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신의흔적 (9)

지하철 안의 기도

by 이 범

아침의 무게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렸다.

이정민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창밖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42세, 중소기업 경리부장. 그의 아침은 언제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다.

세면을 하고 옷을 입는 동안,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는 아내 수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3개월 전부터 그녀는 침대가 아닌 소파에서 잠들곤 했다. 허리 디스크 때문이라고 했지만, 정민은 알고 있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을.




"다녀올게."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남기고 현관문을 열었다. 대답은 없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15분 동안, 정민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어제 회사에서 받은 구조조정 예비 명단. 그 안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20년을 한 회사에 바쳤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가.

대학생 딸의 등록금, 고등학생 아들의 학원비, 그리고 이번 달에 만기가 되는 대출.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실직하면 3개월을 버티기 힘들다.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7호선 안의 사람들

2호선에서 7호선으로 환승하는 건대입구역.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정민은 가까스로 칸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맞은편에 한 여대생이 서 있었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손에는 두꺼운 전공책을 들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 말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졸음과 싸우는 모습이었다.


옆에는 60대로 보이는 남성이 서 있었다. 경비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파킨슨병 초기 증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꿋꿋이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정민의 옆자리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구인구직 사이트를 보고 있었다. 이력서 작성 페이지가 화면에 가득 차 있었고, '경력단절' '육아휴직' 같은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건대입구에서 강남구청역까지, 불과 몇 정거장 사이에 정민은 문득 깨달았다. 이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이 전쟁터로 가는 병사 같다는 것을. 생존을 위한 전쟁.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전쟁. 가족을 위한 전쟁.

그리고 모두가 지쳐 있었다.



논현역을 지나면서, 갑자기 차량에 급정거가 있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앞으로 쏠렸다. 정민 앞에 서 있던 여대생이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는데, 옆에 있던 경비원 아저씨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순간 정민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도 지쳐 있고, 저 경비원도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지는 사람을 붙잡아 주는 것.

이게 뭘까.


한 통의 전화


강남역에서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순간, 정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여보."

수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떨리고 있었다.

"지금 어디야?"

"지하철. 왜?"

"병원에서 연락 왔어. 엄마가..."

순간 정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80세인 그의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셨다. 치매로 3년째 투병 중이었다.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셨대. 빨리 와야 할 것 같아."

전화를 끊고, 정민은 멍하니 서 있었다. 회사에 가야 하나, 병원으로 가야 하나.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구조조정 관련 회의. 참석하지 않으면 더 불리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손이 떨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주변의 소음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지하철의 덜컹거림, 사람들의 기침 소리,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 모든 게 그를 압박했다.



'신이시여...'

무의식 중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정민은 종교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실용적인 무신론자'였다. 신이 있다면 왜 세상이 이 모양인가,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교회나 절에 가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신'을 떠올렸다.


교대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3호선으로 갈아타면 회사로 가는 길이고, 반대 방향으로 가면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정민은 움직이지 못했다.

"손님, 괜찮으세요?"

옆에 서 있던 경비원 아저씨가 물었다. 그제야 정민은 자신의 얼굴에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할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경비원은 잠시 정민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정민의 어깨를 툭 쳤다.

"아드님,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묻는 건 아니시죠.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가슴이 답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는 내렸다.

정민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가슴이 답을 알고 있다니.

그렇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가야 한다는 것을. 회사가 어떻게 되든, 구조조정이 어떻게 되든,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라는 것을.

하지만 두려웠다. 회사를 잃는 것이. 경제적 안정을 잃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체면을 잃는 것이.

문이 닫히려는 순간, 정민은 뛰어내렸다.


반대편 승강장


반대편 승강장에서 병원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정민은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저 이정민입니다. 오늘 회의에 참석 못 할 것 같습니다. 가족 응급상황이..."

전화 너머 상사의 목소리는 차갑 했다.

"이 부장,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지? 이런 중요한 날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빠지겠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금 가벼웠다.

지하철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정민은 구석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어둠 속을 달리는 터널의 풍경이 보였다. 불빛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정민은 그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집안이 어려워졌을 때, 어머니는 새벽마다 남의 집 청소 일을 하러 나갔다. 어린 정민은 어머니가 나가는 뒷모습을 창문으로 지켜보곤 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감기에 걸려 열이 심하게 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날도 새벽에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엄마, 아파. 오늘은 쉬어."

어린 정민이 말했다.

어머니는 정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엄마는 네가 있어서 힘이 나. 너를 생각하면 어떤 것도 할 수 있어."

그날 밤, 어머니는 폐렴으로 쓰러졌다. 일주일간 입원했다. 그 일주일의 병원비와 일을 못 한 손실 때문에 집안은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퇴원하자마자 다시 일을 시작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아버지가 물었다.

"가족이니까."

어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제 정민이 이해했다. 그때 어머니가 느꼈을 것을.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었다.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은 어디서 오는 걸까.


