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너머 발견
북촌 너머의 발견
"서촌 알아?"
8월의 어느 저녁, 지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을지로 탐험 이후 두 사람은 서울의 골목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서촌? 북촌은 알지."
"북촌 반대편이야. 경복궁 서쪽. 북촌이 양반 동네였다면, 서촌은 중인과 예술가들이 살던 곳이래."
민수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예술가?"
"응. 이상, 윤동주, 이중섭. 다 서촌에 살았대. 그리고 지금도 작은 갤러리랑 카페들이 많고."
지혜는 검색한 사진들을 보여줬다. 한옥 골목, 오래된 담벼락, 좁은 계단길. 하지만 북촌만큼 관광지화되지 않은, 좀 더 조용하고 정겨운 분위기였다.
"좋다. 이번 주말에 가자."
"애들도 데려갈까?"
"응. 서연이가 요즘 시 쓰기 좋아하잖아. 윤동주 하숙집 보면 좋아할 것 같아."
토요일 오전, 네 식구는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만났다. 3번 출구로 나오자 경복궁 돌담이 보였다.
"저 담을 따라 걸으면 서촌이야."
"근데 왜 서촌이라고 불러? 동네 이름이 따로 있을 텐데."
서연이가 물었다.
"원래는 청운동, 효자동, 통인동 이런 이름들이 있어. 근데 경복궁 서쪽이라고 해서 서촌이라고 부르게 됐대."
"북촌은?"
"그건 경복궁 북쪽."
"그럼 남촌이랑 동촌도 있어?"
준우가 끼어들었다.
"남촌은 남산 쪽을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동촌은... 잘 안 써."
가족은 경복궁 돌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몇 분 걷지 않아 분위기가 달라졌다.
"여기부터가 서촌이네."
좁은 골목, 낮은 한옥, 오래된 나무들. 북촌보다 훨씬 조용하고 한적했다.
시인의 골목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이상의 집'이었다. 시인 이상이 말년을 보낸 집터였다.
"이상이 누구야?"
준우가 물었다.
"시인이야. '오감도'라는 아주 유명한 시를 썼어. 근데 아주 어려운 시야. 아빠도 잘 모르겠어."
민수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좁은 골목 끝에 자리한 이상의 집은 작고 소박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상의 사진과 친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었다.
"진짜 여기서 살았어?"
서연이가 작은 방을 보며 놀라워했다.
"응. 1930년대에. 그때는 이런 집이 많았어."
전시를 보다가 이상의 시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이게 무슨 말이야?"
"13명의 아이가 길로 달린다는 뜻인데... 이상의 시는 의미를 해석하기가 어려워."
"나도 커서 이런 시 쓸 수 있을까?"
서연이의 질문에 지혜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당연하지. 네가 쓰고 싶은 시를 쓰면 돼."
이상의 집을 나와 골목을 더 걸었다. 서촌의 골목은 경사가 있었다. 인왕산 자락이라 그런지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졌다.
"힘들어."
준우가 투덜거렸다.
"조금만 참아. 곧 재미있는 데 나와."
몇 분 더 오르니 '수성동 계곡'이 나왔다. 작은 개울이 흐르고, 바위들이 놓여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물이다!"
아이들이 달려갔다. 개울은 얕았지만 맑았다.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 맞아?"
민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도심 한가운데 이런 계곡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옛날에는 이런 데가 많았대. 근데 다 복개되고 여기만 남았어."
아이들은 물가에서 놀고, 부부는 벤치에 앉아 쉬었다.
"서촌은 다른 데랑 느낌이 다르네."
지혜가 말했다.
"어떻게?"
"을지로는 산업이었고, 염리동은 변화였고, 성북동은 예술가의 집이었잖아. 서촌은... 일상?"
"맞아. 여기는 지금도 사람들이 사는 동네 같아. 관광지가 아니라."
실제로 골목을 걸으며 동네 주민들을 많이 만났다. 장 보고 오시는 할머니, 자전거 타는 아이들, 산책하는 사람들.
"북촌은 관광객 천지인데, 여기는 여전히 동네구나."
점심 때가 되어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서촌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이었다.
"여기가 도시락 카페로 유명하대."
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도시락 카페'라는 독특한 시스템이 있었다. 엽전을 사서 각 가게에서 반찬을 조금씩 담아 먹는 방식이었다.
"신기하다!"
아이들이 신이 났다. 엽전을 들고 이 가게 저 가게 다니며 좋아하는 반찬을 골랐다.
"이건 뭐야?"
"메추리알 장조림. 맛있어, 먹어봐."
네 명의 도시락이 완성됐다. 각자 다른 반찬들로 채워진 도시락이었다.
"맛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가족은 웃었다.
"이런 재미있는 시장도 있네."
"원래 시장이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야. 물건도 사고, 맛도 보고, 사람들도 만나고."
역사의 무게
점심을 먹고 '윤동주 하숙집 터'로 향했다. 서촌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장소 중 하나였다.
좁은 골목을 올라가니 작은 표지판이 보였다. '시인 윤동주 하숙집 터'.
