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살아야 100년인것을 (81)세곳방문

비를피해 작은카패로

by 이 범

둘째 날 아침, 민준은 일찍 일어나 일정을 확인했다. 오늘은 돌산대교, 해양공원, 그리고 유명한 카페 세 곳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수아야, 일어나. 오늘 갈 데가 많아."
수아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젯밤 잠을 설쳤다. 민준이 새벽까지 어제 찍은 사진들을 편집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음속에 쌓이는 무언가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오빠, 오늘은 좀 천천히 다닐 수 없어?"
"천천히? 우리 2박 3일밖에 없잖아. 시간 아까워."
아침 9시, 두 사람은 숙소를 나섰다. 민준은 첫 목적지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어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수아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수의 아침 풍경이 평화로웠다. 출근하는 사람들, 가게 문을 여는 상인들, 학교에 가는 아이들...
"오빠."
"응?"
"우리... 여행 온 건 맞지?"
"그럼, 당연하지. 왜?"
수아는 말하려다 멈췄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진만 찍고 있어서 여행이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면 민준이 섭섭해할까 봐 걱정됐다.
돌산대교에 도착했을 때,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 날씨가... 사진이 별로겠는데."
민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수아는 그런 민준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날씨가 흐려도 괜찮잖아. 우리 그냥 걸으면서 얘기하면 안 돼?"
"얘기?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여기는 지금 아니면 언제 와."
바로 그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빗방울들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곧 굵은 비로 변했다.
"아, 진짜!"
민준은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두 사람은 급히 근처 카페로 뛰어들었다.
카페는 바다가 보이는 작은 곳이었다. 빈티지한 인테리어에 재즈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빗줄기가 보였다.
수아는 창가 자리에 앉으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민준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날씨 앱을 확인하고 있었다.
"한 시간은 와야 하는데..."
"오빠."
수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무슨 얘기?"
수아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천천히 말했다.
"오빠, 이번 여행... 즐거워?"
"당연하지. 너는?"
"나는..." 수아는 잠시 망설였다. "잘 모르겠어."
민준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이렇게 좋은 데 와서..."
"오빠, 우리 진짜 여행하고 있는 거 맞아? 아니면 사진 찍으러 온 거야?"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수아가 계속 말했다.
"오빠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을 봐. 내 옆에 있는데, 내가 뭐라고 말해도 제대로 안 들어. 어제 갈매기 얘기한 거 기억해? 오빠는 대답도 안 했어. 케이블카에서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오빠는 몰랐을 거야."
"수아야, 나는 그냥 예쁜 추억을 남기고 싶었던 거야."
"추억은 사진 속에만 있는 게 아니야, 오빠."
수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오빠랑 함께 그 순간을 느끼고 싶었어. 바다를 보면서 '아, 예쁘다' 하고 같이 감탄하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맛있다' 하고 웃고... 그런 게 여행 아니야? 근데 우리는 계속 사진만 찍었어. 사진 찍는 순간조차도 오빠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화면을 봤어."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아의 말이 가슴에 꽂혔다.
"나도 사진 찍는 거 싫어하는 건 아니야. 근데 오빠, 우리 어제 진짜 대화 몇 마디나 했어? '여기 봐', '포즈 취해', '한 장만 더'... 이런 말만 백 번도 더 들었어."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페 안은 고요했다. 재즈 피아노 소리만 흐르고 있었다.
민준은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어제 찍은 사진들을 스크롤했다. 수백 장의 사진이 있었다. 모두 예쁘게 나왔다. 수아의 미소도, 풍경도, 음식도 완벽했다.
하지만 민준은 깨달았다. 그 사진들 속의 수아가 진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미소는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수아야, 미안해."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정말... 정말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어. 너랑의 첫 여행이잖아. 그래서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오빠, 완벽한 사진이 아니라 완벽한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나한테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창밖의 비를 바라봤다.
