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핀 외침들
색깔의 골목으로
"삼송에도 골목이 있어?"
1월의 어느 주말, 서연이가 물었다. 겨울방학을 맞아 가족은 새로운 골목을 찾고 있었다.
"응. 그래피티 골목이래. 벽화가 엄청 많대."
지혜가 태블릿으로 사진들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화려한 색채의 그래피티들이 가득했다. 삼송동 주택가 골목의 담벼락마다 예술 작품들이 그려져 있었다.
"우와, 진짜 화려하다!"
준우가 눈을 반짝였다. 송월동 동화마을의 귀여운 벽화와는 달랐다. 더 강렬하고, 더 자유분방했다.
"밤리단길이랑 가까워?"
민수가 물었다.
"응. 차로 10분 거리. 같은 고양시야. 밤리단길 갔다가 여기도 들르면 좋을 것 같아."
"좋아. 가자."
지난달 밤리단길을 다녀온 후, 가족은 고양시에 관심이 생겼다. 서울과 가깝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도시.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작은 골목들.
토요일 오전, 네 식구는 다시 고양으로 향했다. 겨울 햇살이 따사로웠다.
"삼송역 근처야. 주차는 역 주차장에 하면 돼."
차를 세우고 걸어 나왔다. 삼송역 주변은 평범한 주택가였다. 신축 아파트와 낮은 빌라들이 섞여 있었다.
"여기가 맞아? 그래피티 골목이?"
"지도 보니까 조금 더 걸어야 해. 주택가 안쪽이래."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몇 분 걷자 갑자기 풍경이 달라졌다.
"저기다!"
담벼락 하나가 온통 그래피티로 뒤덮여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형형색색의 스프레이 페인트가 벽을 채우고 있었다.
"시작이네."
벽을 캔버스 삼아
첫 번째 그래피티는 거대한 호랑이였다. 담벼락 전체를 차지한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멋있다!"
준우가 환호했다.
"이거 누가 그린 거야?"
오른쪽 아래 구석에 작은 서명이 있었다. 'JACE 2024'.
"작가 이름인가 봐."
사진을 찍었다. 호랑이 앞에서 포효하는 포즈를 취하는 준우, 웃으며 손을 흔드는 서연이.
"다음 벽 보러 가자."
골목을 따라 걸으며 하나씩 그래피티를 감상했다. 추상적인 패턴, 인물화, 동물 그림, 문자 디자인. 매 벽마다 스타일이 달랐다.
"작가가 여러 명인가 봐."
어떤 벽에는 세련된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고, 어떤 벽에는 거친 붓터치의 추상화가, 어떤 벽에는 정교한 글자 디자인이 있었다.
"염리동 벽화랑은 완전 다르네."
지혜가 말했다.
"어떻게?"
"염리동은 뭔가 계획적이고 정제된 느낌이었잖아. 근데 여기는... 날것?"
"맞아. 그래피티가 원래 그런 거니까. 거리 예술이잖아."
민수는 한 벽 앞에 멈춰 섰다. 커다랗게 쓰인 문구가 있었다.
"DREAM BIGGER"
"꿈을 더 크게 꿔라."
"멋진 문구네."
서연이가 노트에 적었다. 요즘 그녀는 골목에서 본 문구들을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골목은 생각보다 길었다. 한 블록, 두 블록. 계속 걸으며 그래피티를 감상했다.
"여기는 송월동처럼 동화 느낌도 아니고, 밤리단길처럼 세련된 느낌도 아니야."
지혜가 중얼거렸다.
"그럼 뭐야?"
"날것. 자유. 표현. 뭐랄까... 억눌리지 않은 느낌?"
"그래피티가 원래 그렇잖아. 허락받지 않고 그리는 거니까."
"근데 여긴 합법 그래피티 구역이잖아."
"응. 구청에서 지정한 곳이래. 작가들이 자유롭게 그릴 수 있게."
한 벽 앞에는 젊은 청년이 스프레이를 들고 작업 중이었다.
"실제로 그리는 중이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작업 중이신데 방해해도 될까요?"
청년이 마스크를 벗고 웃었다.
"괜찮아요. 구경하세요."
"여기서 자주 그리세요?"
"네. 일주일에 한두 번 와요. 여기가 합법 구역이라 마음 편하게 그릴 수 있거든요."
