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성에 비하여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듯 한 영화 블론드입니다.
높은 수위와 검증되지 않은 가십에 대한 무분별한 차용 등 애초에 마릴린 먼로에 대한 전기가 아닌, 그녀를 등장인물로 한 소설에 기반한 작품이다 보니 생긴 논쟁 같은데...
시대의 아이콘에 대한 깊은 이해와 분석 없이 그냥 포르노그라피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물론 호평도 없지는 않습니다.
상당히 감각적인 영상미, 깔끔하게 이어지는 편집 등은 마치 관객이 화보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죠
거기에 빠질 수 없는 배우의 연기.
특유의 분위기와 아우라가 너무나 독보적이라, 과연 그녀를 재현시킬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싶었던 것은 착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나 데 아르마스는 외모도, 연기도, 솜사탕 같은 분위기까지 마릴린 먼로 그 자체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묘사된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그녀의 연기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마릴린 먼로와 아나 데 아르마스라는 두 명의 배우가 영화의 안과 밖에서 짊어지고 가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먼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그보다 더 아쉬운 점은 실제 마릴린 먼로가 아닌, 그저 영화 속 주인공 마릴린의 캐릭터 설정 조차 다소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마릴린 먼로의 어린 시절, 배우가 되기 위한 고난, 채플린 주니어와의 만남, 조 디마지오, 아서 밀러, 그리고 케네디와의 에피소드로 이어집니다. 각 에피소드는 앞서 언급한 감각적인 편집에 의해 지루하지 않게 이어집니다만, 뚝뚝 끊어지는 전개는 각 관계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좀 더 그녀의 감정선을 친절하게 다루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죠.
왜 그녀는 채플린 주니어 등과의 쓰리섬 관계에 그렇게까지 빠지게 되었는지, 딱히 내켜 보이지 않았던 조 디마지오와 왜 결혼을 결심했는지, 세기의 사랑처럼 보이던 아서 밀러와 왜 파경까지 가야만 했는지... 이 모든 일에 대한 그녀의 결심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상대방의 의지에 떠밀려, 혹은 뭔가 비극적 운명의 소용돌이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렇게 ‘흘러간’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부분이 바로 마릴린 먼로라는 세기의 배우를 그냥 수동적인 피해자의 관점으로 묘사했다는 비난을 피해 가기 어려운 지점인 것 같습니다.
보통의 영화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설명이 생략된 이유는 이미 관객이 그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납득할 것이라 생각한 안일함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 영화는 마릴린 먼로의 ‘전기’가 아닌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기에, 관객에게 스토리를 납득시키는 데 있어서 실화 찬스를 사용하는 것은 좀... 그렇죠.
개인적으로 또 다른 아쉬운 점은 마릴린 먼로의 배우로서의 직업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릴린 먼로는 대단한 배우입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중 이렇게나 ‘스타’라는 표현에 걸맞은 인물이란, 마릴린 먼로와 마이클 잭슨 단 두 사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헐리웃이라는 만만치 않은 곳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그만큼 큰 성공을 거둔 유능한 사람이죠.
게다가 영화 속에서 마릴린 본인이 영화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매우 만족스럽다는 언급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치고는 자신이 등장하는 영화에 대한 태도가 너무 무성의합니다. 과연 연기에 그토록 애착을 가진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이죠. 그것도 그 유명한 ‘나이아가라’와 ‘뜨거운 것이 좋아’라는 명작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것이 영화의 실책인지, 원작의 에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캐릭터의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부에서는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정확히는 우편배달부에게 주려고 허둥지둥 지갑을 찾을 때부터,
아버지의 편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강아지를 끌어안고, 전화기를 손에 들었을 때,
죽음에 이르기 직전 잠깐 신기루처럼 지나친, 그녀가 베개를 끌어안고 웃던 때,
움직임을 멈춘 다리를 보는 순간까지요.
영화 초반부에 차 안에서 어머니에게 구타를 당하던 장면만큼 아팠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마릴린 먼로이건 아니건,
그냥 한 인간으로서
그토록 추구해왔던 것이 한낱 허상이었다는 사실에 절망한 모습이 슬펐습니다.
아이도, 아버지의 존재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줄 것 같은 사랑도요.
손에 닿을 듯이 줬다가 빼앗는 것은 가장 나쁜 것이잖아요.
그렇게나 열심히 살아왔건만..
진짜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저도 왠지 알 것 같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