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에서
이산갑은 집으로 돌아와 족보 책을 꺼내 보며 중시조 할아버지 이야기와 시제때 어르신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생각해 본다.
족보책 사이로 그분들의 모습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중시조 이민호와 윤서영의 만남에 대한 모습이었다.
오위도총부의 젊은 무관
1810년 봄, 한양 훈련원.
스물두 살의 이민호(李敏鎬)는 장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키가 팔척 장신에 어깨가 넓고, 눈빛이 매서웠다.
"이 부총관, 오늘도 무예 연마하시는군요."
동료 무관이 감탄했다.
"무인이라면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오."
이민호가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는 함평 이씨 가문의 후예로, 시조 함평부원군 이언(李彦)의 피를 이어받았다. 함평 이씨는 본래 문과 집안이었지만, 이민호는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뛰어나 무과를 선택했다.
1808년, 스물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그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조선의 중앙 군사 조직을 총괄하는 오위도총부에서 젊은 나이에 부총관이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부총관은 올곧고 강직하다더군."
"그래, 상관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직언한다지."
이민호의 성격은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관철시켰고, 그른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냉정함이 서려 있었다.
“이 부총관, 오늘도 무예를 놓지 않으시는군요.”
동료 무관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이민호는 창을 세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은 하루라도 몸과 마음을 쉬게 해서는 아니 되오.
武者一日不鍊 則心亦鈍也.”
그는 함평 이씨 가문의 후예였다. 시조 함평부원군 이언(李彦) 이래로 문과 급제가 끊이지 않았던 집안. 그러나 이민호는 글보다 칼을 택했다. 이는 출세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군정(軍政)이 문란해지는 시대에, 그는 창끝에서 조선을 지키고자 했다.
1808년, 스무 살의 나이로 무과 급제.
그리고 이례적으로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젊으나 사사로움이 없고,
淸廉剛直하여 사사로이 웃지 않는다.”
그에 대한 평판은 이미 한양 곳곳에 퍼져 있었다.
균열의 냄새
그해 여름, 오위도총부에 미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군량미가 장부와 맞지 않는다는 보고였다.
“단순한 착오일 것이오.”
상관인 도총관 윤치겸이 말을 흐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장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수량은 맞았으나, 배분된 지역과 날짜가 어긋나 있었다. 군졸들이 굶주렸다는 보고가 뒤따랐다.
“부총관, 이쯤에서 덮는 것이 좋겠네.”
윤치겸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에는 대신가(大臣家)가 얽혀 있네.”
이민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군량은 백성의 피요, 군사의 목숨입니다.
軍糧不正 則國不可守.
덮으라 하신다면, 그것은 명이 아니라 죄입니다.”
그날 이후, 이민호는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
훈련원 안에서는 그의 발언이 ‘젊은 혈기의 오만’이라 수군거려졌고, 밤에는 낯선 그림자가 그의 집 앞을 서성였다.
어머니는 조심스레 말했다.
“민호야, 바람이 거셀수록 나무는 휘어야 한다 하지 않느냐.”
이민호는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나무가 휘어 살더라도 뿌리가 썩으면 쓰러집니다.
아들은 부러질지언정 썩지는 않겠습니다.”
결국 사건은 터졌다.
군량미 일부가 권문세가의 창고로 흘러들어간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조정은 침묵했다.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이민호는 결단했다.
그는 밤을 새워 상소를 썼다.
붓끝은 떨렸으나 문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臣聞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신이 듣건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그는 실명을 적었다.
윤치겸,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대신의 이름까지.
상소가 올라간 날, 그는 곧바로 파직되었다.
“상관을 모함하고 조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밤길에서 습격을 받았다.
칼이 어깨를 갈랐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순간, 그는 창을 붙잡았다.
“義在此身 死亦何懼.”
창끝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습격자들은 물러났으나, 그는 끝내 의식을 잃었다.
이민호가 깨어났을 때, 소식은 이미 퍼져 있었다.
상소의 내용이 사헌부를 거쳐 순조에게 전해진 것이다.
젊은 무관의 피 묻은 상소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다.
대신은 파직되었고, 군량 횡령은 엄벌에 처해졌다.
순조는 말했다 한다.
“한 젊은 무관이 조정의 거울이 되었도다.”
이민호는 관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벼슬을 사양했다.
“신은 이미 해야 할 말을 다했습니다.
벼슬은 신의 뜻이 아니라 나라의 뜻이어야 합니다.”
그는 훈련원으로 돌아가 군졸들을 가르쳤다.
이름 없는 무관으로 남았으나, 그의 가르침은 오래 남았다.
사람들은 훗날 그를 이렇게 불렀다.
“창으로 벼슬하지 않고, 뜻으로 나라를 지킨 사내.”
1810년 봄, 한양 훈련원의 바람은 여전히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는, 한 이름이 묵묵히 서 있었다.
이민호(李敏鎬).
청렴은 그의 갑옷이었고, 강직은 그의 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