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리뷰 편을 먼저 올려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생각이 정리가 안돼서 다른 영화 리뷰를 먼저 올립니다. 아무래도 저의 자기반성적 고백 글이 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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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세계. 그리고 그 한가운데 고고하고 청아한 모습의 조문탁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깐깐하고 옳고 그름이 확실한 스님인 조문탁은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업으로 살아갑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았다고, 수행을 오랫동안 해왔다고 자비를 구해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죠.
그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뱀 요괴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산모에게 대가 없는 선행을 베푸는 모습과 그들의 손에 쥐고 있는 염주를 통해 이들이 상당히 오래 수련한 뱀들임을 암시하며, 드디어 홍콩영화 전성시대를 연 최고의 배우 왕조현과 장만옥이 등장합니다.
두 배우 모두 놀랄 만큼 아름답지만, 왕조현이 연기한 백사는 차분하고 성숙한 관능미가, 장만옥이 연기한 청사는 자유분방하고 좀 더 퇴폐적인 매력이 있더군요.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왕조현이 천년, 장만옥은 오백 년 동안 수행을 해온 자매 뱀들입니다.
일단 정체를 감추고 인간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왕조현은 우연히 마주친 순진하지만 어설픈 느낌의 허선이라는 서생을 유혹해서 가정을 꾸립니다. 처음엔 아슬아슬했지만 셋은 나름대로 잘 살아갑니다. 왕조현은 허선에게 진심이 되어가고, 장만옥은 그런 왕조현이 신기한가 봅니다. 아직 어리고 수행이 부족해서 사랑, 욕망...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던 장만옥은 허선을 유혹해 궁금증을 해소하려고도 하지만 허선이 가까스로 자제력을 발휘하고, 왕조현 역시 현명하게 대처해나가죠. 그래도 상당히 착한 뱀들이라 마을에 재해가 발생했을 때, 인간들을 도와주고 나름 인망을 쌓아갑니다.
이 영화에서의 왕조현은 경국지색, 절세미인... 어떤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역할이 역할이니만큼 천녀유혼에서의 마음을 철렁하게 하는 느낌은 없지만, 미인의 전형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더군요.
그리고 장만옥은... 사극에서의 장만옥의 매력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귀엽고, 고혹적이고, 처연하고... 말할 수 없이 다채로워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죠.
그러나 이런 매력 넘치는 요괴 뱀들과 살아가기엔, 허선은 많이 부족한 인물입니다. 왕조현은 그에게 진심이었지만, 그는 장만옥이 요청하면 왕조현 앞에서 깻잎을 한 스무 장 연속으로 떼어내 줄 것 같은 경량급 인간입니다. 도대체 왜 왕조현이 그에게 반한 것인지 원...
아무래도 여기저기 휩쓸리기 쉬운 우매한 대중들을 표현한 듯한 이 무매력 캐릭터 허선은 우연히 장만옥이 뱀으로 변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에 휩싸입니다. 반쯤 정신이 나간 그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오로지 뱀. 왕조현과 장만옥이 자신과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왕조현이 기지를 발휘해 겨우 겨우 이 순간을 모면하게 되지만, 허선의 마음속에 의혹은 남아있죠.
그러다 단오절 날, 의도치 않게 뱀에게 치명적인 술을 마시게 된 장만옥은 거대 뱀으로 변신을 하고, 이를 본 허선은 너무 놀라 간이 터져 사망하게 됩니다. 그를 되살리기 위한 조문탁이 지키던 약초를 구하러 떠난 두 자매.
수행 중이던 조문탁은 그녀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뒤를 쫓습니다. 겨우 약초를 구했지만, 장만옥은 조문탁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그를 유혹해서 위기를 벗어나려는 장만옥은 “우린 둘 다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하는 자가 과연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대사죠.
결국 조문탁은 장만옥의 유혹에 넘어가 그녀를 놓치게 되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왕조현이 약초를 통해 되살린 허선을 유혹합니다. 이렇게만 써두면 장만옥이 패륜아에 배신자처럼 오인될 수 있는데, 그녀는 언니인 왕조현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운 감정을 그녀는 애초에 인간들끼리 가지는 애정, 독점욕, 의리, 정조... 이런 감정을 알지 못하는 거죠. 그저 자신이 그 대단한 조문탁을 유혹할 수 있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자신의 언니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허선도 유혹할 수 있는가를 시험한 일종의 유희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미 인간의 감정을 모두 가지고 있던 왕조현은 그런 장만옥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허선은 다행히 장만옥의 유혹을 가까스로 뿌리치지만, 그의 아이를 가진 왕조현은 눈물을 흘리며 장만옥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눈물을 처음 보고 신기해하는 장만옥에게 왕조현은 고통의 감정을 느끼지 말고, 눈물도 흘리지 않기를 바란다며 그녀에게 자유로워지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버린다고 생각하고 마음 상한 장만옥.
한편 허선을 찾아온 조문탁은 그에게 뱀들의 정체를 밝히고 그녀들을 떠날 것은 종용합니다. 그러나 허선도 이미 그녀들에게 애정을 깊이 느끼고 있었죠. 허선은 나름의 용기를 발휘해 왕조현과 장만옥을 데리고 조문탁을 피해 떠나려 합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대결을 하게 된 조문탁과 뱀 자매. 조문탁은 허선을 납치해 강제로 수행을 시킵니다. 제발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하는 왕조현. 그런 그녀에게 조문탁은 자연의 섭리와 하늘의 도리 운운하며 인간과 요괴는 절대 맺어질 수 없다고 하죠. 그러나 장만옥은 그의 위선을 눈치채고 외칩니다. 자신이 유혹에 넘어간 것이 분해서 단지 복수를 하는 것뿐이라고 말이죠.