결(結)
비는 한 시간쯤 지나서 그쳤다. 하늘이 조금씩 개기 시작했다.
민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아야."
"응."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
수아는 민준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뭘?"
"제대로 된 여행. 너랑 함께하는."
수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휴대폰은?"
민준은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지웠다. 수아가 놀라 물었다.
"오빠,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아니, 해야 돼. 나한테 이게 필요해. 안 그러면 또 찍게 될 것 같아서."
수아가 웃었다. 이틀 만에 처음 보는 진짜 웃음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딱 하루에 한 장만. 우리 둘이 함께 셀카로. 그것도 타이머 맞춰놓고 찍는 거. 그렇게 하면 돼?"
민준도 웃었다.
"좋아."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섰다. 비가 그친 후의 여수는 더 맑고 아름다웠다. 공기도 신선했다.
"오빠, 우리 어디 갈까?"
"잘 모르겠는데. 그냥 걷고 싶은 대로 걸을까?"
"좋아."
그들은 계획 없이 걷기 시작했다. 해변을 따라, 작은 골목을 지나, 이름 모를 공원으로. 민준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고, 수아는 그의 팔짱을 꼈다.
"오빠, 바람 진짜 시원하다."
"그러게."
"저기 봐, 무지개!"
정말로 하늘에 희미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두 사람은 멈춰 서서 그것을 바라봤다.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봤다. 함께.
"예쁘다..." 수아가 중얼거렸다.
"응, 진짜 예쁘다."
이번에는 민준도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무지개를, 그리고 무지개를 보며 감탄하는 수아를.
그들은 우연히 발견한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관광객이 없는, 현지인들이 가는 곳이었다. 메뉴판도 낡았고, 인테리어도 평범했다. 하지만 음식은 맛있었다.
"오빠, 이거 진짜 맛있다!"
"그치? 이런 데가 진짜 맛집이야."
두 사람은 뜨거울 때 음식을 먹었다. 사진 찍느라 식히지 않았다. 그냥 먹으며 이야기했다. 회사 얘기, 친구들 얘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얘기...
"수아야, 나 요즘 생각이 있는데."
"무슨?"
"퇴사."
수아가 놀라 젓가락을 멈췄다.
"진심이야?"
"응. 너무 오래 고민했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찾고 싶어."
"언제부터 생각했어?"
"한... 두 달?"
"왜 이제 말해?"
민준이 웃었다.
"우리 제대로 대화한 게 오늘이 처음이잖아. 최근 들어서."
수아도 웃었다. 슬프면서도 웃긴 진실이었다.
"오빠, 나도 사실..."
"너도?"
"나도 고민 중이야. 내가 디자인하고 싶은 게 이게 아닌 것 같아서."
"그럼 우리 둘 다 인생의 전환점이네."
"그러게."
그들은 손을 맞잡았다. 테이블 위에서, 사진 없이.
저녁이 되자 두 사람은 바닷가로 나갔다. 해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파도 소리만 들렸다.
"오빠, 우리 그냥 여기 앉아 있자."
"응."
그들은 모래사장에 앉아 일몰을 기다렸다.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주황색, 분홍색, 보라색이 섞여서 환상적인 색을 만들었다.
"와..."
수아가 감탄했다. 민준도 말없이 바라봤다.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하늘의 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오빠."
"응."
"지금 이 순간, 완벽해."
민준은 수아를 바라봤다. 석양 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이 아름다웠다. 그는 순간적으로 휴대폰에 손이 갔지만, 멈췄다.
'아니야. 이건 찍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하는 거야.'
그는 대신 수아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해가 완전히 지고, 하늘에 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없이, 하지만 함께.
"수아야."
"응?"
"오늘 사진 찍을 시간인데."
"아, 맞다!"
수아가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들은 셀프카메라를 켰다. 타이머를 10초로 맞추고, 모래 위에 세웠다.
"자, 가자!"
두 사람은 서둘러 제자리로 달려가 앉았다. 어깨를 맞대고, 손을 잡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삑!
