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한옥마을, 겨울 눈 속의 온기
눈 내리는 날의 약속
"여보, 밖에 눈 온다."
토요일 아침, 커튼을 젖힌 지혜가 말했다. 창밖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4월의 골목 여행을 마친 후, 5월에는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눈 오는 날 가면 좋은 데 없을까?"
민수가 이불을 덮고 누운 채 물었다.
"은평한옥마을 어때? 거기 눈 오면 진짜 예쁘다던데. 북한산도 보이고."
"은평한옥마을? 거기 신한옥 마을 아니야? 익선동처럼 오래된 데는 아니고."
"응. 2014년에 만든 곳이래. 근데 북한산 자락에 있어서 분위기가 좋대. 박물관도 있고, 진관사라는 절도 근처에 있고."
지혜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사진들을 보여줬다. 기와지붕 위에 하얀 눈이 쌓인 모습,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한옥들, 고즈넉한 골목길.
"좋다. 오늘 갈까?"
"응! 애들도 데려가자. 눈 오는 날 한옥마을 가면 좋아할 것 같아."
한 시간 후, 네 식구는 차에 올랐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서연이와 준우는 뒷좌석에서 신이 나 있었다.
"눈사람 만들 수 있어?"
"당연하지. 한옥마을 가면 마당도 있을 거야."
차는 북한산 쪽으로 향했다. 도심을 벗어나자 풍경이 달라졌다. 고층 아파트가 줄어들고, 산이 가까워졌다.
"여기 공기가 다르네."
민수가 차창을 조금 열었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나무 냄새가 들어왔다.
"진짜. 도심이랑 완전 다르다."
은평한옥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눈발이 더 거세졌다.
"우와!"
아이들이 환호했다. 눈을 맞으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조심해, 미끄러워!"
지혜가 소리쳤지만, 아이들은 이미 눈밭에서 뒹굴고 있었다.
박물관에서의 발견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여기가 베이스캠프래. 한옥마을 지도도 받을 수 있고."
안내 데스크에서 지도와 팜플렛을 받았다.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오늘은 눈이 와서 더 예쁠 거예요. 옥상 전망대 꼭 가보세요. 한옥마을이랑 북한산이 한눈에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1층 전시실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옥의 구조, 온돌의 원리, 마루의 기능 등이 모형과 영상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아빠, 온돌이 뭐야?"
준우가 바닥 난방 시스템 모형을 보며 물었다.
"옛날 우리 집 난방 방법이야. 부엌에서 불을 때면 그 열기가 방바닥 밑으로 지나가면서 방을 따뜻하게 해주는 거지."
"신기하다!"
서연이도 관심을 보이며 모형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전시실을 둘러보다 '북한산 순수비' 기획전을 발견했다. 진흥왕이 세운 비석의 실물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보, 이거 봐."
민수가 지혜를 불렀다. 비석에는 총탄 자국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이게 뭐야?"
"6.25 전쟁 때 생긴 거래. 북한산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안내문을 읽으며 두 사람은 숙연해졌다. 1500년 전 신라의 비석에 70년 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니. 역사가 이렇게 겹쳐지는 것이구나.
"애들아, 이것 봐. 이 비석 엄청 오래됐는데, 여기 구멍들이 보이지? 이게 전쟁 때 총알 맞은 자국이야."
아이들은 심각하게 비석을 바라봤다.
"아파하지 않았을까?"
준우의 엉뚱한 질문에 모두 웃었다. 하지만 그 순수한 질문이 오히려 전쟁의 비극을 더 생각하게 했다.
전시를 다 보고 1층 작은 도서관에 들렀다. 한옥 관련 책들이 가득했다.
"여기 책들 좋다. '우리 옛집', '온돌의 역사'... 대출이 안 된대. 아쉽다."
지혜가 책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다음에 여기 와서 책 읽는 것도 좋겠다. 조용하고 분위기도 좋고."
마지막으로 옥상 전망대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나서자 눈바람이 몰아쳤다.
"추워!"
하지만 추위는 잊을 만큼 경치가 장관이었다. 눈 쌓인 한옥 지붕들이 층층이 펼쳐지고, 그 뒤로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와, 진짜 예쁘다."
