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리단길, 도시 속에 숨은 보넷 한 자락

보넷길

by seungbum lee

서울 밖의 발견
"여보, 우리 이번엔 서울 밖으로 나가볼까?"
12월의 어느 주말 아침, 지혜가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을지로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시작한 후, 두 사람은 기록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새롭게 피어나는 것도 기록하기로 했으니까.
"서울 밖? 어디?"
"고양시 정발산동. 밤리단길이라고."
민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밤리단길? 이태원 리단길, 경리단길은 들어봤는데."
"응. 요즘 고양에서 제일 감성 있는 골목이래. 주택가인데 카페랑 맛집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분위기가 완전 달라졌대."
지혜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낮은 주택들 사이로 감각적인 카페 간판들이 보였다. 넓은 골목, 한적한 분위기, 그리고 어딘가 여유로운 느낌.
"서울 골목들이랑은 다른 분위기네."
"응. 서울은 뭔가 빠르고 북적이잖아. 근데 여기는 주택가 특유의 여유가 있대."
"보넷길은 뭐야?"
"밤리단길 옆 골목이래. 앤틱 샵들이 모여 있는 곳. 매년 앤틱 축제도 열리고."
민수는 사진들을 넘겨보다가 눈을 반짝였다.
"밤가시초가라고, 조선시대 초가집도 있어. 세련된 카페 골목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난다는 거야."
"그거 재미있겠는데."
"그치? 애들도 데려가자. 준우가 요즘 역사 수업에서 조선시대 하잖아."
토요일 아침, 네 식구는 차에 올랐다. 서울에서 고양까지는 30분 남짓이었다.
"고양이 생각보다 가깝네."
"응. 근데 분위기는 완전 달라. 기대해봐."
정발산동 인근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골목이 좁아 주차가 어렵다는 말을 미리 확인해뒀기 때문이다.
"여기서 걸어가면 돼. 10분 거리야."
차에서 내리자 공기가 달랐다. 서울보다 조용하고, 어딘가 느긋한 기운이 감돌았다.
"여기 좋다."
서연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밤리단길 간판이 보이면 다 온 거야."

골목의 첫인상
밤리단길 입구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넓지는 않지만 답답하지도 않은 골목. 양쪽으로 낮은 건물들이 이어졌는데, 그 안에 작은 카페와 음식점들이 숨어 있었다.
"서울 골목들이랑 다른 게 뭔지 알아?"
민수가 걸으며 말했다.
"여유?"
"응. 뭔가 숨을 쉬는 것 같아. 건물들 사이에 공간이 있고."
서울의 골목들은 빽빽했다. 을지로는 쇳가루로 가득하고, 익선동은 사람으로 가득하고, 서촌은 역사로 가득했다. 하지만 밤리단길은 달랐다. 비어있는 것 같으면서도 채워진, 그런 분위기였다.
"저기 카페 있다."
서연이가 가리킨 곳에는 '정발산 커피'라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통유리 창으로 안이 훤히 보였다.
"브런치 먹자. 배고파."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공간에 테이블이 서너 개였다. 창가 자리에 앉으니 밤리단길 골목이 한눈에 보였다.
"에그베네딕트 세트 두 개, 아이 브런치 두 개요."
주문을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카페 안은 감각적이었다. 원목 테이블, 빈티지 소품들, 식물들.
"여기 인테리어 예쁘다."
"주택가 카페라서 그런가. 뭔가 집 같은 분위기야."
음식이 나왔다. 에그베네딕트 위에 홀란다이즈 소스가 풍성하게 올라가 있었다.
"맛있다!"
준우가 먼저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때?"
"대박."
브런치를 먹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골목을 걷고 있었다. 대부분 커플이거나 가족 단위였다.
"여기는 을지로나 염리동이랑 분위기가 완전 달라."
지혜가 말했다.
"어떻게?"
"거기는 오래된 것들이 살아남으려고 버티는 느낌이었잖아. 근데 여기는... 새로운 것들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느낌?"
"맞아. 아직 과하게 상업화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 익선동처럼 관광지화되기 전 단계랄까."
카페를 나와 보넷길로 향했다.