사진이 찍혔다. 그들은 사진을 확인했다. 배경은 어두웠고, 얼굴도 잘 안 보였다. 구도도 엉망이었다.
"오빠, 이거 완전 망했는데?" 수아가 웃었다.
"그러게. 완전 못 찍었네."
"다시 찍을까?"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게 좋아. 이게 우리의 진짜 모습이잖아."
수아는 민준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오빠, 많이 달라졌다?"
"응. 너 덕분에."
마지막 날 아침, 두 사람은 천천히 일어났다. 서두르지 않았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여유롭게 짐을 챙기고, 숙소 근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오빠, 오늘 뭐 할까?"
"글쎄. 특별히 계획은 없는데."
"그럼 그냥 역 가는 길에 걸으면서 가자. 천천히."
"좋아."
그들은 캐리어를 끌며 여수 시내를 천천히 걸었다. 작은 서점에 들어가 책도 구경하고, 빵집에서 따뜻한 빵도 사먹고,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오빠, 저 아이 봐. 비눗방울 날리고 있어."
"귀엽네."
"우리도 저랬겠지?"
"당연하지."
그들은 그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급하지 않았다. 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순간, 그 순간을 느꼈다.
역에 도착했을 때, 민준이 말했다.
"수아야."
"응?"
"고마워."
"뭐가?"
"나를 깨워줘서.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려줘서."
수아가 미소 지었다.
"나도 고마워, 오빠. 변하려고 노력해줘서."
열차에 오르기 전,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여수를 바라봤다.
"오빠, 다음에 또 올까?"
"응. 꼭."
"그때는 사진 좀 찍어도 돼?"
민준이 웃었다.
"당연하지. 근데 우리가 정말 찍고 싶을 때만. 그리고 찍은 다음에는 바로 순간으로 돌아오는 거. 약속."
"약속."
열차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여수의 풍경이 뒤로 흘러갔다. 민준은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수아의 손을 잡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오빠."
"응?"
"이번 여행, 정말 좋았어."
"나도."
수아는 민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민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들의 갤러리에는 이번 여행 사진이 딱 세 장만 있었다. 모두 구도도 엉망이고, 빛도 별로였다. 하지만 세 장 모두에서 두 사람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수백 개의 순간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무지개를 함께 본 순간, 뜨거운 음식을 먹으며 웃던 순간, 석양을 말없이 바라보던 순간, 손을 꼭 잡고 걷던 순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하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들.
민준은 깨달았다. 최고의 기억은 정말로 마음에 저장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기억을 만들기 위해서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 순간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는 것을.
"수아야."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오빠."
열차는 서울을 향해 달렸다. 두 사람은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번 여행에서 그들이 얻은 건 인스타그램에 올릴 완벽한 사진이 아니었다. 함께 느낀 진짜 순간들, 그리고 서로를 다시 발견한 시간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 전부였다.
두 달 뒤, 민준과 수아는 함께 퇴사했다. 그들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민준은 작은 스타트업을 준비했고, 수아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딛었다.
불안했지만, 두렵지 않았다. 여수에서 배운 것처럼, 중요한 건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그 순간을 함께 느끼고, 서로를 믿는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어느 토요일 아침, 수아가 민준에게 물었다.
"오빠, 주말에 뭐 할까?"
"글쎄. 특별한 계획 없는데."
"그럼 그냥 동네 산책할까?"
"좋지."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휴대폰은 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그들은 동네 공원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웃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조용히 걷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민준이 말했다.
"야, 우리 사진 한 장 찍을까?"
"응, 좋아."
이번에는 수아도, 민준도 즐거웠다. 사진은 그들의 순간을 빼앗는 게 아니라, 그저 작은 기념품이었으니까.
사진을 찍고, 그들은 다시 대화로 돌아왔다. 순간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가기로 했다.
셔터 너머가 아니라, 셔터 앞에서.
화면 속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기록하는 삶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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