자, 이제부터 정말 안타까운 순간들이 이어집니다. 왕조현은 천년의 수행을 포기하고 다시 뱀이 되더라도 허선을 구하겠다는 마음뿐입니다. 허선은 허선대로 그녀들을 풀어주기만 한다면 자신이 출가를 하겠다고 사정하죠.
그러나 양측의 싸움은 점점 더 커져하고, 이로 인해 마을에 재앙급의 홍수가 발생합니다. 이 와중에 갑자기 출산을 하게 된 왕조현. 그녀는 온전한 인간 아이를 출산하게 되죠. 왕조현은 이미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탈진 상태로 출산까지 하느라 체력이 소진된 왕조현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장만옥에게 마지막으로 허선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장만옥은 그런 그녀의 청을 들어주겠다며 말하죠. “인간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 사이에 사랑은 없었어?”라고요.
영화 내내 왕조현은 자신과 장만옥은 다르다고 합니다. 단지 수행 기간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신은 인간에게 가깝고 장만옥은 뱀에 가깝다고 본 것이죠. 분명 왕조현도 장만옥을 아끼고 사랑합니다만, 그녀를 허선과 같이 동등한 인간으로 본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장만옥은 결코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본성이 뱀에 가까운 장만옥은 눈물을 흘려가며 인간의 길을 걷기보다, 자유로운 뱀의 생활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멋대로 이렇게 생각해 버린 거죠.
장만옥은 왕조현의 관심이 멀어지자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서 허선을 유혹하고,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자 했으며, 왕조현을 위해 조문탁과 승부를 벌이고, 이제는 본진으로 들어가 허선을 구해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인간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못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요.
허선을 구하러 조문탁의 사찰(이라고 쓰고 수련원이라고 읽고 싶은 곳입니다.)로 침입한 장만옥은 인간만이 가진, 뱀인 자신이 그토록 궁금해하고 가지고 싶어 하던 그 감정, 욕망, 사랑을 억지로 차단하려 애쓰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하아... 이때 장만옥의 연기는 정말이지 압권입니다. 허망함과 연민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듯한 표정, 그리고 눈물, 자신의 눈물을 의식하고 닦아내며 짓는 미소.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이 장면에서의 연기에 담겨있더군요.
가까스로 허선을 구해온 장만옥은 왕조현을 애타게 찾지만, 그녀는 아이를 출산하고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사망해버린 후입니다.
왕조현을 잃은 장만옥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왕조현이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허선을 칼로 찔러서 왕조현의 곁으로 보내버리죠. 여기에서도 연민과 슬픔이 담긴 장만옥의 표정 연기는 정말이지 최고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살생을 했다며 꾸짖는 조문탁. 어휴... 진짜 이 영화에서 조문탁의 답답함이란...
장만옥은 그와 왕조현의 전투로 인해 애꿎게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보여주며, 당신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죠. 사랑, 사랑하는데, 인간이 과연 사랑을 알고 있느냐고요.
그녀는 조문탁이 안고 있는 자신의 조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뱀이 되어 사라집니다. 마치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외면하듯이 말이죠.
인간이란 과연 인간적인 존재가 맞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들은 많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의 인간 본성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상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상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괴리감을 보통 동물이나 로봇, AI 등과의 비교를 통해 그려내곤 해왔죠. 저는 늘 이러한 주제의 영화가 흥미로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를 꼽는다면 바로 이 청사와 AI입니다. 네. 스탠리 큐브릭과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영화 사상 최고의 스씨 콤비에 의해 만들어진 그 AI입니다. 언젠가 이 영화도 리뷰를 해보고자 하는데요. 지금 생각해도, 언제 다시 봐도 이만한 명작은 없다고 생각되는 작품입니다 각설하고 AI가 인간의 비정함과 이로 인한 슬픔의 감정으로 압도하는 영화라면, 청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영화입니다.
서극 감독의 연출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허술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또 이 영화와는 잘 어울리는 느낌이에요. 연출도 스토리도 전형적이지 않기 때문에 도무지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이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장만옥과 왕조현이라는 두 걸출한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수작 이상으로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그만큼 두 배우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그녀들의 캐미 역시 엄청나게 멋집니다.
왕조현은 연기도 외모도 물이 오른 느낌이고, 장만옥의 매력은 역대급입니다. 개인적으로 첨밈밀이나 화양연화에서의 장만옥도 좋았지만, 역시 저는 시대물에서의 장만옥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청사와 신용문객잔에서의 장만옥은 홍콩과 중국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매력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각 영화마다 상대역이 왕조현, 임청하라는 거물 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장만옥만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조문탁이라는 배우는 황비홍 시리즈에 이연걸 다음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얼굴을 번듯하게 잘생겼지만 연기가 다소 딱딱한 느낌인데, 아마 융통성 없어서 일을 그르치는 캐릭터를 소화하느라 일부로 그렇게 연기한 듯합니다.
단순하지만은 않은 스토리 속에 인간의 어리석음과 사랑의 아픔을 잘 엮어서 풀어낸 수작... 그러나 거기에 장만옥과 왕조현이라는 배우가 더해져서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