지혜가 카메라를 들었다. 하얀 눈, 갈색 기와, 푸른 산. 완벽한 조화였다.
"사진 찍자!"
네 식구는 '용출정'이라는 정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눈송이가 끊임없이 내리는 가운데.
골목을 걷다
박물관을 나와 한옥마을 골목으로 들어섰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골목길에는 발자국 하나 없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첫 발자국이네."
민수가 앞장서서 걸었다. 뒤따라 지혜와 아이들이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골목은 고즈넉했다. 낮은 담장, 기와지붕, 대문마다 걸린 현판. 익선동의 번잡함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는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지혜가 중얼거렸다. 대문 밖에 놓인 택배 상자, 마당에 세워진 자전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생활의 흔적들.
"응. 관광지가 아니라 주거 단지야.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어."
한 집 대문 위에는 '희담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고, 다른 집에는 '다온정', '자험헌' 같은 이름들이 붙어 있었다.
"이 이름들 무슨 뜻일까?"
서연이가 궁금해했다.
"저기 봐, 저 집은 설명이 있네. '심심헌', 마음을 찾는 집이래."
민수가 안내문을 읽어줬다.
"멋지다. 아파트는 그냥 동호수만 있는데, 여기는 집마다 이름이 있어."
걷다 보니 대문이 열린 집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자 마당에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 저거 뭐야?"
"장독대야. 옛날에는 집마다 저렇게 항아리에 된장, 간장, 고추장을 담아뒀어."
"지금도 그렇게 해?"
"이 집은 그런가 봐. 전통 방식으로 살고 계신 거지."
골목을 걷는 내내 북한산이 보였다. 어디서 봐도 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 좋다. 도심인데 산이 이렇게 가까운 곳이 또 있을까?"
민수가 감탄했다.
한옥 모습의 편의점도 발견했다. 기와지붕을 얹은 편의점이라니. 안으로 들어가니 창가에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밖으로 한옥마을과 북한산이 보였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랑 핫초코 두 개요."
음료를 사서 창가에 앉았다. 눈 내리는 한옥마을을 바라보며 따뜻한 음료를 마시는 호사.
"전국에서 경치 제일 좋은 편의점 아닐까?"
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인정."
온기를 찾다
편의점을 나와 '마실길'이라는 산책로로 향했다. 진관천을 따라 조성된 길이었다.
"마실길? 이름 예쁘다."
"마실 나간다는 뜻이래. 옛날에 동네 한 바퀴 돌며 산책하는 걸 마실이라고 했대."
길 양쪽으로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느티나무, 소나무, 이름 모를 나무들. 눈을 뒤집어쓴 나무들이 장관이었다.
"저 나무 봐. 엄청 크다."
준우가 가리킨 곳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안내판에는 수령이 300년이 넘는다고 적혀 있었다.
"300년... 이 나무가 여기 있을 때 조선시대였겠네."
민수가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300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나무. 얼마나 많은 계절을 보았을까.
"정자목이래.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 모여서 쉬었대."
지혜가 안내판을 읽어줬다.
"지금도 쉬면 안 돼?"
서연이가 물었다.
"물론 쉬어도 되지. 우리 잠깐 쉬어갈까?"
네 식구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나무 가지에서 떨어진 눈송이들이 머리 위로 날렸다.
"조용하다."
민수가 말했다. 도심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눈 내리는 소리, 바람 소리, 가끔 새 우는 소리만 들렸다.
"은평한옥마을은 다르네, 지금까지 간 곳들이랑."
지혜가 말을 꺼냈다.
"어떻게?"
"을지로는 산업의 현장이었고, 후암동은 서민의 삶터였고, 성북동은 예술가의 거처였고, 익선동은 한옥의 재탄생이었잖아. 근데 은평한옥마을은... 새로운 시도?"
"맞아. 완전히 새로 만든 한옥 마을이니까. 전통을 재현하면서도 현대 생활에 맞게."
민수가 동의했다.
"어떤 게 나을까? 옛날 한옥을 보존하는 것과 새로운 한옥을 짓는 것 중에."
"둘 다 필요한 것 같아. 옛것은 보존하고, 새것은 계속 만들고. 전통이 박물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일부가 되려면."
