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책 냄새 나는 시간 여행

헌책방 거리로의 초대

by seungbum lee



"배다리 헌책방 거리 알아?"
10월의 어느 저녁, 민수가 책을 읽다가 문득 말했다. 요즘 그는 서울과 인천의 오래된 동네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배다리? 인천에 있는 거?"
"응. 송월동이랑 가까워. 헌책방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래. 1950년대부터 있었던."
지혜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책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헌책방 거리는 매력적으로 들렸다.
"헌책방이 몇 개나 있는데?"
"예전엔 많았는데 지금은 몇 군데 안 남았대. 그래도 '집현전'이라고 1953년부터 운영한 곳도 있고. 그리고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래."
"도깨비?"
"응. 공유가 헌책방에서 책 읽던 장면 기억 안 나? 거기가 배다리야."
지혜의 눈이 반짝였다. 그 드라마를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났다.
"가자. 이번 주말에."
"애들은?"
"애들도 데려가. 서연이 요즘 책 읽기 좋아하잖아. 헌책방 구경하면 좋아할 것 같아."
토요일 오전, 네 식구는 다시 인천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동인천역에서 내렸다.
"여기가 배다리?"
역에서 나오니 오래된 상가 건물들이 보였다. 송월동의 알록달록함과는 완전히 다른, 회색빛 레트로 풍경이었다.
"지도 보니까 10분 정도 걸어야 해."
좁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 양쪽으로 낡은 건물들이 이어졌다. 오래된 간판, 녹슨 셔터, 페인트가 벗겨진 벽.
"여기 정말 옛날 느낌이다."
"60~70년대 인천이 이랬겠지."
몇 분 걷자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배다리 헌책방 거리'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다!"


책 속으로의 여행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 책 냄새가 났다. 오래된 종이와 먼지가 섞인, 헌책방 특유의 냄새였다.
"우와."
서연이가 눈을 크게 떴다. 골목 양쪽으로 작은 헌책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게 밖에까지 책들이 쌓여 있었다.
첫 번째로 들어간 곳은 '집현전'이었다. 1953년부터 운영했다는, 배다리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이었다.
"어서 오세요."
7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책상에 앉아 계셨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장부를 보고 계셨다.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천천히 봐요."
서점 안은 책으로 가득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장이 빼곡하고, 그 책장마다 책들이 꽉 차 있었다. 소설, 시집, 만화책, 참고서, 잡지까지.
"이 책들 다 몇 년 된 거예요?"
민수가 물었다.
"다양하지. 어떤 건 몇십 년 됐고, 어떤 건 몇 년 됐고. 여기 이 책은..."
할아버지가 한 권을 꺼내 보여주셨다. 1960년대에 나온 소설책이었다. 누런 종이에 옛날 글씨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이런 건 이제 구하기 힘들어요. 귀한 거예요."
서연이는 아동 도서 코너에서 옛날 동화책을 꺼내 보고 있었다. 『흥부와 놀부』, 『콩쥐 팥쥐』. 삽화도, 글씨체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엄마, 이거 진짜 옛날 책이야?"
"그래. 엄마 어렸을 때보다 더 옛날."
"신기하다."
준우는 만화책 코너에서 『보물섬』, 『슈퍼맨』 같은 옛날 만화를 들춰보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어 보이는데."
지혜는 시집 코너에서 윤동주, 한용운, 김소월 시집을 발견했다. 초판본은 아니었지만, 1970~80년대에 나온 오래된 판본들이었다.
"여보, 이거 봐. 윤동주 시집."
민수가 다가와 함께 책을 넘겼다. 서촌에서 윤동주 하숙집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갈까?"
"응. 서연이 주면 좋아할 것 같아."
책을 몇 권 골라 계산대로 갔다. 윤동주 시집, 옛날 동화책, 인천 역사에 관한 책.
"모두 얼마예요?"
"만 오천 원이에요."
