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의 테두리 -6-

by Dried Cognac

막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둔덕 위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있는 대로 고함을 치려 했지만 입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나는 단 한순간도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돌아왔음을 인지하였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밝아 보였다.

방 한 구석에 쑤셔 박힌 교복은 젖어 있었고,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호출기는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곧 울릴 자명종을 미리 끄고 거실로 나왔다.

양치와 세수를 마친 후, 당장 입을 수 있는 교복 바지가 없어 드라이어로 물기를 말렸다.

다 말린 바지에서 스멀스멀 쿰쿰한 냄새가 올라왔다.


오늘도 현관에는 두 사람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학원을 멋대로 결석했기에 3학년 선배에게 학원 뒤 공터로 호출되었다.


그는 어제 ‘왜’ 오지 않았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어째서 ‘무단’이었는가에 있었다.

화장실에서 가져온 걸레 자루를 내 엉덩이에 내리치는 동안, 그는 나의 미래를 ‘우려’ 하는 단어들을 나열하였다.


그의 매질이 마무리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가롭고 평화로운 토요일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땅바닥에 엎드리며 묻은 바지의 흙은, 굳이 털지 않았다.


“안녕, 채시문?”

가장 먼저 실기실 안으로 들어온 불방구.

조미성은 그녀의 무리들 사이에서 그렇게 불리었다.


마이크를 삼킨 것 같은 특유의 목청과 기질은, 이전 학원에서도 모두의 인정을 받는 바였다.

심지어 과묵했던 그 학원장까지도.


“어…안녕?”

“너, 내 이름 알지?” 그녀는 불쑥 가슴을 내밀어 자신의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알고 있어.”

“그래. 내 이름 모를 리가 없지. 이제 우리 서로 말 좀 하고 살자? 전에처럼 힐끗힐끗, 그러지 말구.”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싱긋 웃더니 내게 손을 들어 귓속 말을 하는 시늉을 했다.


“너, 힐끗거리며 수인이 가끔씩 쳐다보던 거, 그거 내가 다 봤다구.”

여전히 직선에 가까운 말투와 능글능글하기 짝이 없는 표정.

순간 살짝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보...보다니, 내가 뭘 쳐다봤다는 말이야?”

“내가 뭘 쳐다봤다는 말이야.” 몸을 흔들며 앵무새처럼 내 말을 따라한 그녀는 가지런하고 거대한 치아를 씩 드러내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니가 여기 터줏대감이잖아. 앞으로 잘 좀 부탁한다고. 그 말이 하고 싶었어.”

그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후, 부산을 떨며 들어오는 또 다른 아이. 최하영.


“야야야, 불방구. 이번 달 키키 부록으로 받은 립스틱인데 이것 좀 봐봐.”

“아유, 또 뭔 데 호들갑이야? 보여줘봐.”

“핑크인데 색이 깨는 것 같지? 지난달에 에꼴 거는 괜찮았는데. 아 짜증나 쎄씨로 살걸. H.O.T 브로마이드 갖고 싶었는데.”

그녀는 조그마한 거울을 들고 자신의 입술에 립스틱을 연신 칠하였다.


“어때 미성아? 색깔 좀 싼티나고 촌빨 날리지 않아?”

하영은 미성에게 자신의 입술을 보였다.


“뭐가 싼티나. 색은 예쁘기만 하구만. 니 년 주둥이가 문제라는 건 모르냐?”

미성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가방에서 물감을 꺼내어 실기대 위에 펼쳤다.


“뭐래, 이 지지배가. 그나저나 조미성. 너, 그 3반에 박수연 이야기 들었어? 걔 지난 주 일요일에 소개팅 했었는데, 소개팅에 나온 남자애. 누군지 알아?”


입.

최하영은 미성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진 '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작은 말이 많았다.

낮은 소리로 잘 들리지 않아, 더욱 그 사이에 끼고 싶은 이야기들.

그녀는 다른 누군가와 끊임없이 그걸 공유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실기실에 들어선 이들은 표수인과 송지유였다.

그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실기 담당 부원장도 입실하여, 곧바로 주말 특강이 시작되었다.


C학원 간판 중간에는 '자유'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박혀 있었지만, 간판명이 무색하게도 이곳은 모두가 시각디자인과, 단 한 개의 문을 열기 위하여 내달리는 곳이었다.


구성 실기실 한가운데의 둥근 원형 테이블.

테이블을 중심으로 빼곡히 모여 앉아 강의를 듣고, 구성 스케치를 하며 서로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곁눈질로 확인하였다.


대학 미술 대회를 며칠 앞두고 있는 와중이라, 스케치에 들어간 손들의 힘이 평소보다 조금 더 굳어져 있었다.


“학원 왜 안 나왔어?”

옆 자리의 수인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고개가 미세하게 나를 향한 듯하지만, 시선은 본인의 그림에 가있어 내게 말을 건 것인지 불명확하다.


“혹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어제 학원 안 나온 사람은 너뿐이야.”

그녀는 연필을 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건 내게 건네는 말임이 분명했다.


별난 상황이었다.

꽤 긴 시간 말 한마디 못해 본 관계였는데, 이리도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눈다.

아마도 학원 규모가 너무 작아서, 혹은 내 옆자리여서 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경계가 흐릿해져가는, 며칠 전의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럴만한 일이 있었어.”

“그래? 알았어. 네 그림 몇 개 봤어. 전보다 더 좋아졌던데? 오늘 사물 분할 소재 뭘로 잡을 거야?”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건넸다.


오늘은 베낄 카피본 없이, 순수하게 개인의 창의력을 기반으로 완성한 구성작품을 모아놓고 품평회를 하기로 한 날.

학원에서 내어준 구성의 주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의 재구성이었다.


“라디오로 하고 있는 중이야.”

스케치를 중간쯤 끝내고, 물감통을 들여다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바닥을 드러내 가는 몇 가지 색 때문에, 새 물감을 사온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를 잊고 말았다.

오늘 점심때만 해도 분명 기억하고 있었는데, 얼간이 같으니.

아차 싶었지만 지금 사러 가기엔 화방이 너무 멀다.


나는 망설이며 시간을 끌다 결국 옆자리의 수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미안하지만 좀 빌릴 수 있을까…?”

“응?”

수인은 별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은 조금 당혹스럽게도 정확히 내 눈을 향하고 있었다.


“물감이 다 떨어져서…마젠타하고 코발트 블루, 그리고 몇 개 더.”

“아. 물감?”

그녀는 아직 스케치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내 켄트지를 한번 훑어보았다.


“오늘 품평회인데, 내가 안 빌려주면 어떻게 할래?”

“분명 오늘 학교에서도 계속 생각 했었는데…미안해.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서.”

“칫. 진지하기는. 어제는 결석, 오늘은 물감. 자, 여기.”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빙긋 웃으며 물감을 쓱 밀어주었다.

“자 여기, 빌려줄게. 하지만 기억해 둘 거야. 다음에 두 배로 갚아.”


나는 알아차렸다.

물감을 건네는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 태는 명징하게 남아, 도화지로 시선을 돌린 후에도 스케치 위에 아른거렸다.

설사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오랜 시간, 황량한 사막을 걸어오다 마주한 분홍색 꽃.’


떠오른 이미지를 주 사물로 배치하여 스케치를 모두 뜯어 고친 후 채색을 마쳤다.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에 ‘분홍꽃’ 이 해당되는지, 약간의 지적이 나왔다.

그와는 별개로 작품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빌려준 몇몇 물감은 모두 사용하여 바닥을 드러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