준우가 눈밭에서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서연이도 합류해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애들아, 눈사람 만들어?"
"응! 한옥 눈사람!"
아이들은 신이 나서 눈을 뭉쳤다. 부부도 합류했다. 네 명이 함께 만든 눈사람은 조금 삐뚤었지만 사랑스러웠다.
"사진 찍자!"
눈사람과 함께 가족 사진을 찍었다. 뒤로는 한옥과 북한산이 보였다.
점심때가 되어 마을 안쪽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북한산 순두부'라는 간판이 걸린 곳이었다.
"순두부찌개 네 개요."
따뜻한 순두부찌개가 나왔다. 추위에 얼었던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맛있다."
밥을 먹으며 민수가 말했다.
"은평한옥마을의 가장 큰 장점이 뭔 줄 알아?"
"뭔데?"
"포근함. 북한산이 품어주는 것 같은 느낌. 도심인데도 따뜻해."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까 박물관에서 본 것처럼 한옥 자체가 온돌, 마루, 처마로 온기를 간직하는 구조잖아. 은평한옥마을 전체가 그런 느낌이야. 차갑지 않고 따뜻해."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 그쳤다. 하늘이 조금씩 개고 있었다.
"진관사도 갈까? 여기서 가깝대."
"좋아. 가자."
마실길을 따라 걸어 진관사로 향했다. 천년 고찰이라고 했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고요함이 감돌았다.
"엄마, 여기는 조용해."
준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절의 분위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대웅전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특별히 종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경건해졌다.
"뭘 빌었어?"
나오는 길에 지혜가 물었다.
"가족 건강. 당신?"
"나도. 그리고 우리 아카이빙이 계속 이어지길."
민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해질 무렵, 네 식구는 다시 박물관 옥상 전망대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눈이 그쳐서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저녁노을이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하얀 눈, 갈색 기와, 푸른 산, 붉은 하늘.
"완벽하다."
지혜가 연신 셔터를 눌렀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곯아떨어졌다. 하루 종일 눈 속에서 놀아서 피곤한 모양이었다.
"오늘 정말 좋았어."
민수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은평한옥마을이 이렇게 좋은 곳인 줄 몰랐어."
"눈 온 게 신의 한 수였어. 눈 덮인 한옥,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아."
집에 도착해서 잠든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두 사람은 거실에 앉아 오늘의 기록을 정리했다.
"은평한옥마을은 뭐랄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 같아."
지혜가 말했다.
"어떤?"
"전통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로 올 수 있다는 것. 한옥이 박물관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 수 있는 집이라는 것."
"맞아. 그리고 그게 꼭 불편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현대적 편의를 갖추면서도 한옥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다는 것."
민수가 사진들을 보며 웃었다. 눈사람 만드는 아이들, 마실길을 걷는 가족, 노을 지는 한옥마을.
"다음은 어디 갈까?"
"바다 어때? 그동안 서울만 돌아다녔으니까. 인천 개항장이나 월미도."
"좋아. 6월에 가자."
노트에 제목을 적었다. '은평한옥마을, 겨울 눈 속의 온기'.
"온기라는 표현이 딱 맞네."
"응. 추운 겨울이었는데 따뜻했어. 북한산의 품, 한옥의 온돌, 가족의 체온."
그날 밤, 민수는 글을 쓰며 깨달았다. 이 아카이빙 프로젝트가 단순히 장소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느낀 감정과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는 일이라는 것을.
은평한옥마을은 그렇게 기억 속에 남았다. 눈 내리던 날, 북한산 품에 안긴 한옥들, 300년 된 느티나무, 그리고 함께 만든 눈사람.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보였다. 어딘가에 은평한옥마을도 있을 것이다. 조용히 잠든 한옥들, 골목을 지키는 가로등, 그리고 북한산의 품.
지혜는 마지막 사진을 저장하며 미소 지었다. 다섯 번째 여행도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은 이렇게 이어졌다. 한 걸음씩, 한 장소씩, 한 이야기씩. 끝나지 않는 여행, 계속되는 기록.
은평한옥마을이 가르쳐준 것처럼, 전통은 과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이어질 수 있었다. 가족의 아카이빙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소중한 전통이 될 것이다.
그렇게 또 하나의 기억이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