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탐험 (3)

익선동시간을 품은 골목의 변주곡

by seungbum lee

새로운 발걸음
"다음은 익선동 어때?"
3월의 어느 저녁,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민수가 제안했다. 을지로, 후암동, 성북동을 거쳐 온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도 어느덧 네 번째를 맞이했다.
"익선동? 거기 요즘 엄청 핫하다던데. 젊은 애들 천지라며."
지혜가 약간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30대 후반인 두 사람에게 '힙한 동네'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옥마을이잖아. 1920년대부터 있던 곳이고. 우리가 좋아하는 오래된 골목이기도 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들어선 곳이라 재미있을 것 같은데."
민수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걸었던 곳들은 대부분 사라져가는 과거였다면, 익선동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럼 이번엔 우리 둘이만 갈까? 애들은 할머니 댁에 보내고."
"좋지. 오랜만에 데이트 겸."
그렇게 결정된 토요일 오전, 두 사람은 종로3가역에서 만났다. 4번 출구로 나오자 바로 익선동 골목 입구가 보였다.
"우와, 사람 진짜 많다."
아직 11시도 안 됐는데 골목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을지로의 작업복 차림 아저씨들도, 후암동의 동네 주민들도, 성북동의 고즈넉한 산책객들도 아닌,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한옥은 한옥이네."
좁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분명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기와지붕, 낮은 처마, 나무 대문. 하지만 그 안에는 세련된 간판과 현대적인 인테리어가 숨어 있었다.
"어디부터 갈까?"
지혜가 미리 검색해온 정보를 확인했다.
"일단 배가 고프니까 브런치 먹을 곳 찾자. '동백양과점' 어때? 수플레 팬케이크가 유명하대."
"좋아. 가보자."

골목 속의 새로운 세계
동백양과점은 골목 안쪽에 자리한 한옥 카페였다. 입구에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과 나무 향기가 감돌았다. 다행히 아직 자리가 있었다.
"여기 수플레 팬케이크 세트 두 개요."
주문을 하고 마당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작은 마당에는 항아리와 나무가 놓여 있었고, 한옥의 정취가 살아 있었다.
"신기하다. 밖은 완전 카페 거리인데, 안으로 들어오니까 조용하고 차분해."
민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옥의 구조를 그대로 살리되, 테이블과 의자, 조명만 현대적으로 바꾼 공간이었다.
"익선동이 원래 1920년대에 만들어진 한옥마을이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 중 하나고."
지혜가 검색한 정보를 읽어줬다.
"그럼 100년 된 건물들이네. 그런데 이렇게 새롭게 변신한 거고."
팬케이크가 나왔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맛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브런치를 즐기며 대화를 나눴다.
"여보, 생각해보니까 익선동이 우리가 지금까지 간 곳들이랑 다른 점이 뭔지 알아?"
지혜가 물었다.
"응?"
"을지로, 후암동, 성북동은 다 과거를 간직한 곳이었잖아. 사라져가거나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근데 익선동은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걸 만들어낸 거야."
"맞네. 한옥은 그대로인데, 그 안에 들어간 게 완전히 달라졌어. 100년 된 건물에서 수플레 팬케이크를 먹는다는 게 재미있어."
민수가 웃으며 동의했다.
브런치를 마치고 나와 골목을 걸었다. '자연도소금빵', '소하염전' 같은 디저트 가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저기도 줄 서 있네. 소금빵이 그렇게 맛있나?"
"나중에 먹어보자. 일단 더 걸어보고."
골목은 미로처럼 이어졌다. 좁은 길 양쪽으로 카페, 음식점, 소품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낙원역'이라는 간이역 컨셉의 카페, '식물'이라는 레트로 감성의 카페, 일본식 온천 분위기의 '온천집' 샤브샤브.
"여기 정말 핫플레이스구나."
지혜가 감탄했다. 모든 가게가 독특한 콘셉트와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근데 솔직히 좀 복잡하긴 하다. 을지로나 성북동처럼 여유롭게 걷기는 힘들 것 같아."
민수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진 찍기도, 천천히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것도 익선동의 매력 아닐까? 살아 있는 동네니까. 사람들로 북적이는 게."
"그렇긴 하네."


