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그 사람’이 약속해준 호출 번호.
빗물 때문에 뿌옇게 번진 LCD창을 연신 닦아가며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55로 할 게, 시문아. 이건 엄마가 너랑 통화하고 싶을 때…”
작년 초 중학교 3학년에 올라선 직후, 아무런 소식이 없던 친모는 뜬금없이 나의 학교를 찾아왔다.
분명 봄이었으나 아직 칼바람이 매서웠던 그 날.
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지 움츠러들어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하교하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땅의 질감을 확인하듯, 느린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시문아…”
“…”
순간, 뒤죽박죽 뒤엉켜버린 수많은 단어들이 눈 앞을 앵앵거리며 떠다녔다.
추위와 피곤함이 서린 얼굴과 달리, 친모의 구김 없는 투피스와 굽 낮은 뾰족 구두가 유달리 눈에 박혔다.
“엄마가 정말 미안해 시문아. 엄마가 널 너무 늦게 찾아왔네.” 그녀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순간적으로 손을 뿌리치려 하였으나, 친모는 그런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아픈 덴 없지? 학교 생활은 괜찮아? 엄마는 늘 시문이 생각을 많이 했어.”
그녀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였다.
나는 고개를 틀어 친모의 손길을 피했다.
급격히 어두워진 친모의 표정을 보았다.
순간 묘한 쾌감 같은 것이 등허리를 스쳤지만 이내 그것은 쾌감이 아닌 다른 '무언가' 라는 걸 깨달았다.
“시문이가 보고 싶을 때, 목소리라도 듣고 싶을 때, 이걸로 연락했으면 해서…”
그녀는 쇼핑백에 들어있던 작은 하얀색 박스를 꺼내 들었다.
“삐삐 알지? 친구들도 삐삐 쓰는 애들 많이 있니?”
“…알아요. 사용법.” 나는 상자를 받아 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학교에서 몇몇은 암암리에 사용중이었고, 교진도 그 중의 하나였기에 나는 삐삐를 이용하여 그와 소통하곤 했다.
“그래 사용법 알고 있다니까 다행이네. 그럼 55로 할 게, 시문아. 이건 엄마가 너랑 통화하고 싶을 때...그 때 남기는 엄마와 시문이 사이의 약속이야. 호출할 때 55를 붙여서 보내면, 엄마가 우리 시문이 목소리를 정말 듣고 싶은 거니까, 엄마한테 연락해줄 수 있겠어?”
나는 애꿎은 박스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물음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어려운 부탁하는 거니?”
“…네. 어머니. 원하신다면 그렇게 할 게요.”
나의 호칭을 듣자, 그녀는 물끄러미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눈동자에서, 나 또한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은 살아오며 마주한 적 없는, 내가 알지 못하는 '눈'이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가야 할 시간인데.
하염없이 나를 쳐다보던 그녀는, 뒤돌아서 핸드백을 열었다.
한참을 뒤적이던 그녀가 꺼내든 것은 두툼한 하얀 봉투.
나름 두께가 있었다.
“자, 받아. 엄마는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 또 다시 연락할게.”
“…그게 뭔가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받아. 엄마가 미안해서 꼭 챙겨주고 싶었어.”
그녀는 나의 손에 억지로 봉투를 들려주었다. 그리곤 토막처럼 서 있는 나를 뒤로 하고, 또각 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야 눈에 들어왔지만, 저 멀리에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뿌연 김이 서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친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봉투를 열어 보았다.
40만원.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어디에 써야 할 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큰 ‘돈’을 꼭 쥐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비릿한 빗물이 튀어 정신이 번쩍 든다.
얼마나 오래 부스에 있었는지, 주위를 둘러보니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비는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일년 넘게 ‘간직’하고 있던 만원짜리 전화카드를 꺼내 들었다.
액정에 표시된 번호를 따라 전화 버튼을 누르자 한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씀하세요…너 시문이 맞지?”
“…”
“시문아. 엄마가 정말 미안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겠어? 금방 다시 돌아올게."
익숙한 목소리와 전화기 뒤로 들려오는 작은 소음들.
모든 청각을 동원해 전화기 너머의 상황에 집중하였다.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여러 종류의 발걸음 소리.
전화 노이즈 사이로 섞이는 간간히 섞여 들리는 웃음 소리와, TV 아나운서의 멘트.
나는 말없이 수화기를 귀에 대고 ‘차곡차곡’ 줄어드는 카드 잔액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카드의 잔액이 절반 즈음 떨어진 것을 헤아렸을 때 다시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시문아. 너 아직 있니?"
“…”
“너 듣고 있는 거지? 괜찮아. 편하게 말해도 돼. 엄마는...엄마는 사실 계속 연락하려고 했지만…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 바로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첫 말을 떼었다. 다음 말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일 년 하고도 아주 여러 날만의 대화.
어제 만난 사이처럼, 끈을 찾아내어 말을 이어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시문이 엄마가 정말 많이 미안해. 네 마음 많이 상했을 거 알아.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잠시 헛기침을 하였다.
“너 전에 서울에서 엄마랑 같이 살 때 만들었던 조흥은행 통장, 아직 잘 쓰고 있니?”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왜요?”
“너 곧 생일이기도 하고 하니까, 엄마가 이번에…”
“돈 보내 주시려고요?”
나는 그녀의 말 허리를 잘라내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 침을 삼키기 힘들었다.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갈증이 떠올랐다.
전화기 밖으로 어떻게든 다시 말을 이으려 애쓰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우선 네 말이 맞아 시문아. 하지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엄마 이야기를 더 들어봐. 단순히 돈 보내주겠다 그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엄마는…”
“지난 번에 40만원이었죠? 이번에도 똑같이, 다 쓰지도 못하게요. 덕분에 아주 좋았어요.”
어떤 이름을 붙이면 되는지 모를, 오랜 시간 간직했던 ‘무언가’를 쏟아냈다.
문득 ‘그 날’의 형이 떠올랐다.
닮았다, 흰웃음이 새어 나왔다.
“더 할 말이 없어서요. 이만 전화 끊을게요.”
멋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인도 한가운데로 흘러나왔다.
젖으면 안 될 그림도, 뽑지 않은 전화 카드도, 새어머니의 잔소리 따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하여 걷고, 걸은 다음, 또 걸었다.
내가 걷는 길은, 황량하고 건조한 한 가운데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아까 멈추었던 그 ‘어딘가’였고, 나는 다음을 향해 또 걸었다.
세우[細雨]는, 내내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