새 책에 비하면 아주 저렴했다.
"여기 오래 하셨어요?"
"70년 됐어요. 내가 스무 살 때 시작했으니까."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예전에는 손님이 많았어요. 이 골목이 책방 거리였거든. 열 군데가 넘었어. 근데 지금은 우리 포함해서 서너 군데밖에 안 남았어."
"왜 줄었어요?"
"인터넷 때문이지. 요즘 누가 헌책을 사. 클릭 한 번이면 새 책도 싸게 사는데."
할아버지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젊은 사람들이 오면 기뻐요."
집현전을 나와 다른 헌책방들을 둘러봤다. '한미서점', '동화서점'. 각각의 서점마다 특색이 있었다. 어떤 곳은 문학 중심이었고, 어떤 곳은 만화책이 많았고, 어떤 곳은 학술서적이 주를 이뤘다.
"여기가 '도깨비' 촬영지래."
한 헌책방 앞에서 지혜가 말했다. 실제로 드라마 촬영 사진이 붙어 있었다. 공유가 책을 읽던 바로 그 장소였다.
"여기서 사진 찍자."
네 식구는 헌책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마치 드라마 한 장면 같았다.


숨은 보물 찾기
헌책방 거리를 빠져나와 '배다리 문화마을'로 향했다. 헌책방 골목에서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곳이었다.
"여기가 문화마을?"
골목은 더욱 좁아졌다. 낡은 건물들, 오래된 여인숙, 빈 가게들이 이어졌다.
"재개발 예정 지역 같은데."
실제로 곳곳에 '재개발 구역'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근데 여기에 미술관이 있다고?"
안내판을 보니 '배다리 미술관', '아트 스페이스', '작가 작업실' 같은 표시가 있었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찾아야겠네."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하나하나 찾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발견한 곳은 '배다리 문화마을 갤러리'였다. 낡은 2층 건물을 개조한 작은 갤러리였다.
"여기 문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니 사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배다리의 옛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들이었다.
"1960년대 배다리네."
사진 속에는 헌책방들이 가득한 골목,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아이들이 뛰노는 골목길이 담겨 있었다.
"지금이랑 완전 다르다."
"그때는 정말 활기찼겠다."
갤러리를 나와 다시 골목을 걸었다. 이번에는 '작은 미술관'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옛날 여인숙 건물 1층을 개조한 공간이었다.
"여기도 들어가 보자."
안에는 배다리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헌책방, 골목, 오래된 건물들을 그린 작품들이었다.
"작가님이 직접 그리신 거예요?"
젊은 작가가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네. 저는 이 동네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여기서 작업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배다리가 좋아서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곳이잖아요.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싶었어요."
작가의 말에 민수와 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우리도 비슷한 걸 하고 있어요. 서울이랑 인천 골목을 다니며 사진 찍고 글 쓰고."
"아, 그러세요? 좋은 일 하시네요. 기록하는 게 중요해요. 안 그러면 다 잊혀지니까."
작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배다리의 역사, 재개발 문제, 예술가들의 역할.
"여기 예술가들이 많아요?"
"몇 명 있어요. 임대료가 싸고, 조용해서 작업하기 좋거든요. 근데 재개발되면 다들 떠나야겠죠."
미술관을 나와 골목을 더 탐험했다. '작가의 방'이라는 작은 서점 겸 카페, '배다리 공방'이라는 도예 작업실, '숨은 갤러리'라는 지하 전시 공간.
"진짜 보물 찾기네."
준우가 신나서 말했다. 골목 구석구석을 살피며 숨어있는 문화 공간들을 찾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점심 때가 되어 '배다리 카페'라는 곳에 들어갔다. 옛날 주택을 개조한 작은 카페였다.
"여기요, 파스타 두 개, 크림 우동, 돈까스요."
카페 안은 레트로 소품으로 가득했다. 옛날 라디오, 축음기, 흑백 사진들.
"여기 분위기 좋다."
