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의 테두리 -4-

by Dried Cognac

간밤 세찬 비의 여파로 분주해진 아침 거리.

빗방울은 당분간 멈춘 듯하지만, 아직은 보이는 모든 사물이 탁빛에 잠겨 있다.


집에 돌아가 우산을 챙겨 나올지, 순간 멈칫하였다.

어제에 이어 또다시 젖은 교복을 벗어 놓는다면, 새어머니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2차 모의 수능 날이라는 사실이 내 걸음을 여유롭게 만들지 않았다.


‘엄마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돌연 머리속에 나타난 흐릿한 존재.

무의미한 가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또 한 번 그 '존재'를 떠올린다.


다시 가느다란 비가 머리를 적시어, 뛰어서 정문을 통과했다.


2년 전 어느 날, 서로 간 왕래 없던 어머니와 친부가 한 밤에 전화로 나눈 이야기.

아무리 자는 척을 하려해도 귀를 파고드는 바늘 같은 말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서로에게 떠 맡겨야 할 이유가 가득한 ‘짐’ 이었다.


그로부터 며칠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나를 소포처럼 정리하여 고향으로 내려 보냈다.


떠밀리듯 고향에 도착하자, 이 바닷 바람이 부는 도시의 동급생들은 내게 친밀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전학 당일 방과 후, 몇몇 패거리에 둘러 쌓여 학교 뒷산 공터로 향한 나는, 한 녀석에게 맞짱을 ‘요청’받았다.


자리를 잡은 그가 앞 뒤 없는 욕설과 함께 주먹부터 날리자, 나 또한 짜증과 불안감이 뒤섞인 주먹을 미친듯이 휘둘렀다.

싸움닭을 구경하듯 몰려 있던 패거리들의 중재로 싸움이 마무리되었을 무렵, 그가 과거 동네 놀이터에서 졸병 어딘가 쯤 되던 국민학교 동창이었음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내가 서울로 떠나가기 전, 나름 큰 덩치로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골목 대장 노릇하던 1~2학년 꼬맹이 시절의 기억이었다.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연이어진 ‘결투’ 또한 비슷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그들은 게임 순서를 정하듯, 차례로 나를 싸움터에 불러내었다.


말은 대결이었지만 점점 그 상대가 역도부, 권투부 등 힘깨나 녀석들로 바뀌어 갔기에, 종내엔 일방적 구타나 다름없게 되었다.


맞은 배를 움켜쥐고 땅바닥을 굴러다니며 어렴풋이 알게 된 발단은, 내게 ‘서울냄새’가 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모두 한때 ‘어렸던 골목’을 공유했던 사이라는 것.


철저히 혼자였고, 맞서기엔 버거웠던 나는 ‘조용히 지내라’는 그들의 말을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였다.

내 굴종의 제스처를 확인한 그들은, 내게 흥미를 거두고 다음 전학생을 표적으로 잡았다.


부여된 평온 이후, 나는 중학 생활을 버티어 냈다.

그들의 경고대로 말문을 닫았으며, 공부를 향한 최소한의 관심조차 내려 놓았다.


그 시절, 내 손에 들려진 것은 오로지 클래식 기타와 만화책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시험성적은 추락을 겪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아주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역 명문고’에 입학 원서를 내었다.

연합고사 결과로 받아 든 143점과는 무관한 결정이었다.

진로 상담을 하던 중학교 담임은 타 지역 명문 사립 진학까지 넓게 고려해보라 아쉬워하였다.


고교 입학 후 실시한 첫 모의 수능에서는 280점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내 점수를 확인한 미술 전임 교사는 ‘3년만에 다시 서울대 미대 진학’ 타이틀이 나올 가능성이 생겼다며, 공공연하게 이를 떠벌리고 다녔다.




어제의 ‘미소’가 문득 떠오른 것을 제외하면 시험 과정은 특이할 것이 없었다.

시험을 위하여 따로 준비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막힘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나가는 OMR카드를 보며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야, 최시문.” 복도 중간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박교진'이 가볍게 뛰어왔다.


“시험 잘 봤냐?”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그.

“대충 그럭저럭. 넌?”

“뭔 또 그럭저럭이야? 이 새끼 엄살은. 이러다 너 진짜 서울대 가는 거 아냐?” 그는 자세를 낮추어 내 얼굴에 연거푸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하였다.


