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살아야 100년인것을 (82) 변명의 예술

우선순위

by 이 범


변명의 예술
Q: 왜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라고 말할까요?
A: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입니다. 해법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어"라고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정직함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2025년 3월, 서울 강남의 한 스타트업 사무실. 오후 7시가 넘었지만 불은 여전히 환하게 켜져 있었다.
"재훈아, 오늘도 야근?"
팀장 성민이 물었다. 재훈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이번 주까지 끝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그래? 힘내. 커피 한 잔 사줄까?"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민이 나가고, 재훈은 한숨을 쉬었다. 책상 옆에 놓인 휴대폰이 불빛을 냈다. 어머니의 전화였다. 재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문자를 보냈다.
"엄마, 지금 회의 중이에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거짓말이었다. 회의는 없었다. 하지만 재훈에게는 항상 '나중에'가 있었다.
재훈은 34살, IT 기업의 프로젝트 매니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0년째 이 일을 하고 있었다. 연봉은 괜찮았고, 직급도 올랐고, 커리어도 순탄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재훈은 SNS를 스크롤했다. 대학 동기 현우의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현우는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1년째 세계 여행 중이었다. 사진 속 현우는 페루 마추픽추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부럽네...'
재훈은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나는 시간도 없고, 돈도 모아야 하고. 현우는 독신이라서 가능한 거지.'
집에 도착한 건 밤 11시였다. 작은 원룸.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중간 상태. 재훈은 배달 앱을 열었다. 냉장고에는 김치와 계란뿐이었다.
'내일 장 봐야지.'
이 생각을 한 게 벌써 2주째였다.
다음날 아침, 재훈은 6시 30분에 일어났다. 헬스장에 가려던 계획이었다. 작년 설날에 세운 목표였다. 1년 회원권을 끊었지만, 지난 두 달간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오늘은 가야지.'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밤사이 온 업무 메일이 열다섯 통. 그중 세 통은 긴급이었다.
'아, 이거 처리하고 가야겠다.'
결국 재훈은 집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헬스장은 또 다음으로 미뤄졌다.
오전 10시, 회사 회의실.
"재훈 씨, 지난번에 부탁한 자기계발서 추천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재훈 씨 독서광이시잖아요."
후배 지수가 물었다. 재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에이, 그래도 재훈 선배 항상 책 얘기하시잖아요."
"그게... 예전 얘기고. 요즘은 진짜 시간이 없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재훈의 침대 옆에는 읽지 않은 책이 다섯 권 쌓여 있었다. 하지만 매일 밤 그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봤다. 한 시간, 두 시간, 때로는 세 시간씩.
점심시간, 재훈은 동기 민지와 식당에서 만났다.
"재훈아, 너 얼굴 안 좋다. 피곤해?"
"응, 요즘 일이 좀 많아서."
"그래도 건강은 챙겨야지. 너 아직도 운동 안 해?"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너도 알잖아, 우리 회사 얼마나 바쁜지."
민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같은 업계인데,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운동해.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거지."
"쉽게 말하네. 너는 혼자 살잖아. 나는..."
"너도 혼자 사는데?"
재훈은 입을 다물었다. 변명이 막혔다.
저녁, 어머니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재훈아, 이번 주말에 집에 올 수 있어? 아빠 생신이잖아."
"엄마, 이번 주말은 힘들 것 같아. 회사에서 프로젝트가..."
"프로젝트는 항상 있더라. 아빠 생신이 1년에 몇 번이나 오니?"
"그래도 지금 정말 바빠서. 다음에 갈게."
"다음은 또 언제니? 작년 설날에도 못 왔고, 추석에도 못 왔고..."
"엄마, 나 지금 미팅 들어가야 해.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재훈은 전화를 끊었다. 미팅은 없었다. 그는 그저 대화를 끝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재훈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하지만 곧 그 생각도 지웠다. 내일 또 바쁠 테니까. 생각할 시간이 없으니까.

주말이 되었다. 재훈은 늦잠을 잤다. 오전 11시에 일어나 침대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해야 할 일 목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헬스장 가기
책 읽기
부모님께 전화하기
밀린 빨래하기
장 보기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재훈은 유튜브를 켰다. '나중에' 하면 되니까.
오후 3시, 배가 고파서야 재훈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달 앱을 열려다가, 문득 현우가 생각났다. 그가 여행 가기 전, 작별 인사 겸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재훈아, 나 드디어 떠난다."
"부럽다, 진짜. 나도 여행 가고 싶은데."
"그럼 가면 되지. 너도 돈 좀 모았잖아."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어. 그리고 지금 회사 그만두면..."
현우가 재훈의 말을 끊었다.
"재훈아, 솔직히 말할게. 너 시간 없는 거 아니야."
"뭐?"
"너는 우선순위가 여행이 아닌 거야. 시간은 핑계고."
재훈은 화가 났다.
"쉽게 말하네. 너는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까 그런 말 하는 거지."
"아니, 재훈아. 나도 무섭고 불안해. 하지만 나는 선택한 거야. 지금 여행이 내게 더 중요하다고. 너는 아직 선택 안 한 거고."
그날 둘은 조금 어색하게 헤어졌다. 재훈은 현우의 말이 기분 나빴다.
하지만 지금, 혼자 원룸에 앉아 있는 재훈은 현우의 말을 떠올렸다.
'우선순위...'
재훈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봤다. 대학 시절, 그는 정말 책을 많이 읽었다. 한 달에 열 권씩. 문학, 철학, 심리학... 친구들은 재훈을 '독서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1년간 완독한 책이 단 두 권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아니면...'
재훈은 휴대폰을 열어 스크린 타임을 확인했다. 일주일 평균: 하루 5시간 32분. 대부분 유튜브와 SNS였다.
그는 손이 떨렸다.
'나는... 시간이 없는 게 아니었어.'
월요일 아침, 재훈은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동료들이 하나둘 들어올 때쯤, 그는 이미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오, 재훈 씨 일찍 오셨네요?"
"네, 오늘 일찍 끝내고 싶어서요."
그날, 재훈은 정시에 퇴근했다. 10년 만에 처음이었다. 팀장 성민이 놀라 물었다.
"재훈아, 어디 약속 있어?"
"아뇨, 그냥... 할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
"운동 하러 가려고요."
성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훈은 헬스장으로 향했다. 2개월 만이었다. 트레이너가 반갑게 맞았다.
"재훈 님!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된 거예요?"
"죄송해요. 시간이 없어서..."
재훈은 말하다 멈췄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우선순위가 아니었어요. 운동이."
트레이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분 처음이에요. 보통 다들 시간 없다, 바쁘다, 그러는데."
"이제 바꾸려고요. 우선순위를."
운동은 힘들었다. 2개월의 공백이 컸다. 하지만 재훈은 웃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며, 그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훈은 서점에 들렀다. 오랜만이었다. 그는 천천히 서가를 둘러보며 책을 골랐다. 소설 한 권, 에세이 한 권.
계산대에서 직원이 물었다.
"북클럽 회원이신가요?"
"아니요."
"가입하시면 할인 혜택이..."
"가입할게요."
집에 돌아와, 재훈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평소라면 유튜브를 켰겠지만, 오늘은 책을 펼쳤다.
30분쯤 읽었을까. 재훈은 책을 덮고 미소 지었다.
'이 느낌...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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