창밖으로는 배다리 골목이 보였다. 좁은 길, 낡은 건물, 그 사이를 걷는 몇 안 되는 사람들.
"배다리는 어떤 곳일까?"
지혜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헌책방 거리? 문화마을? 재개발 구역?"
"다 맞는 것 같아. 그리고 다 맞지 않은 것 같아."
음식을 먹으며 두 사람은 오전에 본 것들을 정리했다.
"집현전 할아버지 기억나?"
"응. 7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거잖아. 대단하다."
"근데 곧 사라질지도 모르잖아. 재개발되면."
"그게 안타까워. 70년 역사가 그냥 없어지는 거니까."


시간의 책갈피
오후에는 배다리 주변을 더 걸었다. '동인천 역전 시장'도 가보고, '송림동 숲'이라는 작은 공원도 들렀다.
"배다리는 섬 같아."
민수가 말했다.
"섬?"
"응. 주변은 다 현대화됐는데, 여기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아. 60~70년대 그대로."
"그래서 더 소중한 거겠지. 과거를 간직한 섬."
해질 무렵, 다시 헌책방 거리로 돌아갔다. 석양 빛에 물든 골목이 더욱 운치 있었다.
"서연아, 헌책방 어땠어?"
"좋았어. 옛날 책들이 신기했어. 엄마 아빠 어렸을 때도 이런 책 읽었어?"
"엄마 아빠는 좀 더 최근 거였지. 여기 책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 책들도 많아."
"할머니도 헌책방 다니셨을까?"
"아마 그랬을 거야. 옛날엔 새 책이 비쌌으니까 헌책을 많이 샀거든."
집현전 앞을 다시 지나가는데 할아버지가 문을 닫고 계셨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어주셨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
"그래요. 언제든 오세요. 책은 기다려주니까."
동인천역으로 걸어가는 길, 서연이가 산 윤동주 시집을 펼쳐 읽었다.
"엄마, 이 시 좋아."
"어떤 건데?"
"'또 다른 고향'. 짧은데 마음에 들어."
지혜는 딸의 모습을 보며 뿌듯했다. 오늘 배다리에서 산 책이 딸에게 의미가 되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 민수가 말했다.
"오늘 뭔가 특별했어."
"어떻게?"
"송월동이 즐거움이었다면, 배다리는... 깊이?"
"깊이?"
"응. 표면적으로는 그냥 낡은 동네인데, 파고들수록 이야기가 나오잖아. 헌책방의 역사, 예술가들의 꿈, 재개발의 그림자."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책이라는 매개가 특별했어. 다른 곳에서는 건물이나 음식을 봤다면, 오늘은 책을 통해 과거를 만난 거잖아."
집에 도착해서 오늘 산 책들을 정리했다. 윤동주 시집, 옛날 동화책, 인천 역사책,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1980년대 에세이집.
"이 책들이 새 집을 찾았네."
민수가 책장에 책을 꽂으며 말했다.
"응. 집현전에서 우리 집으로."
그날 밤, 민수는 오랫동안 글을 썼다. 배다리에 대해, 헌책방에 대해, 시간과 기억에 대해.
제목은 '배다리, 책 냄새 나는 시간 여행'.
"책 냄새?"
"응. 오늘 배다리에서 가장 강렬했던 게 그거야. 오래된 책 냄새. 종이와 먼지와 시간이 섞인."
글에는 집현전 할아버지와의 대화, 작은 미술관에서 만난 작가, 골목을 걸으며 느낀 것들이 담겼다.
"이번 글은 좀 서정적이네."
지혜가 초고를 읽으며 말했다.
"배다리가 그런 곳이었으니까. 조용하고, 느리고, 깊이가 있는."
며칠 후, 서연이가 학교 독서 시간에 배다리에서 산 윤동주 시집을 읽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어디서 구했냐고 물으셨어."
"뭐라고 했어?"
