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송월동
동화 같은 제안
"여보, 이번엔 인천 어때?"
9월의 어느 주말, 지혜가 제안했다. 서촌 이후 두 달 동안 서울 골목들을 집중적으로 탐험했던 터라, 이제는 조금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인천? 갑자기?"
"응. 송월동 동화마을이라고, 오래된 주택가를 동화 테마로 꾸민 곳이래. 애들이 엄청 좋아할 것 같아."
민수는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했다. 화면에는 알록달록한 벽화로 가득한 골목 사진들이 떠올랐다. 피노키오, 앨리스, 백설공주. 온통 동화 속 캐릭터들이었다.
"우와, 여기 진짜 예쁘다."
"그치? 그리고 차이나타운이랑 개항장도 가까워서 한 번에 여러 곳을 볼 수 있어."
거실에서 레고를 하던 서연이와 준우를 불렀다.
"애들아, 다음 주말에 동화마을 갈래?"
"동화마을?"
"응. 피노키오도 있고, 백설공주도 있고, 무지개 계단도 있어."
"가고 싶어!"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까지의 골목 여행은 주로 역사와 예술이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이들을 위한 여행이었다.
토요일 아침, 네 식구는 일찍 집을 나섰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 멀다."
한 시간쯤 지나자 준우가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어."
인천역에 도착했다. 역사 자체가 오래되어 보였다. 1899년에 개통된 경인선의 종착역이라고 했다.
"여기도 역사가 있네."
역을 나서자 차이나타운 입구가 보였다. 큰 패루(중국식 대문)가 서 있었다.
"우와, 중국이다!"
준우가 신기해하며 패루를 올려다봤다.
"송월동은 차이나타운 옆이야. 먼저 동화마을 보고, 점심은 차이나타운에서 먹자."
알록달록한 골목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조금만 걸으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중국풍 건물들 사이로 낡은 주택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주택가의 담벼락마다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다!"
송월동 동화마을 입구였다. '송월동 동화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엄마, 저기 피노키오!"
서연이가 가리킨 벽에는 코가 긴 피노키오가 그려져 있었다. 입체적으로 튀어나온 코가 사진 찍기에 딱 좋았다.
"사진 찍자!"
아이들이 피노키오 코를 만지는 포즈를 취했다. 지혜가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귀엽다!"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다른 벽화가 나왔다. 이번에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였다.
"와, 난쟁이들 진짜 작아!"
준우가 난쟁이만큼 몸을 낮춰 사진을 찍었다.
골목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오르막을 올라가자 '무지개 계단'이 나왔다.
"저거다!"
계단 하나하나가 무지개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예쁘다!"
아이들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천천히! 미끄러워!"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송월동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알록달록한 지붕들, 좁은 골목들, 그 사이로 인천항이 멀리 보였다.
"여기서 사진 찍어야지."
네 식구는 무지개 계단에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었다. 가족 모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동네가 원래 이랬을까?"
민수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벽화로 가득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건물들은 낡고 오래된 주택들이었다.
"아닐 거야. 원래는 그냥 오래된 주택가였을 텐데, 벽화를 그려서 관광지로 만든 거지."
"염리동이랑 비슷하네."
"응. 쇠퇴하는 동네를 예술로 살리는 거."
하지만 염리동과는 느낌이 달랐다. 염리동의 벽화가 추상적이고 예술적이었다면, 송월동은 명확하고 대중적이었다. 누구나 아는 동화 캐릭터들이었으니까.
골목을 더 걸으며 다양한 벽화를 만났다.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미녀와 야수, 헨젤과 그레텔.
"여기 정말 많다!"
아이들은 벽화를 볼 때마다 환호했고, 매번 사진을 찍었다.
"엄마, 나 여기서 살고 싶어."
서연이가 말했다.
"왜?"
"매일 동화 속에 사는 것 같잖아."
지혜는 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이들에게는 이곳이 정말 동화 같은 세상이겠지.
벽화 뒤의 이야기
한 시간쯤 골목을 걸으며 사진을 찍다 보니 목이 말랐다.
"저기 가게 있다."
작은 슈퍼마켓이 보였다. '송월슈퍼'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물 사러 들어가자."
슈퍼 안으로 들어가니 60대 정도의 할머니가 계셨다.
"어서 오세요. 물이요?"
"네, 네 개요."
계산을 하며 민수가 물었다.
"여기 오래 하셨어요?"
"40년 됐어. 애들 키우면서 여기서."
"동화마을 생긴 후에 많이 달라지셨겠어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말했다.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해. 사람들이 많이 와서 좋긴 한데, 다들 사진만 찍고 가. 물도 안 사고."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지만, 어딘가 쓸쓸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주말에는 너무 시끄러워. 여기 사는 사람들은 쉬고 싶은데 말이야."
