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와 전자렌지에 자랑

by 이 범

주방의 고요를 깨는 소리

새벽 햇살이 부엌 창문을 살짝 비추자마자, 주방은 언제나처럼 조용한 듯했지만 사실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냄비와 전자레인지, 이 둘은 매일 아침 “누가 주방의 왕인가”를 두고 묘하게 신경전을 벌이기 때문이다.



먼저 입을 연 건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바디를 가진 냄비였다.

“흠흠. 오늘도 내가 활약할 차례겠군. 직접 불에 앉아 뜨거운 열을 견디며 사람들에게 따뜻한 국과 찌개를 제공하는 건 나뿐이지.”



그러자 전자레인지가 툭, 웃음을 흘렸다.

“아이고, 힘 좀 쓰는 친구. 누가 그렇게 옛날 방식으로 일하래? 난 3분이면 찬밥도 따끈하게 만들지. 요즘 사람들은 ‘편의성’이라고 하거든?”

냄비는 몸통을 덜덜 떨며 말했다.

“편의성? 그깟 단어에 모든 걸 맡기다니… 넌 음식의 ‘혼’이 뭔지나 아느냐?”

전자레인지는 위잉— 하고 도발하듯 회전판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혼이요? 난 그냥 전자기파로 조리해서 편하게 먹을 수 있으면 됐다고 배우고 자랐는걸?”

그리하여 또 한 번의 끝모를 자랑 대결이 시작되었다.




자존심 폭발
냄비는 평생 화력과 인내로 승부해 온 주방의 고전이자 근본이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김치찌개도, 라면도, 감자탕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자명했다.
그래서 그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나는 한 시간 넘게 끓여서 깊고 진한 맛을 내지! 넌? 삼 분짜리 데우기 기계 아닌가?”
전자레인지가 가만있을 리 없다.
“에이~ 요즘 사람들 한 시간을 어디서 기다려요. 짧고 굵고 빠른 게 효율이지. 난 살림살이 필수템이라니까.”
냄비는 발끈했다.
“효율! 효율! 요즘 사람들은 너무 성급해! 제대로 조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야.”
전자레인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너는 매번 씻기도 귀찮고, 불앞에 서 있어야 하잖아. 난 ‘띵’ 소리 나면 끝. 사람들은 앉아서 드라마 보다가도 조리가 되거든.”
이때 옆에서 주전자와 토스터, 도마가 조용히 웅성거리며 속삭였다.




“또 시작이야…”
“어제도 했잖아…”
“주방의 평화는 언제 오는 걸까…”
그러나 냄비와 전자레인지는 이미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서로가 최고라는 확신 속에, 주방은 묘한 경쟁 분위기로 뜨거워졌다.


위기의 저녁 식사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주인 가족이 바쁘게 들어오며 외쳤다.



“오늘 저녁은 급하게 해 먹어야겠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주방의 공기가 뒤바뀌었다.
주인의 선택이 누구인가—
이것이 오늘 승부의 기준이 될 것이었다.
전자레인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봐라! 급한 저녁이면 난 필승이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인이 외쳤다.
“으아—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 냄비 꺼내야지!”
전자레인지의 몸체에서 ‘윙…’ 하던 자신만만한 웅음이 갑자기 “위잉…?” 하고 약해졌다.
냄비는 뚜껑을 덜컹 올리며 잔뜩 뽐냈다.




“보았느냐. 결국 진짜 요리가 필요할 땐 나에게 돌아온다고.”
그러나 전자레인지도 완전히 밀리지 않았다.
“에헤이, 김치찌개를 만든다 해도 남은 반찬 데우기는 누구 담당이냐? 지금도 계란말이 데워달라잖아!”
주방은 갑자기 분주해졌다.
냄비는 불 위에 올려져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고,
전자레인지는 반찬 여러 개를 번갈아 데우며 “띵! 띵!” 소리를 내기 바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주전자와 도마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둘 모두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공존의 의미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주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냄비는 따뜻한 김이 남은 바닥을 식히며 말했다.
“오늘… 너도 꽤 활약했더군.”
전자레인지는 회전판이 천천히 멈추며 말했다.
“너 없었으면 오늘 김치찌개는 못 먹었지. 인정.”
둘은 잠시 어색한 침묵 후 동시에 피식 웃었다.
“사실…”
“우린…”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우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 존재였군.”
냄비는 말랐다.
“난 깊고 진한 맛으로.”
전자레인지는 이어 말했다.
“난 빠르고 편한 방식으로.”
그리고 둘은 마침내 인정했다.
“주방의 왕은… 둘 다 아니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서로 돕는 거지.”
그날 이후 주방은 훨씬 조용해졌다.



물론 가끔은 서로 슬쩍 자랑을 하며 투닥거렸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전자와 토스터는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도 예전보단 훨씬 낫다.”
“맞아. 적어도 지금은 싸우기 전에 서로 도와달라는 말 정도는 하니까.”
그리고 주방은 다시 평화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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