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을 시간이 지났는지 허기가 심해졌다.
품평회를 마치고도 무언가 아쉬웠는지, 부원장은 붓을 정리하는 원생들을 향해 검지를 펼쳐 보였다.
“딱 한 시간만 더 하자.”
원생들의 볼멘 야유가 터져 나왔다. 낮은 학년일수록 원성의 목소리는 더 컸다.
“나도 남친 있다니까? 니들 대학 보내려고 내 데이트 포기하는 거야. 군말 말고 10분만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자."
잠시의 소란은 이내 실기실의 눅눅한 전등 아래 흩어졌다.
휴식 시간, 송지유가 가방에서 파란색 금속 뚜껑이 달린 과자 통을 꺼냈다.
과자 그림이 그려진 금속 용기에 절로 눈이 갔다.
저런 용기에도 과자가 담겨 나올 수 있구나.
차고 단단해 보이는 뚜껑을 열자, ‘깡’ 하는 마찰음이 허기진 실기실 안을 울렸다.
“선배님들, 드셔 보세요.”
먼저 건너편의 선배들에게 통을 건넨 그녀는, 가방을 부스럭거리더니 한 통을 더 꺼냈다.
“너희들도 먹어. 두 통 가지고 왔어.”
그녀는 차례로 수인의 무리들, 그리고 타학교 1학년들을 불러모아 과자를 먹게 한 후, 정작 본인은 두어 개를 먹고 손을 털었다.
“넌 왜 안 먹어? 너도 먹어봐. 먹을 만해.”
그녀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손끝으로 파란 용기를 가리켰다.
나는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그들 사이에 합류하여 과자를 맛보았다.
세상엔 씹지 않아도 녹아 없어지는 맛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이런 건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가 본 모든 종류의 슈퍼마켓에서 접한 적 없는 신기한 미각이었다.
추가 특강이 끝날 무렵, 시간을 맞춰 나타난 학원장의 손에는 떡볶이가 가득 들려 있었다. 좁은 공간은 이내 환호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더 남을 3학년 선배들을 뒤로하고 건물 입구를 나서는 길, 수인은 저만치 앞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정한 간격을 크게 좁히지 않은 채 한동안 각자의 길을 걸었다.
가로등 빛에 늘어진 내 그림자가 그녀에게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져 가는 지점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뭐야, 채시문. 너 나 따라오는 중이야?”
“아니, 난 저기 뚝방 쪽 사는데.”
머리를 긁적였다.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가고 있는 경로가 나의 집 방향과 동일한 것뿐.
“야! 누가 계속 바짝 뒤따라오는 줄 알고. 그럼 날 불러서 같이 가자고라도 말을 했어야지. 아무 말도 없이 뒤에서 그렇게.”
그녀는 어이없단 듯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내 팔을 때렸다.
“진짜 놀랐단 말이야. 너 정말 바보구나.”
보름달이었다. 밝고 둔한 빛.
가벼운 접촉의 순간, 그녀의 눈을 확인하기엔 충분한 밝기.
웃으면, 선명한 웃음이 실릴 수 있는 눈.
나는 그 표정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내가 확인한 것은 전보다 윤곽이 또렷해져 있었기에 그것이면 족했다.
“달 참 밝다.” 반쯤 기지개를 켜며 한 발짝 앞서 나간 수인이 말했다.
“이렇게 달이 밝은 날에는 별자리가 잘 안보여. 난 별자리 보는 거 진짜 좋아하는데.”
별자리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초여름 밤공기보다 가볍다.
그녀에게 보름달 반대편에 있는 견우, 직녀자리 이야기까지 마저 들은 후,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짧은 휴식일은 손에 잡히기도 전에 떠나갔다.
새롭게 맞이한 첫 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자 나는 우선 화방으로 향했다.
내 것과, 되돌려줄 것까지 합하여 포스터 물감 2박스를 샀다.
본격적인 여름이 머지 않았는지, 사방이 어둑해지기 시작하였지만 표면의 온기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새로 개원한 학원임에도, 자리잡은 곳은 인적 드문 주택가 근처의 허름한 건물이었다.
종종 선배에게 호출당하던, 건물 어귀 좁은 공터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꺼림칙한 소리가 물기 머금은 끈적임에 섞여 울려 퍼졌다.