밖으로 나오며 민수와 지혜는 눈을 마주쳤다.
"또 그 문제네."
염리동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문제였다. 관광지가 된 동네에 여전히 살고 있는 주민들. 관광객과 주민의 괴리.
"근데 송월동은 좀 다른 것 같아."
지혜가 말했다.
"뭐가?"
"염리동은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벽화를 그렸잖아. 근데 여기는... 계획적으로 만든 느낌?"
"맞아. 관 주도로 동화마을 프로젝트를 한 거지. 쇠퇴하는 동네를 살리기 위해."
"그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민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골목을 더 걷다가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대문 앞에 앉아 쉬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오, 구경 왔어?"
"네. 여기 정말 예쁘네요."
"그래? 고맙네. 근데 여기 살기는 불편해. 사람들 너무 많이 와."
할아버지는 투덜거리시면서도 어딘가 뿌듯해 보이셨다.
"그래도 우리 동네가 유명해져서 나쁘진 않아. 예전엔 아무도 안 왔는데."
"여기 원래 어떤 동네였어요?"
"가난한 동네였지. 옛날 인천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야. 중국 사람들도 많이 살고. 근데 다들 떠나고, 늙은 사람들만 남았어. 그래서 구청에서 이렇게 만든 거야."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마을 프로젝트는 쇠퇴하는 동네를 되살리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성공한 것 같으세요?"
"글쎄. 사람들은 많이 오는데, 돈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어. 여기 사는 사람들한텐 별로 도움이 안 돼. 그냥 구경만 하고 가니까."
동화와 현실 사이
점심 때가 되어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송월동에서 5분만 걸으면 닿는 거리였다.
"짜장면!"
준우가 외쳤다.
"그래, 짜장면 먹으러 가자."
차이나타운 거리는 주말이라 사람들로 북적였다. 중국 음식점,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공화춘 갈까? 거기가 짜장면 원조래."
하지만 공화춘 앞에는 긴 줄이 서 있었다.
"다른 데 가자. 여기 중국집 많아."
근처의 작은 중국집에 들어갔다. '송월반점'이라는 이름이었다.
"짜장면 둘, 짬뽕 하나, 탕수육이요."
음식을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차이나타운의 붉은 건물들과 송월동의 알록달록한 벽화가 대조를 이뤘다.
"신기하다. 한 동네에 중국과 동화가 공존하네."
"인천이 원래 그런 곳이잖아. 개항장이었으니까 여러 문화가 섞인."
음식이 나왔다. 짜장면을 먹으며 아이들이 신이 나 떠들었다.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
"나는 무지개 계단이 제일 좋았어!"
"나는 앨리스!"
아이들의 환한 웃음을 보며 민수와 지혜는 만족스러웠다. 아이들에게는 순수하게 즐거운 하루였으니까.
"근데 복잡하긴 하다."
식사 후 차이나타운을 걸으며 민수가 말했다.
"뭐가?"
"송월동. 아이들은 그냥 즐거워하는데, 우리 눈엔 다른 것도 보이잖아. 주민들의 불편함, 관광지화의 문제점."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염리동보다는 나은 것 같아. 최소한 동네가 살아있잖아. 사라지지 않고."
"그건 맞아. 재개발로 밀리는 것보다는 벽화로 살아남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완벽한 답은 없는 것 같아. 그냥 각자 선택의 문제고."
차이나타운을 빠져나와 개항장 쪽으로 걸었다. 인천 개항박물관, 인천아트플랫폼, 옛 일본영사관 건물들이 보였다.
"여기도 역사가 많네."
"응. 인천은 한국 근대사의 시작점이니까."
개항장 거리를 걸으며 역사 이야기를 나눴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며 외국 문물이 들어온 이야기, 일제강점기의 흔적들.
"아이들이 크면 이런 이야기도 이해하겠지."
해질 무렵, 네 식구는 인천역으로 돌아갔다. 역 앞 광장에 앉아 잠시 쉬었다.
"오늘 어땠어?"
민수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재미있었어! 또 오고 싶어!"
"좋아. 다음에 또 오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아이들은 곯아떨어졌다. 하루 종일 뛰어다녀서 피곤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좀 가벼웠네."
지혜가 조용히 말했다.
"응. 무겁게 생각할 필요 없는 여행이었어."
"그것도 필요한 것 같아. 매번 진지하고 무거울 순 없잖아."
민수가 동의하며 웃었다.
"맞아. 아이들에게는 그냥 즐거운 추억이면 되는 거고."