앤틱의 골목, 시간의 조각들
밤리단길에서 몇 골목 들어가자 보넷길이 나왔다.
"여기다."
분위기가 또 달랐다. 밤리단길이 세련되고 트렌디했다면, 보넷길은 조금 더 아날로그적이었다. 작은 앤틱 샵들이 골목을 따라 이어졌다.
"엔틱 샵이다!"
서연이가 첫 번째 가게 앞에서 멈췄다. 진열창 너머로 오래된 소품들이 가득했다. 빈티지 찻잔, 낡은 시계, 레트로 포스터들.
"들어가볼까?"
안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물건들의 냄새가 났다. 배다리 헌책방에서 맡았던 그 냄새와 비슷했다. 시간이 쌓인 냄새.
"이거 뭐야?"
준우가 낡은 라디오를 가리켰다.
"라디오야. 아빠 어릴 때는 이런 거로 음악 들었어."
"이렇게 크게?"
"응.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었으니까."
주인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구경 천천히 하세요. 손 대도 괜찮아요."
"여기 물건들 다 어디서 오는 거예요?"
"전국 각지에서요. 직접 발로 뛰어서 찾아오기도 하고, 사람들이 가져오기도 하고."
"앤틱 축제도 하신다고요?"
"네. 매년 봄에 벼룩시장 형태로 해요. 동네 사람들도 참여하고, 다른 지역 셀러들도 오고. 이 골목 전체가 시장이 되죠."
"재미있겠는데요."
"그게 이 골목의 특별함이에요. 축제 때만 특별한 게 아니라, 평소에도 창가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거든요."
지혜는 오래된 찻잔 세트를 발견했다. 꽃무늬가 그려진 영국식 찻잔이었다.
"이거 얼마예요?"
"삼만 원이요. 상태 좋아요."
"살게요."
계산을 하며 민수가 말했다.
"여기 물건들 보면서 느낀 거 있어?"
"뭐?"
"을지로에서 사라지는 기술들, 배다리에서 사라지는 책들. 근데 여기서는 그 오래된 것들이 상품이 돼서 살아남고 있잖아."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것을 보존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구나. 박물관에 넣거나, 재활용하거나, 아니면 이렇게 앤틱으로 가치를 부여하거나."
보넷길을 더 걸으며 앤틱 샵들을 구경했다. 각각의 가게마다 주인의 취향이 담겨 있었다. 어떤 곳은 주방 용품, 어떤 곳은 의류, 어떤 곳은 가구.
"여기 1인 셰프 식당 있대."
지혜가 한 작은 간판 앞에서 멈췄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일식 식당이었다.
"예약해야 되네. 다음에 오면 미리 예약하고 오자."
"좋아. 다음 달에 또 오자. 이번엔 예약하고."
그때 골목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풍경이 달라졌다.
"저기 뭐야?"
준우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감각적인 카페들과 앤틱 샵들 사이에 갑자기 초가집이 나타났다.
"저게 밤가시초가야."