"여기야."
하지만 집은 없었다. 터만 남아 있었다. 안내판에는 윤동주가 이곳에서 하숙하며 시를 썼다고 적혀 있었다.
"집은 어디 갔어?"
서연이가 물었다.
"없어졌어. 오래전에.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
지혜가 안내판을 읽어줬다.
"윤동주 시인은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이곳에서 하숙하며 연희전문학교를 다녔습니다. '별 헤는 밤', '서시' 같은 유명한 시들이 이 시기에 쓰였습니다."
"'별 헤는 밤' 나 알아! 학교에서 배웠어!"
서연이가 외쳤다.
"그래? 외워봐."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그 다음이 뭐더라..."
서연이가 기억을 더듬었다. 지혜가 이어서 읊었다.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맞아, 그거!"
민수는 터를 바라보며 상상했다. 80년 전 이곳에서 젊은 시인이 별을 보며 시를 쓰던 모습을.
"근데 윤동주는 어떻게 됐어?"
준우가 물었다.
민수와 지혜는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본에 끌려가서... 돌아가셨어. 아주 젊은 나이에."
"왜?"
"일제강점기였거든.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시절. 윤동주 시인은 독립을 꿈꿨고, 그래서 감옥에 갇혔어."
아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지만, 분위기가 무거워진 걸 느꼈다.
잠시 묵념하듯 서 있다가 자리를 떠났다.
다음은 '이중섭 가옥'으로 향했다. 화가 이중섭이 6.25 전쟁 중 피난 와서 살던 집이었다.
집은 아주 작았다. 방 두 개가 전부였다.
"여기서 그림을 그렸어?"
"응. 가족과 함께 살면서."
벽에는 이중섭의 그림 복제품이 걸려 있었다. 소, 아이들, 가족. 따뜻하지만 어딘가 슬픈 그림들이었다.
"이중섭은 가족을 많이 사랑했어. 근데 가난해서 가족과 헤어져야 했지.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이런 그림들을 그렸어."
"슬프다."
서연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 슬픈 이야기야. 근데 그 슬픔이 아름다운 예술이 됐어."
집을 나오며 민수가 지혜에게 속삭였다.
"서촌은 무겁네. 이상, 윤동주, 이중섭. 다들 슬픈 이야기야."
"그래도 알아야 하는 이야기들이잖아. 우리 역사니까."
일상의 재발견
오후가 되어 '청와대 앞길'을 걸었다. 2022년 청와대가 개방된 후 이 길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됐다.
"여기가 청와대야?"
"응. 대통령이 살던 곳."
담벼락 너머로 청와대 본관이 보였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었다.
청와대 담벼락을 따라 걷다 보니 '세검정길'이 나왔다. 인왕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였다.
"여기 공기 좋다."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걸으니 도심이 아닌 것 같았다.
"서촌의 매력이 이거구나."
민수가 중얼거렸다.
"뭐?"
"도심 한복판인데 자연이 가까워. 인왕산, 북악산이 바로 옆이니까."
"그리고 역사도 가까워. 경복궁, 청와대, 그리고 예술가들의 흔적."
세검정길을 걷다가 작은 카페에 들렀다. '인왕산 책방'이라는 간판이 걸린 한옥 카페였다.
"아메리카노 두 잔, 딸기주스, 초코우유요."
마루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인왕산 자락이 한눈에 보였다.
"여기 진짜 좋다."
카페에는 책들이 가득했다. 시집, 소설, 미술책들.
"서촌답네. 예술과 문학의 동네."
서연이는 시집 코너에서 윤동주 시집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엄마, 이거 사줘."
"그래, 사자."
음료를 마시며 가족은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서촌 어땠어?"
민수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좋았어. 근데 슬픈 이야기가 많았어."
서연이가 대답했다.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했지?"
"응."
"그게 서촌이야. 슬픈 역사가 있지만, 그 속에서 아름다운 예술이 태어난 곳."
해질 무렵, 네 식구는 다시 골목을 걸었다. 이번에는 주택가 쪽으로.
"여기는 관광객이 없네."
골목 깊숙이 들어가니 조용한 주택가가 펼쳐졌다. 한옥과 양옥이 섞여 있고, 좁은 골목이 이어졌다.
"여기가 진짜 서촌이구나. 사람들이 사는."
대문 앞에는 화분이 놓여 있고, 빨래가 널려 있고, 고양이가 담벼락을 걷고 있었다.
"북촌은 박물관 같았는데, 서촌은 여전히 살아있는 동네 같아."
지혜가 조용히 말했다.
저녁을 먹으러 '대오서점 건물' 근처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서촌 할머니 집밥'이라는 간판이 걸린 곳이었다.
"여기요, 정식 네 개요."
정갈한 반찬들이 나왔다. 된장찌개, 제육볶음, 나물 반찬들.
"맛있다."
밥을 먹으며 지혜가 말했다.
"서촌은 좀 복잡한 것 같아."
"뭐가?"
"역사의 무게와 일상의 가벼움이 공존해. 윤동주의 슬픔과 통인시장의 즐거움이 한 동네에 있어."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서촌의 진짜 모습인 것 같아. 무겁기만 한 것도,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닌."