이질감 속의 발견
점심 때가 되어 두 사람은 '송암온반'이라는 국밥집에 들어갔다. 한옥을 개조한 식당으로,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마당과 여러 개의 방이 보였다.
"여기 온반 두 개요."
주문을 하고 마루에 앉았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좌식 공간이었다.
"이런 곳은 좋다. 한옥 본연의 느낌이 살아 있어."
지혜가 마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나무들과 돌이 놓인 소박한 정원이었다.
온반이 나왔다. 뜨끈한 국물에 밥이 말아져 나왔다. 정갈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맛있네."
밥을 먹으며 민수가 문득 말했다.
"근데 여보, 익선동 보면서 느낀 건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무슨 말이야?"
"한옥은 보존됐잖아. 재개발되지 않고. 그건 좋은데, 대신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했어. 여기 원래 살던 사람들은 어디 갔을까?"
민수의 질문에 지혜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100년 전 이 한옥들에 살던 사람들, 그 후손들은 아마 다 떠났겠지. 집값도 올랐을 테고, 관광지가 되면서 살기는 힘들어졌을 거야."
"그럼 결국 겉모습만 남은 건가? 건물은 한옥이지만, 그 안의 삶은 다 사라진 거."
두 사람은 복잡한 심경이 됐다. 을지로나 후암동에서 느낀 것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면, 익선동에서 느낀 것은 남았지만 변해버린 것에 대한 이질감이었다.
"그래도..."
지혜가 입을 열었다.
"이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을 것 같아. 모든 걸 박물관처럼 그대로 둘 수는 없잖아. 도시는 살아 있는 생물이니까,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고. 익선동은 옛것을 완전히 부수는 대신, 형태를 살리면서 새로운 용도로 쓰는 거지."
"음... 그렇게 보면 그렇네. 이것도 일종의 보존 방법이구나. 사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건물과 골목의 구조는 남았으니까."
밥을 다 먹고 나와 다시 골목을 걸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였다.
"저기 봐, 저 한옥."
지혜가 가리킨 곳에는 아직 카페나 식당으로 변하지 않은, 그대로의 한옥이 있었다. 오래된 대문, 벗겨진 페인트, 마당에 놓인 화분들.
"아직도 여기 사는 사람이 있나 봐."
"그러게. 다 상업화된 건 아니네."
골목 깊숙이 들어가자 관광객이 적어지고, 실제로 거주하는 듯한 한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래가 걸려 있고, 택배 상자가 쌓여 있고, 고양이가 마당을 돌아다니는 집들.
"여기가 진짜 익선동인가 봐."
민수가 중얼거렸다. 핫플레이스 뒤편에 숨어 있는, 여전히 사람이 사는 동네.