초가집 앞에서
네 식구는 밤가시초가 앞에 멈춰 섰다. 조선시대 초가집이 21세기 골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진짜 옛날 집이야?"
"응. 조선시대 민속 문화재래."
낮은 담장, 볏짚으로 이은 지붕, 오래된 나무 대문. 주변의 세련된 건물들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신기하다."
준우가 초가집을 만지려 했다.
"만지면 안 돼. 문화재니까."
안내판을 읽었다. '밤가시초가. 이 동네 이름인 밤리단길의 어원이 되는 장소. 조선시대 이 지역에 밤나무가 많아 밤가시골이라 불렸으며...'
"밤리단길이 밤나무에서 나온 이름이었구나."
"그래. 그냥 감성 골목 이름이 아니었어."
지혜가 초가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 프레임 안에 초가집과 뒤로 보이는 현대적인 카페 간판이 함께 담겼다.
"이거 보면 서울 골목들 생각나."
민수가 사진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을지로도 그랬잖아. 1960년대 골목과 현대 도시가 공존하는 것. 서촌도, 배다리도. 여기도 조선시대와 2020년대가 함께 있어."
"서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네. 고양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모든 동네가 그런 것 같아. 어디를 가도 시간의 층위가 있어."
초가집을 둘러보며 가족은 이야기를 나눴다. 준우에게 조선시대 초가집의 구조를 설명하고, 서연이에게 왜 볏짚으로 지붕을 만들었는지 이야기했다.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서연이가 물었다.
"추웠겠지. 근데 따뜻하기도 했을 것 같아. 온돌 있었으니까."
"온돌은 은평한옥마을에서 배운 거잖아."
"맞아. 기억하고 있었네."
지혜가 딸을 보며 웃었다. 1년 넘게 다닌 골목 여행이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이 되고 있었다.
초가집을 뒤로하고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보넷 커피'라는 이름의 작은 카페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빈티지 소품들로 가득했다. 앤틱 시계, 오래된 LP판, 빈티지 카메라들.
"아메리카노 두 잔, 핫초코 두 개요."
창가에 앉았다. 창밖으로 보넷길 골목이 보였다. 사람들이 앤틱 샵 창가를 기웃거리며 걷고 있었다.
"여기는 어떤 것 같아?"
민수가 지혜에게 물었다.
"음... 가볍게 행복한 곳?"
"가볍게?"
"응. 을지로는 무겁고, 서촌은 깊고, 배다리는 서정적이잖아. 근데 여기는 그냥 가볍게 즐거워. 좋은 의미로."
"거안사위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랄까."
두 사람은 웃었다.
"근데 생각해보면 여기도 위기가 있을 수 있어."
민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벌써?"
"응. 지금은 조용한 주택가 골목이지만, 유명해지면 사람이 몰리고, 임대료 오르고, 원래 있던 가게들 나가고. 그 패턴 알잖아."
"우리가 을지로에서 배운 거."
"그래. 근데 이번엔 미리 알고 보는 거잖아. 거안사위."
"맞아. 평안할 때 위기를 대비하는 거."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은 주변을 다시 바라봤다. 감각적인 카페들, 앤틱 샵들, 1인 셰프 식당들. 그리고 그 사이에 밤가시초가.
"여기가 오랫동안 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하게 유명해지지 않는 것? 적당히 알려지고, 동네 사람들이 계속 살 수 있고."
"균형이네."
"응. 모든 골목이 그 균형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카페를 나와 마지막으로 골목을 한 바퀴 더 걸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겨울 석양이 골목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사진 찍자."
가족은 밤가시초가를 배경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조선시대 초가집과 21세기 가족.
"여기 또 오고 싶어."
서연이가 말했다.
"그래, 봄에 앤틱 축제 때 다시 오자."
"예약도 하고?"
"응. 1인 셰프 식당도 예약하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 준우가 말했다.
"아빠, 밤가시초가에서 살던 사람들도 골목 좋아했을까?"
"좋아했겠지. 자기 동네니까."
"우리도 골목 좋아하잖아."
"그래. 우리도 골목 좋아해."
"근데 왜 좋아해?"
민수는 잠시 생각했다.
"글쎄. 골목에는 이야기가 있거든. 사람들의 이야기, 시간의 이야기. 큰길에는 없는 것들이."
"나도 이야기 좋아해."
"알아. 그래서 같이 다니는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지혜가 노트를 꺼냈다.
"제목 뭘로 할까?"
"'밤리단길, 도시 속에 숨은 보넷 한 자락'."
"보넷?"
"응. 보넷이 옛날 여자들 모자잖아. 뭔가 고풍스럽고 여유로운 느낌. 밤리단길 분위기랑 어울리는 것 같아."
"좋은데."
집에 도착해서 오늘의 기록을 정리했다. 사진이 많았다. 브런치 카페의 에그베네딕트, 앤틱 샵의 오래된 소품들, 보넷길의 골목 풍경, 그리고 밤가시초가.
"오늘 사진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게 뭐야?"
"이거."
지혜가 한 장을 골랐다. 서연이가 밤가시초가 앞에서 찻잔을 들고 서 있는 사진이었다. 뒤로는 초가집, 옆으로는 현대적인 카페 간판.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함께 있네."
"응. 그게 골목의 매력인 것 같아. 어느 시대나."
민수는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밤리단길의 여유, 보넷길의 앤틱, 밤가시초가의 역사, 그리고 균형의 중요성.
마지막 문장을 쓰며 민수는 창밖을 바라봤다.
"골목 여행 벌써 1년이 넘었네."
지혜가 달력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을지로에서 시작해서 벌써 여기까지."
"여기서 배운 게 뭔지 알아?"
"뭐?"
"아름다운 것도, 슬픈 것도, 위험한 것도, 여유로운 것도. 다 골목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게 우리 삶이랑 닮아있다는 것."
민수가 노트를 덮으며 미소 지었다.
"내년에도 계속 걷자."
"당연하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이 너무 많아."
"어디 갈까?"
"수원 행궁동? 전주 한옥마을? 아니면 부산 감천문화마을?"
"다 가자. 서울 넘어서, 전국으로."
"우리 아카이빙의 확장."
두 사람은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밤리단길이 가르쳐준 것처럼,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거안사위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계속 걸어갈 것이다.
한 골목씩, 한 이야기씩, 한 기억씩.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은 오늘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아이들의 아이들이 태어나도.
골목은 기다려준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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