식사를 마치고 경복궁역으로 걸어가는 길, 석양이 인왕산을 물들이고 있었다.
"사진 찍자."
네 식구는 경복궁 돌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석양 아래 가족의 실루엣이 담겼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서연이가 산 윤동주 시집을 펼쳐 읽었다.
"엄마, 이 시 좋아. '서시'."
"읽어봐."
서연이가 조용히 읊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차창 밖으로 서울의 밤 풍경이 지나갔다. 어딘가에 서촌도 있을 것이다. 좁은 골목, 한옥 지붕,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
집에 도착해서 오늘의 기록을 정리했다. 민수는 글을 쓰고, 지혜는 사진을 정리했다.
"제목 뭘로 할까?"
"음... '서촌, 시간이 숨 쉬는 골목'?"
"좋은데.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이상, 윤동주, 이중섭의 시간도 숨 쉬고, 지금 사는 사람들의 시간도 숨 쉬고. 과거와 현재가 함께 살아있는 느낌이었거든."
민수가 동의하며 노트에 제목을 적었다.
사진을 정리하다가 인왕산 책방에서 찍은 가족 사진이 나왔다. 창밖으로 인왕산이 보이고, 테이블에는 윤동주 시집이 놓여 있고, 네 식구가 웃고 있었다.
"이 사진 좋다."
"응. 서촌의 모든 게 담겨있는 것 같아. 자연, 문학, 그리고 우리 가족."
그날 밤, 민수는 조심스럽게 글을 썼다. 서촌의 아름다움과 슬픔, 역사의 무게와 일상의 가벼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공존하는 마법 같은 동네에 대해.
"이 글은 좀 다르네."
지혜가 초고를 읽으며 말했다.
"어떻게?"
"더 개인적이야. 아이들과 함께한 경험, 우리 가족의 감정이 많이 들어가 있어."
"그게 맞는 것 같아. 서촌은 그런 동네였으니까. 개인적이고, 감정적이고."
며칠 후, 서연이가 학교에서 시를 써왔다.
"엄마, 내가 쓴 시야."
제목은 '서촌에서'였다.
"좁은 골목에 / 시인의 발자국이 남아있고 / 작은 집에 / 화가의 그림이 걸려있는 / 서촌 / 나도 언젠가 / 이곳에서 / 뭔가를 남기고 싶다"
지혜는 딸을 꼭 안아줬다.
"정말 잘 썼어. 네 마음이 느껴져."
"서촌 또 갈 수 있어?"
"당연하지. 우리 자주 가자."
그날 이후, 서촌은 가족의 단골 장소가 됐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서촌을 찾았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봄에는 벚꽃이 피고, 여름에는 수성동 계곡이 시원하고, 가을에는 낙엽이 쌓이고, 겨울에는 눈 덮인 한옥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갈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했다. 작은 갤러리, 숨은 카페, 오래된 골목. 서촌은 무궁무진했다.
"서촌은 볼 때마다 다르네."
어느 날 민수가 말했다.
"그게 서촌의 매력이야.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하고, 그러면서도 본질은 지키고."
부부의 아카이빙도 그렇게 변해갔다. 처음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었다면, 이제는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증언이 되었다.
서촌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현재를 살아가는, 슬픔을 품으면서도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그런 동네.
1년 후, 서연이는 서촌을 주제로 학교에서 발표를 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해, 이중섭 화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느낀 서촌에 대해.
"잘했어!"
발표를 마치고 돌아온 딸을 안아주며 지혜가 말했다.
"엄마, 아빠 덕분이야. 서촌 데려가줘서."
"우리도 네 덕분이야. 너희들과 함께여서 더 의미 있었어."
그날 저녁, 네 식구는 서연이의 발표를 축하하며 외식을 했다. 물론 서촌에서.
통인시장에서 도시락을 만들어 먹고, 수성동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인왕산 책방에서 차를 마셨다.
"우리 가족의 특별한 장소가 생긴 것 같아."
민수가 말했다.
"응. 서촌은 이제 우리 거야. 우리만의 추억이 쌓인."
해가 질 무렵, 가족은 청와대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석양이 인왕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엄마, 우리 계속 이렇게 골목 다닐 거야?"
준우가 물었다.
"당연하지. 서울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이 너무 많아."
"좋아!"
아이들이 환호했다.
그렇게 서촌은 가족의 이야기에 한 장을 더했다. 시인과 화가의 동네에서, 한 가족의 추억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숨 쉬는 골목에서,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서촌은 그렇게 기억되었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곳,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곳, 그리고 한 가족이 사랑하게 된 곳으로.
골목 아카이빙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가족의 성장이고, 아이들의 교육이고, 부부의 사랑이었다.
서촌이 가르쳐준 것처럼, 슬픔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고, 역사 속에서도 현재를 살아가며.
부부는 노트를 덮으며 미소 지었다. 다음은 어디를 갈까? 서울에는 아직 수많은 골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골목들마다 이야기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발견할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