공존의 의미
오후가 되자 햇살이 좋아졌다. 두 사람은 '새서울 콤콤오락실'이라는 레트로 게임장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우와, 이거 옛날 거 아냐?"
안에는 80~90년대 오락실 게임기들이 가득했다. 갤러그, 버블보블, 스트리트 파이터.
"나 이거 어렸을 때 엄청 했는데!"
민수가 신이 나서 동전을 넣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게임을 하며 웃었다. 마치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락실을 나와 '소하염전'에 들러 소금빵을 샀다. 줄이 길었지만, 기다릴 만했다. 따끈한 소금빵을 한 입 베어 무니 버터가 쫙 흘러나왔다.
"이거 진짜 맛있다!"
골목 벤치에 앉아 소금빵을 먹으며 두 사람은 하루를 정리했다.
"익선동, 어땠어?"
지혜가 물었다.
"솔직히 처음엔 좀 어색했어. 너무 상업적이고, 관광지 같고. 우리가 찾던 '진짜 골목'은 아닌 것 같았거든. 근데 걸어보니까 이것도 하나의 생존 방식이더라."
"생존 방식?"
"응. 재개발로 다 밀어버리는 대신, 옛 모습을 살리면서 새로운 기능을 주는 거. 완벽하진 않지만, 최소한 건물과 골목의 형태는 남았잖아."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여기 많이 오잖아. 그 사람들한테는 이게 한옥을 경험하는 방법일 수도 있고. '옛날 건물 구경'이 아니라,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서 커피 마시고, 밥 먹고, 사진 찍고."
"그렇게 보면 긍정적이기도 하네. 한옥이 박제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공간으로 계속 쓰이는 거니까."
민수가 소금빵을 한 입 더 베어 물며 말했다.
해가 기울 무렵, 두 사람은 '식물'이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고양이 직원이 반겨주는 레트로 감성의 카페였다.
"여기요,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좌식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골목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웃음소리, 사진 찍는 소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생각보다 재미있었어, 오늘."
지혜가 말했다.
"나도. 처음 기대와는 달랐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어."
커피를 마시며 두 사람은 지난 네 번의 여행을 되돌아봤다. 을지로의 산업 현장, 후암동의 서민 주택가, 성북동의 예술가 마을, 그리고 익선동의 한옥 핫플레이스.
"우리가 보고 있는 게 뭘까, 결국?"
민수가 물었다.
"서울의 시간들?"
"맞아. 서울의 여러 시간들. 과거만 있는 곳, 과거가 사라져가는 곳,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익선동은 그 마지막 케이스네."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하나의 답이긴 한 것 같아. 다 부수지도, 다 남기지도 않는. 중간 어딘가."
카페를 나와 종로3가역으로 걸어가는 길, 석양이 한옥 지붕을 비췄다. 기와가 붉게 물들었다.
"사진 찍자."
지혜가 카메라를 들었다. 민수가 그녀 옆에 섰다. 뒤로 한옥 골목이 펼쳐졌다.
"하나, 둘, 셋!"
셔터가 눌렸다. 100년 된 한옥과 2026년의 부부가 한 프레임에 담겼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지혜가 말했다.
"다음은 어디 갈까?"
"글쎄. 이번엔 좀 다른 느낌으로 가볼까? 바다가 있는 곳이라든지."
"좋아. 월미도나 인천 차이나타운?"
"오, 거기 좋다. 개항장 거리도 있고."
두 사람은 계획을 세우며 웃었다.
집에 도착해서 오늘의 기록을 정리했다. 사진들을 보며 민수가 말했다.
"익선동은 좀 복잡한 것 같아. 좋은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고."
"그래도 그게 현실 아닐까? 세상 모든 게 흑백으로 나뉘는 건 아니잖아. 회색도 있고, 여러 색이 섞인 것도 있고."
지혜의 말이 옳았다. 익선동은 단순한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남겼다. 옛것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새것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노트에 제목을 적었다. '익선동, 시간을 품은 골목의 변주곡'.
"변주곡?"
"응. 원곡은 한옥 마을인데, 현대적으로 변주한 거지. 같은 멜로디인데 편곡이 다른 거."
"좋은데? 딱 맞는 표현이야."
그날 밤, 민수는 익선동에 대한 글을 썼다. 복잡한 감정을 솔직하게 담았다.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그리고 생각할 거리들.
지혜는 사진들을 정리하며 웃었다. 오락실에서 게임하는 민수, 소금빵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두 사람, 석양 아래 한옥 골목.
"이것도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네."
"응. 완벽하진 않지만, 우리만의 이야기니까."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깊어갔다. 어딘가에 익선동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불이 켜진 카페들, 골목을 걷는 사람들, 그리고 조용히 잠든 오래된 한옥들.
익선동은 그렇게 오늘도 과거와 현재 사이 어딘가에 존재했다. 완벽하지 않지만 살아 있는, 변화하지만 남아 있는, 그런 공간으로.
그리고 그곳을 걸었던 한 부부도, 자신들의 시간을 기록하며 나아갔다. 익선동처럼, 과거를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가며.
다음 주말, 그들은 또 다른 골목을 걸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끝나지 않는 아카이빙, 계속되는 발걸음.



익선동은 1920년대에 조성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 중 하나로, 좁은 골목길 사이로 트렌디한 카페와 맛집이 어우러진 서울의 대표적인 핫플레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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