“난 4교시 완전 찍었다. 4교시 똘빡이 시험 감독이었는데 걔만 아니었으면 한 숨 때렸을 텐데.”

“지난 중간고사도 빨리 풀고 자다가 너 담임한테 많이 맞지 않았나?”

“어, 맞아. 진짜 좆나게 아팠었지! 너 그 큐 대 깎은 몽둥이 알지? 그걸로 한 열 대는 쳐 맞은 것 같다. 그건 어떻게 부러지지도 않냐, 씨발.” 그는 짧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너네 미술부 분위기 좀 어떠냐? ET는 안 빡세냐?”

미술부 전임 교사는, 그의 직무 이름 대신 학생들 사이에서 ‘ET’로 불리웠다.

순전히 눈이 퀭한 그의 외모와 구부정한 자세 때문이었다.


“아니, 가끔 화를 내긴 하지만 괜찮아. 미술부에서 누굴 때리는 걸 본 적은 없어. 그런데 너 집에서 허락한데?”


내가 중학 시절 말문을 닫아버린 이후, 교진은 만화를 다리 삼아 내게 다가온 동급생이었다.

그는 나와 살았던 동네가 달라 겹치는 기억이 없는 이였지만, 같은 관심사를 매개체로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그는 광적으로 만화를 좋아했고, 받는 용돈은 족족 만화책을 구하는 데 소비했다.

그와의 만남으로 나는 서점에서 구하는 것이 어려웠던 원서 만화책까지 섭렵할 수 있었고, 공유하는 관심사를 토대로 그에게만큼은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학기초부터 미술부 입부를 고민해왔던 교진은, 그간 어머니의 심한 반대로 바램을 이루지 못했다.

법대와 교대를 진학한 그의 형과 누나와 대비하면, 어머니의 반대는 그런대로 ‘합리적’이어 보이는 사유가 있었다.


“어. 엄마도 이제 더 이상 전처럼 심하게 닥달할 순 없을 걸? 오늘 내가, 공부 같은 건 내 길이 아니란 걸 딱 부러지게 보여 줄 거니까!”

”무슨 말이야?”

“사실 오늘 나 4교시만 찍은 거 아니다. 1교시부터 시험지 받자 마자 그냥 다 찍었어.”

그는 과장되게 양팔을 벌려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며 말했다.

“이미 끝난 일이다 이 말씀이야.”

“난 좋아. 네가 미술부에 들어온다면. 근데 네 말 대로 1교시부터 다 찍었다면 그건 진짜 극단적인 거 같은데?”

“극단이고 뭐고간에 시문아. 이번엔 나 말리지 마라. 확 들이받는 거지 뭐!”

“어쨌든 결과가 좋았으면 한다.”

“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우선 지켜나 봐라 친구. 오늘이 그 시작이니까.”

그는 손가락을 연신 튕기며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희망적으로 튕겨지는 그의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그 발걸음의 리듬은 엇박이 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미술실로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ET’는 숨김 없는 반가움을 티 내며 말을 걸어왔다.


“오오, 우리 채시문, 시험은 잘 치뤘겠지? 이번에는 한 290점 이상 나올 것 같은가?”

“예상한 적이 없어서 아직 결과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감이 그리 없으면 쓰나, 미술을 하는 우리는 자신감이 있어야 해.” 그는 허공에 느릿하고 우아한 팔을 휘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자, 차곡차곡 서울대 코스 준비하는 거야. 이 선생님은 믿는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교무실로 돌아갔다.


미술실에서 화구통과 몇 가지 물품들을 챙기는 도중, 주머니안의 삐삐에 진동이 울렸다.

낯 선 번호.

잘못된 발신이라 생각한 나는 삐삐를 주머니에 넣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건 명백한 실수였다.

종일 내 우울하던 하늘에서, 다시 가느다란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학원으로 향하기엔, 이 비가 점점 굵어지는 것 같다.

화구통에 젖으면 안되는 켄트지들이 몇 장 들어 있어 나는 급한대로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하릴없이 비가 그치기 만을 기다리는 중, 주머니를 다시 울리는 삐삐.


나를 호출한 번호는, 아까와 동일했다.

빗방울을 닦아가며 다시 쳐다본 액정에는, 분명 ‘55’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