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海棠花, Rosa rugosa)(1)

바다의 장미

by 이 범


파도 너머의 기억
2026년 5월, 강원도 강릉 경포대 해변.
"이번 국제 장미 박람회에는 프랑스의 다마스크 로즈, 영국의 잉글리시 로즈, 불가리아의 로사 다마스케나 등 세계 명품 장미들이 대거 참여합니다. 한국관은..."
리포터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목소리가 묻혔다. 해변의 모래언덕 위에는 분홍빛 해당화가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예전만 못했다. 개발과 외래종 장미 재배로 인해 토종 해당화 군락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쯧쯧, 우리가 이렇게 무시당할 줄이야."
모래언덕 끝자락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30대 중반의 모습,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는 짙은 갈색이었고, 분홍빛이 도는 한복 치마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녀의 이름은 해당(海棠), 해당화의 정령이었다.
"천 년을 이 바닷가를 지켜왔건만, 이제는 '촌스럽다', '가시가 많다'는 이유로 외면받는구나."
해당의 손에는 붉은 장미 열매, 즉 해당화 열매가 들려 있었다. 이것은 식용으로도, 약용으로도 쓰이는 귀한 것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 가치를 몰랐다.
"선배님!"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것은 젊은 남성이었다. 푸른색 도포에 은빛 띠를 두른 그는 함초(鹹草), 갯벌의 약초 정령이었다.
"큰일났습니다. 서양 장미 정령들이 제주도와 동해안 전역을 점령하려 합니다. 그들은 우리 해당화를 '원시적인 야생 장미'라며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자신들만이 진정한 장미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해당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원시적이라고? 흥,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는가."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발밑의 모래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우리 해당화가 이 땅에 뿌리내린 것이 얼마인데. 신라 화랑들이 이 꽃으로 관을 만들었고, 고려 시인들이 이 꽃을 노래했으며, 조선의 선비들이 이 꽃의 기개를 칭송했다."
"알려주지. 진정한 장미가 무엇인지."


장미의 진실
이틀 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 국제 장미 박람회장.
거대한 전시장은 온갖 장미로 가득했다. 붉은 장미, 흰 장미, 노란 장미, 심지어 파란색과 무지개색 장미까지. 각국 부스에서는 자국의 장미를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프랑스관입니다! 우리의 다마스크 로즈는 향수의 여왕이죠. 샤넬 No.5의 주원료입니다!"
"영국관을 보세요! 데이비드 오스틴의 잉글리시 로즈, 빅토리아 여왕이 사랑한 꽃입니다!"
"불가리아 로즈 오일은 1kg에 천만원! 세계 최고급 화장품 원료입니다!"
그 틈에 초라하게 자리한 한국관. 담당자는 고개를 숙인 채 몇 송이 해당화 앞에 서 있었다. 방문객들은 대부분 그냥 지나쳤다.
"에이, 이게 장미야? 그냥 들꽃 아니야?"
"가시도 엄청 많네. 위험해 보여."
그때, 전시장 중앙에서 화려한 조명이 켜졌다. 단상에 오른 것은 프랑스 장미 정령 로제타(Rosetta)였다. 빨간 벨벳 드레스에 금발 머리를 높이 올린 그녀는 우아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신사 숙녀 여러분, 장미의 역사를 아십니까? 고대 로마 시대부터 장미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장미꽃잎 침대에서 잠들었고, 나폴레옹은 조세핀 황후를 위해 전 세계의 장미를 수집했죠."
로제타의 옆에 영국 장미 정령 엘리자베스(Elizabeth)가 섰다. 하얀 레이스 드레스의 우아한 여성이었다.
"장미는 왕실의 상징입니다. 영국 왕실의 문장에는 튜더 로즈가 새겨져 있죠. 장미는 고귀함, 권위, 완벽함을 의미합니다."
관객들이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그런데..."
로제타가 한국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것은 뭡니까? 해당화라고요? 그건 장미가 아니라 그냥 야생 덩굴에 불과합니다. 가시투성이에 향도 약하고, 꽃도 단순하죠. 진정한 장미의 품격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국관 담당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전시장 입구가 활짝 열렸다.
"잠깐."
차분하지만 강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당이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분홍빛 한복이 아닌, 현대적인 하늘색 한복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해당화 꽃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손에는 붉은 해당화 열매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로제타가 당황했다.
"나는 해당. 해당화의 정령이다."
전시장이 술렁였다. 해당이 천천히 단상으로 걸어갔다.
"내가 야생 덩굴이라고? 품격이 없다고?"
해당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천 년의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로제타, 엘리자베스. 너희는 장미의 역사를 말했지. 그럼 내가 진짜 역사를 알려주지."
해당이 손을 들자, 전시장 전체가 순간 바닷가로 변했다. 홀로그램 같은 환영이 펼쳐진 것이다.
"기원전 5000년 전,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이미 야생 장미가 자생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해당화의 조상이다. 서양 장미들이 교배되고 개량되는 동안, 우리는 자연 그대로의 강인함을 유지했다."
장면이 바뀌었다. 신라 시대 화랑들이 해당화 관을 쓰고 수련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신라 화랑들은 해당화를 '바다의 기개'라 불렀다. 거센 파도와 바닷바람을 견디는 이 꽃의 강인함을 본받고자 했지."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고려 시대 문인이 해당화를 보며 시를 짓고 있었다.
"고려 시대 이규보는 '바닷가 해당화여, 그대의 향기는 소박하나 진실하도다'라고 노래했다. 화려함보다 진실을, 인공미보다 자연미를 사랑한 우리 선조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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