집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재우고, 두 사람은 오늘의 기록을 정리했다.
"사진 정말 많다."
지혜가 카메라를 확인하며 웃었다. 오늘만 400장 넘게 찍었다.
"피노키오, 백설공주, 무지개 계단... 다 찍었네."
사진들을 보며 하루를 되짚었다. 아이들의 환한 웃음, 알록달록한 벽화들,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던 주민들의 이야기.
"글 쓸 때 어떻게 써야 할까?"
민수가 고민하며 물었다.
"솔직하게 쓰면 되지. 아이들에게는 동화 같았지만, 우리 눈에는 좀 더 복잡하게 보였다고."
"그래도 부정적으로만 쓰긴 싫은데."
"당연하지. 긍정적인 면도 있었잖아. 쇠퇴하던 동네가 살아났고, 사람들이 찾아오고, 아이들이 행복해하고."
민수는 노트를 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송월동, 동화 속으로 떠난 하루'.
글에는 아이들의 즐거움과 부부의 성찰이 함께 담겼다. 동화 같은 풍경과 현실의 복잡함, 관광의 즐거움과 주민의 불편함.
"이번 글은 좀 다르네."
초고를 읽던 지혜가 말했다.
"어떻게?"
"가족 중심이야. 아이들 이야기가 많고, 우리 부부의 대화도 많고."
"송월동 자체가 그런 곳이었으니까. 가족 단위 관광지."
며칠 후, 서연이가 학교 숙제로 주말 일기를 써왔다.
"선생님이 칭찬하셨어!"
일기 제목은 '동화마을에 다녀와서'였다.
"토요일에 인천 송월동에 다녀왔다. 거기는 온통 동화 같았다. 피노키오도 있고 백설공주도 있었다. 무지개 계단이 제일 예쁘고 재미있었다. 동생이랑 사진도 많이 찍었다. 다음에 또 가고 싶다."
간단하지만 아이의 순수한 기쁨이 담긴 글이었다.
"잘 썼네."
"선생님이 사진도 보고 싶대. 다음에 가져가도 돼?"
"당연하지."
그날 저녁, 가족은 거실에 모여 송월동 사진들을 함께 봤다. TV 화면에 사진들을 띄워놓고 하나하나 감상했다.
"이거 기억나? 피노키오 코 만질 때."
"응! 진짜 코가 길었어!"
"이건 무지개 계단. 우리 다 같이 앉았지."
"다음엔 어디 가?"
준우가 물었다.
"글쎄, 어디가 좋을까?"
"나는 또 동화 같은 데!"
"나는 바다 보고 싶어."
아이들의 의견이 갈렸다. 민수와 지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둘 다 하자. 바닷가 가서 동화 같은 곳도 찾아보고."
"좋아!"
그날 이후, 송월동은 가족의 가벼운 나들이 코스가 되었다. 무거운 역사 탐방이 필요할 때는 을지로나 서촌으로, 가벼운 즐거움이 필요할 때는 송월동으로.
"아카이빙도 균형이 필요한 것 같아."
어느 날 지혜가 말했다.
"무슨?"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균형. 역사와 즐거움의 균형. 어른의 시선과 아이의 시선."
"맞아. 송월동이 그걸 알려준 것 같아."
부부의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그렇게 더 풍성해졌다. 진지한 기록도 있고, 즐거운 추억도 있고, 무거운 성찰도 있고, 가벼운 웃음도 있는.
송월동은 그 균형의 한 축이었다. 완벽하지 않지만 즐거운,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그런 공간.
1년 후, 가족은 다시 송월동을 찾았다. 아이들은 키가 더 컸고, 동화 캐릭터를 보는 눈도 조금 달라졌다.
"이거 어렸을 때 봤던 건데."
서연이가 피노키오 벽화 앞에서 말했다.
"그래. 1년 전에 왔었지."
"나 이제 다 커서 동화는 별로인데."
지혜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래도 추억은 남잖아. 네가 여기서 즐거워했던."
"그건 맞아."
아이들은 자라고, 동네는 변하고, 시간은 흐른다. 하지만 기록은 남는다. 사진과 글로, 기억과 추억으로.
송월동의 동화들도 그렇게 한 가족의 이야기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벽화는 바래겠지만, 그날의 웃음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부부는 그날도 카메라를 들었다. 1년 전과 같은 장소에서 가족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은 키가 컸고, 부모는 조금 나이가 들었지만, 웃음만큼은 여전했다.
송월동의 동화는 계속된다. 새로운 가족들이 찾아오고, 아이들이 웃고,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중 하나가 이 가족의 것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사랑스러운, 복잡하지만 행복한, 그들만의 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