병실의 빛


병원에 도착했을 때, 수진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안정됐어. 위급한 상태는 넘겼어."


정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병실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계셨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은 떠 계셨다.


"엄마."


정민이 다가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의 손은 너무 작고 가늘었다. 이렇게 작은 손으로 가족을 지켜왔다니.


어머니는 정민을 바라보았다. 치매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지 오래였지만, 그 눈빛에는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있었다.


"엄마, 저예요. 정민이."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민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정민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참고 참았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회사에서의 압박, 경제적 불안,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

"엄마, 저... 잘하고 있는 거 맞아요? 가장으로서, 아들로서, 제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요?"

어머니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은 정민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수진이 다가와 정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신, 회의는?"


"못 갔어."


"그럼 회사에서..."


"아마 구조조정 1순위가 됐겠지."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


정민이 말했다.


"왜?"


"이렇게 무능해서. 가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수진은 정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왔어. 아니, 최선을 다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하지만..."


"나도 이번 달에 파트타임 일 구했어. 허리는 아프지만, 할 수 있어. 우리 같이 하는 거야. 당신 혼자가 아니야."


정민은 아내를 바라보았다. 20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 순간만큼 그녀가 아름답게 보인 적이 없었다.


"애들한테도 얘기했어. 상황을. 다희가 알바 구했대. 아르바이트하면서 학교 다닐 수 있다고. 준호도 학원 몇 개 끊겠대."


"그럴 순 없어. 애들 공부는..."


"우리 가족이잖아. 같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거야. 그게 가족이고."

그때, 어머니가 작은 소리를 냈다. 정민과 수진이 동시에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는 미소 짓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미소였다.

"엄마..."

정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상했다. 회사에서 구조조정 명단에 올랐고, 중요한 회의를 빠졌고, 앞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게 뻔한데, 지금 이 순간 정민은 평화로움을 느꼈다.


왜일까.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병실을 환하게 비추는 빛. 정민은 그 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신은 어쩌면 거창한 기적으로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번개나 천둥으로, 극적인 계시로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런 순간에 온다.


지하철에서 떨리는 손으로 넘어지는 사람을 붙잡아 주는 경비원의 손에서.


"가슴이 답을 알고 있다"라고 말해주는 낯선 이의 한마디에서.


어려운 시기를 함께 나누겠다는 아내의 결심에서.


알바를 하겠다는 딸의 헌신에서.


학원을 포기하겠다는 아들의 성숙함에서.


그리고 치매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어머니의 그 작은 손에서.


신은 이미 여기 계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랑과 사랑 사이에서.


희생과 헌신 사이에서.


## 에필로그 - 다시 지하철에서


일주일 후, 정민은 다시 7호선을 타고 있었다. 예상대로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고, 3개월 후 퇴직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무겁지 않았다.


수진은 동네 베이커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출근해야 했지만, 그녀는 행복해했다. "빵 굽는 냄새가 좋아"라고 했다.


딸 다희는 주말마다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아빠, 라테 아트 배웠어. 나중에 해줄게"라며 웃었다.


아들 준호는 학원 세 곳을 끊고 독학으로 공부하기로 했다. "이게 더 제대로 공부하는 거 같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회복하셨다. 여전히 치매는 진행되고 있었지만, 생명은 유지되고 있었다.


지하철이 덜컹거리며 달렸다. 정민의 맞은편에 지난번 그 여대생이 서 있었다. 이번에도 전공책을 들고 있었지만, 표정이 조금 달라 보였다. 덜 지쳐 보였다.


그리고 그때, 지하철이 급정거했다. 여대생이 휘청거렸다.


정민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 하지만 그 순간, 정민은 느꼈다.


이것이다.


이것이 신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이다.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 주는 것.


넘어지려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


함께 무게를 나눠지는 것.


지하철은 계속 달렸다. 어둠 속 터널을 빠져나가면 또 밝은 역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둠이 올 것이고, 또 빛이 올 것이다.


삶도 그랬다.


어둠과 빛의 반복.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누군가의 떨리는 손이 우리를 붙잡아 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도 누군가를 붙잡을 수 있다는 것.


정민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터널의 불빛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나하나의 불빛은 작았지만, 그것들이 모여 길을 밝히고 있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 주셔서. 그리고 제가 누군가에게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지하철은 다음 역으로 향했다.


정민의 하루는 계속되었다.


평범하지만 기적 같은 하루가.


**작가의 말**

우리는 종종 신의 존재를 거창한 기적에서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진짜 기적은 일상에 있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넘어지는 사람을 붙잡아 주는 손, 어려운 시기를 함께 나누겠다는 가족의 결심, 낯선 이의 따뜻한 한마디. 이 모든 것이 신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증거입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신은 우리 옆 사람의 손을 통해, 가족의 사랑을 통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양심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월, 화, 수,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