나는 물감이 든 종이봉투를 든 채,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숨으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 몸은 자연스럽게 어둠이 드리워진 담벼락 곁으로 붙었다.
그렇게 숨은 것 같지 않게 숨은 채, 나는 그림자 속에 하나가 되었다.
남녀의 목소리였다.
남자의 음성은 매우 낮았고, 그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베어내듯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거리가 있어 대화의 전부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개새꺄…이건…할 짓이…씨발놈…”
“제발…니가…여기까지…면…사람도 아니…”
“오빠…부탁…다신…”
남자의 음성은 우물에서 퍼 올린 듯한 저음이었기에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를 부르는 호칭부터 불안했던, 여자 쪽만의 목소리로도 충분했다.
희끄무레하게 끊기는 그녀의 단어 조각들은, 들으려 하지 않아도 고막을 열어젖혀 박혔다.
이윽고 남자의 외마디 욕설과 함께, 유리로 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에 시동을 켜는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끝으로, 내가 서 있는 곳은 다시 ‘골목’으로 돌아왔다.
나는 긴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어둠에서 몸을 일으켜 가로등 아래로 나왔다.
건조해진 입안을 달싹이며 조심스레 좁은 공터를 지나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젠 그 ‘당사자’들이 사라져 있길 바랐다.
공터에는 새까만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어둠 속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낸 이는,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들고 있었다.
“뭘 봐.”
한마디.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과 기다림.
나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봤으면 조용히 지나가. 본 거 없는 것처럼.”
그녀는 서늘한 말을 내뱉고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켰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빨간 꽃이 피어올랐다.
타들어가는 매캐한 연기가 코안을 자극하며, 오래전 ‘그날’의 냄새를 돌연 일깨웠다.
새어머니는 어릴 때 내가 ‘본 적’이 있던 한 동네의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가 누군가의 부인이었던 시절을 기억하였지만, 내가 다시 이 도시로 되돌아왔을 땐 내 친부의 ‘집사람’이자 내 ‘새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는 나를 맞이한 직후부터 담배를 태우던 그녀는, 웬만해선 그것을 내려놓지 않는 골초였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조차 먼저 거실 식탁에 상을 차린 후, 본인은 안방 문을 닫고 담배 한 대를 습관처럼 태우곤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맞이한 첫 주말, 그녀는 차려 놓은 식탁에 앉아 가만히 내 밥 먹는 모습을 쳐다보다 말했다.
“얘, 너 그렇게 밥을 맛없게 먹으면 들어오던 복도 달아난다. 좀 맛있게 먹어. 아무리 찬이 맛없더래두.”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뜬 그녀는 안방 문을 닫았다.
곧이어 거실로 퍼져 나오는 담배 냄새.
얼마 후 식사 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바로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지시를 어기지 않기 위해, 연신 ‘맛있는’ 소리를 내어가며 반찬을 씹고 뜨거운 국물을 들이켰다.
고개를 박고 열심히 ‘잘 먹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내 목덜미는 분명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어머. 얘 좀 봐라, 너는 어디 배워 먹은 것 없이 그렇게 짭짭 소리를 내가며 밥을 먹니? 느이 애미가 그리 가르치든?”
새어머니의 입에서 풍겨 나오는 담배 냄새가 테이블 너머 내게 번져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소리를 죽여, 배웠거나 혹 배우지 못한 중간 어딘가의 소리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답이 정해진 것은, 아무리 기대하고 예상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지금도 같은 상황일지 모른다. 내 판단, 내 결정.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조용히, 지나가라, 본 게 없는 것처럼.
말 어디에 초점을 맞추든 상관없다.
그저 그 말을 잘 ‘이행’하면 그만이다.
나는 봉투를 굳게 움켜쥐고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등 뒤로 또다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공간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지난 토요일과 같은 공기는 없었다.
그저 붓을 씻어내는 손길, 연필을 깎고 남은 새카만 가루, 지우개로 무언가를 지워내는 둔탁함만이 사방에 가득했다.
나는 3학년 선배들과 더불어 가장 늦게 학원을 나섰다.
화방에서 사 온 물감은, 내게 빌려주었던 '상대'의 책상위에 올려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