 아니냐?”

“그건, 잘 모르겠지만 보지도 못한 희안한 과자를 종종 먹던데. 물감도 홀베인 같은 걸 써. 연필통에도 까렌다쉬 같은 거 잔뜩이고. 그거 사려 해도 엄두도 안나는 가격인데.” 나는 손짓으로 파란 통을 묘사하였다.

“어 맞을거야. 걔 좀 살아. 걔도 내 동창인데 어렸을 때부터 딱 봐도 좋아 보이는 옷만 입고 다녔어. 학교에 걔 태우러 차도 자주 왔었다. 걘 좀 예쁘긴 한데. 성격이 좀 그랬는데. 그리고 최하영? 최하영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같긴 한데, 걔 어떻게 생겼냐?”

“키 좀 작고 까무잡잡한데, 얼굴에 주근깨 좀 있고.”

“음…그렇게 말하니까. 더 모르겠다. 니 말은 한 마디로 못 생겼다는 거 아니냐? 그럼 일단 관심 밖이야. 다른 애들은 더 없어?”

“…표수인이라는 여자애도 있어.”

“누구? 표수인?” 그는 엉거주춤 철봉을 붙잡고 일어나려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얼굴이랑 피부 하얀 애? 내가 전에 너한테 얘기했던?

“어, 그 여자애.”

“오 마이 갓. 걔가 그림을 그려? 이미지랑 진짜 안 어울리는데?”

“잘 하는 편이야. 시작한 진 얼마 안된 것 같지만.”

“맙소사다. 좀 충격인데? 걔가 학원을 다니는구나. 으흠.”

그는 중얼거리며 다시금 철봉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난 이제 결정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니가 가서 ET한테 먼저 말해줘라. 나 미술부 입부한다고.”

“어, 알았어. 어차피 나 이따 미술실 가봐야하니까 뵈면 말씀드릴게.”


미술실에서 만난 ET에게 교진의 이야기를 전하고 내 성적을 말했다.

10점이 더 오른 결과를 확인한 ET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젤 모서리를 리듬감 있게 두드렸다.

“역시 선생님이 믿고 있었던 만큼 나와줬네. 이제 다음을 생각하고 착실하게 준비를 해야지. 대회가 진짜 며칠 안 남았네?”

과거 서울대에 간 선배들의 입학 사례를 들먹이는 그의 눈에는 잠시나마 특유의 퀭함이 사라져 있었다.

서울대는 이미 ‘확정 코스’라는 그의 말이 현실감 없이 낡은 미술실 안을 떠돌았다.

내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감각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기에 나는, 아직 고작 1학년이었다.




XX대학 하계 미술 대회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학원 차원에서 꽤 비중을 두어 준비한 대회였는지라, 마친 후의 허탈함은 무더운 공기를 가르는 선풍기 바람처럼 맥없이 흩어졌다.

나는 매 순간 옆 자리의 수인을 의식하였지만, 그녀에게 있어 ‘옆 자리’라는 표현은 나보다는 내 왼편 자리의 송지유가 더 어울렸다.

나는 그녀의 '명령'대로, 보거나 들은 것이 없는 것처럼 학원 생활을 이어갔다.


선풍기의 덜덜거림이 소용없는 소음으로 인식될 즈음, 대회 결과가 학원 게시판에 공지되었다. 1학년 중에서 3명의 입선자가 나왔다. 표수인, 송지유, 그리고 나.

개원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1학년 입선자가 셋이나 나왔다는 사실에 흥이 나서인지 학원장과 부원장은 내내 웃음을 달고 다녔다.

대회 후 묘하게 흐트러졌던 분위기에 활력을 더하는 에너지였다.


“야 채시문. 내일부터 박교진 우리 학원으로 온다는 거 맞아?”

조미성이 실기실로 들어오며 손의 물기를 교복에 문질렀다.

“어, 어제 원장님께 말씀드렸는데 들었나 보구나? 교진이가 너랑 국민학교 동창이었다던데.”

“6학년 때 짝궁이었는데 나한테 두드려 맞았단 이야기는 안 하든?” 미성은 내 옆 자리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별달리 그런 이야기는 없었어.”

“그럼. 쪽팔리게 그런 이야기를 할리가 없지. 이제 얌전해졌으면, 다시 맞을 일도 없을거고.” 그녀는 낄낄대다 실기실 문입구를 쳐다보았다.

“어 자리 주인 왔다야.”

수인이 들어오며 나와 시선을 마주쳤지만, 그녀는 흘리듯 고개를 비껴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비켜 조미성.”

“네네. 마님. 알겠습니다요.” 미성은 수인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야야 근데 너네 둘. 뭐야? 얼마 전부터 이 분위기? 보니까 말도 거의 안하는 거 같고? 뭐 철천지원수라도 졌냐?”

황소 같은 눈알로 나와 수인을 번갈아 쳐다보는 조미성의 물음에 수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물건을 정리했다. 나 또한 어색한 입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뭐야 재미없게. 말들이 없어. 너네 지금 밖이 여름인 건 알고 있냐? 왜 둘이서만 북극이야?”

“조용히 하고 니 자리로 가.” 수인은 눈을 흘기며 미성에게 손짓했다.

“아이고 무셔라. 알았다 이 년아.” 미성은 입을 쭈뼛거리며 돌아섰다.

“야야야.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성아 송지유 왔어? 지유 어딨어?”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내던지며 공간을 차지하는 최하영을 보자 자리로 돌아가던 미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넌 좀 조용히 들어오면 안 되냐? 들어보면 암 것도 아닌 일을 맬 날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면서 다니냐?”

“아니 아니, 내 말 들어봐. 진짜 짱 놀라운 소식이거든? H.O.T가 우리 동네 올지도 모른단 말야.”

“날이 더워서 미쳐가냐?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갑자기 H.O.T가 이 동네에는 왜?”

“진짜래두. 내 말 믿어봐. 정확한데서 들은 거야. 어 저기 지유 왔다.”

때 마침 입실한 송지유는 멋도 모른 채 하영에게 팔을 잡혀 이끌려 왔다.

“송지유. 혹시 H.O.T 우리 동네로 올지도 모른다며? 나 이미 소식 들었어.”

“아무튼 넌 소문이 참 빠르다. 어떻게 알았어? 나도 학원 오기 전에 엄마 가게 들러서야 알았는데?”

“다 아는 수가 있지. 내가 발이 넓잖아. 그건 뭐야?” 하영이 지유의 가방을 보며 말했다.

송지유는 책가방에서 브로마이드를 꺼내어 원생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이번에 엘리트 교복 모델이 H.O.T거든. 그래서 다음 8월달에 시민체육관에서 콘서트를 할 거야. 표는 상황 봐서 구해지면 나눠 줄게.”

모여서 이야기를 듣던 여자 아이들은 모두 시끄럽게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뭐야 진짜야?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엘리트 교복 광고에 H.O.T 나오더만. 헛소리가 아니었나 보네? 최하영이 정보력 대단한데?” 미성이 말했다.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하영은 어깨를 우쭐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송지유 넌 최고야. 우리 오빠들 보러 꼭 가야지. 난 죽어도 거기서 죽을 거야. 꼭 표 구해줘야해. 알라뷰 지유.” 하영은 손을 뻗어 지유를 안으려 하였지만, 그녀는 웃으며 몸을 뺐다.

“말했지만 표는 상황 봐서야. 보채지 마. 보챈다고 될 것도 아니고.” 지유는 상황을 정리하여 매듭지었다.


떠들썩한 소음 가운데에서도 수인은 자신의 스케치를 수정하고 있었다.

소란의 한가운데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는 것처럼.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