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탐사(5)

염리동, 소금 마을의 재발견

by seungbum lee

기억의 무게
해가 기울 무렵, 두 사람은 염리동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작은 공터가 있었고, 거기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여기다, 여기."
벤치에 앉아 풍경을 바라봤다. 신촌, 마포, 여의도, 그 너머로 한강까지.
"염리동은 참 복잡하다."
지혜가 입을 열었다.



"뭐가?"
"아름답긴 한데 슬프기도 하고. 새로운 것도 있는데 사라지는 것도 있고."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벽화는 예쁜데, 그게 결국 재개발 전에 동네를 포장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예술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시작일 수도 있고."
"젠트리피케이션?"
"예술가들이 저렴한 동네에 들어와서 멋지게 만들면, 그게 유명해지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결국 원래 살던 사람들도 예술가들도 다 쫓겨나는 거. 익선동도 그렇게 된 거고."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우리가 지금 하는 것도..."
지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와서 구경하고, SNS에 올리고, 그게 결국 이 동네를 유명하게 만들어서 변화시키는 건 아닐까?"
민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근데 반대로 생각하면..."
잠시 후 민수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 못 할 수도 있어. 재개발되고 나면 염리동이 어떤 곳이었는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그냥 다 잊혀지는 거지."
"그것도 맞는 말이야."
"완벽한 답은 없는 것 같아. 기록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다 나름의 영향이 있으니까.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진심으로 기억하는 거?"
지혜가 민수의 손을 잡았다.
"응. 관광객 시선이 아니라, 진짜 이곳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는 거."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두 사람은 골목을 내려갔다. 다시 '소금창고' 카페를 지나고, 벽화 골목을 지나고, 염리동 슈퍼를 지났다.




"저녁 먹고 갈까?"
골목 입구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염리 칼국수'라는 간판이 걸린 곳이었다.
"칼국수 두 개요."
식당은 좁았지만 따뜻했다. 손님은 대부분 동네 주민으로 보였다.
"여기도 오래됐나 봐."
벽에 붙은 낡은 메뉴판과 오래된 액자들을 보며 민수가 말했다.
칼국수가 나왔다. 뜨끈하고 구수한 맛이었다.
"맛있다."
"진짜. 이런 식당이 제일 맛있어."
밥을 먹으며 두 사람은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염리동, 어땠어?"
"음...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전환점'?"
"전환점?"
"응. 사라지기 직전과 변하기 직전 사이. 옛것도 아니고 새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한테도 전환점인 것 같아."
"우리한테?"
"응. 지금까지는 그냥 구경하고 기록했다면, 이제는 우리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우리가 이걸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혜의 말이 옳았다. 염리동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성찰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신촌역으로 걸어가는 길, 뒤를 돌아봤다. 언덕 위 염리동에 불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저기 사는 사람들, 내일도 모레도 여기서 살겠지."
"응. 우리는 구경 왔다가 가지만, 저 사람들한텐 삶의 터전이니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지혜가 말했다.
"오늘 사진 몇 장 안 찍었네."
"응. 찍기가 좀 조심스러웠어. 누군가의 집 앞이고, 살아가는 공간이잖아."
"그래도 몇 장은 있지?"
"응. 풍경 위주로 찍었어. 사람은 안 찍었고."
집에 도착해서 사진들을 확인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의미 있는 사진들이었다. 소금길 계단, 벽화, 골목 풍경, 그리고 언덕에서 본 서울 야경.
"글 쓰기 어렵겠는데."
민수가 노트를 펴며 말했다.
"왜?"
"복잡해서. 좋았던 것도 있고, 불편했던 것도 있고, 생각할 거리도 많고."
"그럼 그대로 쓰면 되지. 복잡한 감정도 솔직하게."
그날 밤, 민수는 오랫동안 고민하며 글을 썼다. 염리동의 아름다움, 재개발의 그림자, 예술과 젠트리피케이션, 관광객과 주민의 간극. 그리고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질문.
지혜는 사진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의 여행들이 주로 기쁨과 발견이었다면, 염리동은 책임과 성찰을 요구했다.
"여보."
민수가 글쓰기를 멈추고 불렀다.
"응?"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할까? 이 아카이빙 프로젝트."
"무슨 말이야?"
"그냥 예쁜 곳만 가서 사진 찍고 즐거워할 게 아니라,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아. 그 동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주민들을 만나고, 역사를 공부하고."
지혜가 민수 옆에 앉았다.
"좋은 생각이야. 근데 그러려면 시간도 더 필요하고, 노력도 더 들어가겠는데."
"괜찮아. 천천히 하자. 한 달에 한 곳씩도 좋고, 두 달에 한 곳씩도 좋고. 양보다 질이 중요한 거니까."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그래, 그렇게 하자."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보였다. 어딘가에 염리동도 있을 것이다. 좁은 골목, 가파른 계단,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민수는 노트에 제목을 적었다. '염리동, 소금 마을의 재발견'.
"재발견?"
"응. 소금 창고로 시작한 동네가 주거지가 됐다가, 이제 예술 마을로 재발견되고 있잖아. 그리고 우리도 아카이빙의 의미를 재발견한 거고."
"깊은데?"
두 사람은 웃었다.
그날 이후, 부부의 아카이빙은 조금 달라졌다. 더 천천히, 더 깊이, 더 진지하게.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진정한 기록으로.
염리동은 그런 변화의 계기가 된 곳이었다. 아름답지만 불편한, 새롭지만 사라지는, 그런 모순 속에서 질문을 던진 곳.



그리고 그 질문들은 앞으로의 여행을 더 의미 있게 만들 것이었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 찍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성찰하는 것.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염리동이 가르쳐준 것처럼, 더 신중하고 더 책임감 있게.
다음 달, 그들은 또 다른 골목을 걸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이다. 끝나지 않는 여정, 깊어지는 이해.
염리동의 소금처럼, 그들의 기록도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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