"인천 배다리 헌책방에서 샀다고 했어. 그랬더니 선생님이 거기 좋은 곳이라고 하시면서 반 친구들한테 헌책방 이야기를 해주셨어."
"그래?"
"응. 그래서 친구들이 나도 가보고 싶대."
지혜는 딸을 안아주며 웃었다.
"우리가 한 아카이빙이 퍼져나가는구나."
"아카이빙이 뭐야?"
"기록하는 거.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고, 사진 찍고, 글 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게 하는 거."
"나도 하고 싶어."
"넌 이미 하고 있어. 배다리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해준 것도 아카이빙이야."
그날 이후, 서연이는 자신만의 '골목 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 간 곳들을 그림과 글로 기록하는 노트였다.
을지로의 인쇄소, 성북동의 한옥, 은평한옥마을의 눈 내리는 풍경, 송월동의 무지개 계단, 그리고 배다리의 헌책방.
"잘 그렸다."
"고마워. 나도 엄마 아빠처럼 기록하고 싶어."
부부는 딸의 노트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들의 아카이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 달 후, 가족은 다시 배다리를 찾았다. 이번에는 서연이 친구와 그 가족도 함께였다.
"여기가 배다리야?"
"응. 헌책방 거리. 진짜 좋아."
서연이가 자랑스럽게 안내했다. 집현전으로 데려가고, 작은 미술관을 보여주고, 배다리 카페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서연이 덕분에 좋은 곳 알게 됐어요."
친구 엄마가 고마워했다.
"저희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렇게 함께 오니까 더 좋네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수가 말했다.
"우리 아카이빙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뭐가?"
"처음엔 우리 둘이었고, 그다음엔 가족이 됐고, 이제는 다른 가족들도 함께하고."
"좋은 거 아니야?"
"당연하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골목들을 기억해주면 좋잖아."
배다리는 그렇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민수 가족의 블로그를 통해, 서연이의 학교 발표를 통해, 입소문을 통해.
그리고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실제로 배다리를 찾았다. 헌책방에서 책을 사고, 작은 미술관을 둘러보고, 골목을 걸었다.
집현전 할아버지는 요즘 손님이 조금 늘었다며 기뻐하셨다.
"젊은 사람들이 오니까 좋아요. 우리 책방도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1년 후, 배다리 재개발 계획이 일부 수정되었다. 헌책방 거리는 보존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정말?"
뉴스를 본 지혜가 환호했다.
"응. 문화유산 가치를 인정해서 보존 구역으로 지정했대."
"다행이다. 집현전 할아버지 기뻐하시겠다."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재개발은 진행될 것이고, 많은 것들이 변할 것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헌책방들은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우리 아카이빙이 조금은 도움이 됐을까?"
민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도.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배다리를 기록하고, 알리고, 그래서 관심이 생긴 거니까."
그날 밤, 부부는 지난 1년간의 아카이빙을 정리했다. 을지로에서 시작해 후암동, 성북동, 익선동, 은평한옥마을, 염리동, 서촌, 송월동, 그리고 배다리까지.
"많이 다녔네."
"응. 그리고 많이 배웠어."
"뭘?"
"골목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게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
민수는 노트를 덮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밤, 어딘가에 또 다른 골목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품은 채 조용히 숨 쉬고 있는.
"다음은 어디 갈까?"
"천천히 생각하자. 급할 것 없어. 골목은 도망가지 않으니까."
배다리의 헌책방들처럼, 골목들은 기다려줄 것이다. 누군가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기억해주기를, 사랑해주기를.
그리고 이 가족은 계속 걸을 것이다. 한 걸음씩, 한 골목씩, 한 이야기씩. 끝나지 않는 여정, 깊어지는 사랑.
배다리에서 산 책들은 책장에 꽂혀 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누군가 꺼내 읽어줄, 그날을.
시간은 흐르지만 기록은 남는다. 사진과 글로, 책과 기억으로. 배다리의 책 냄새처럼,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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