"합법 구역이 아니면?"
"불법이죠. 단속 당하고, 벌금 내고."
청년은 다시 벽을 향했다. 스프레이를 휘두르며 곡선을 그렸다. 순식간에 새의 날개가 나타났다.
"와, 빠르다."
"연습 많이 했어요. 그래피티는 속도가 중요하거든요."
"왜요?"
"원래는 몰래 그리는 거니까. 빨리 그리고 도망가야죠."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여긴 합법이니까 천천히 그릴 수 있어요. 좋죠."
작업하는 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스프레이가 쉭쉭 소리를 내며 벽을 채웠다. 색이 겹치고, 선이 이어지며, 점점 그림이 완성됐다.
"완성됐어요."
벽에는 날개를 펼친 새가 그려져 있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
"멋있다."
"감사합니다. 사진 찍으세요."
새 그림을 배경으로 가족 사진을 찍었다.
"이 그림은 얼마나 오래 남아있어요?"
서연이가 물었다.
"글쎄요. 다른 작가가 덮어 그릴 때까지? 아니면 비바람에 지워질 때까지?"
"사라지는 거예요?"
"그게 그래피티예요. 영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더 소중하죠."
사라지는 예술, 남는 기억
청년과 헤어지고 골목을 더 걸었다. 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영원하지 않아서 소중하다."
민수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본 골목들도 그렇지."
지혜가 대답했다.
"을지로 철공소도 사라졌고, 후암동도 변하고 있고, 염리동도."
"근데 차이가 있어."
"뭐?"
"골목은 억지로 사라지는 거고, 그래피티는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거."
지혜가 멈춰 섰다.
"무슨 말이야?"
"골목은 재개발로 강제로 밀리잖아. 근데 그래피티는 시간이 지나면서, 새 작품으로 덮이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거지. 작가들도 그걸 알고 받아들여."
"그게 더 건강한 건가?"
"모르겠어. 근데 적어도 더 평화로운 것 같아."
한 벽 앞에 멈췄다. 오래된 그래피티였다. 색이 바래고, 페인트가 벗겨지고 있었다.
"이거 몇 년 됐을까?"
"한 3~4년? 아니면 더?"
바래진 그래피티 위로 새로운 그래피티가 일부 덮여있었다. 옛것과 새것이 겹쳐진 모습.
"시간의 층위네."
"응. 을지로에서 본 것처럼."
준우가 벽을 손으로 만지려 했다.
"만지지 마. 페인트 묻어."
"아빠, 이거 왜 계속 그려?"
"응?"
"한 번 그리면 끝이지. 왜 자꾸 새로 그려? 덮어씌우고."
민수는 아들의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
"그게... 표현하고 싶은 게 계속 생기니까? 아까 그 작가처럼."
"근데 옛날 그림은 사라지잖아."
"그래. 사라지지."
"아깝지 않아?"
"아까울 수도 있지. 근데 새로운 걸 그리려면 옛것을 지워야 하잖아."
준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 모양이었다.
점심때가 되어 근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삼송 칼국수'라는 동네 식당이었다.
"칼국수 네 개요."
음식을 기다리며 오전에 본 것들을 정리했다.
"그래피티 골목은 다른 곳들이랑 느낌이 많이 다르네."
서연이가 말했다.
"어떻게?"
"다른 데는 뭔가 지키려는 느낌이었어. 옛날 것을 보존하고, 기억하고. 근데 여기는 계속 변하는 느낌?"
"맞아. 잘 봤다."
민수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피티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예술이야. 고정되지 않고, 계속 바뀌는 거."
칼국수가 나왔다. 따뜻하고 구수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지혜가 말을 꺼냈다.
"골목도 그래피티처럼 자연스럽게 변할 수 있었을 텐데."
"응?"
"재개발로 억지로 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바뀌게 둘 수도 있었잖아. 새 건물 하나씩 들어서고, 옛 건물은 리모델링하고."
"그러면 옛것과 새것이 공존할 수 있었겠네."
"응. 그래피티처럼."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어려운 게, 도시는 그래피티만큼 자유롭지 않아. 법도 있고,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안타깝다."
벽에 남은 것들
오후에는 골목을 천천히 다시 걸었다. 오전에 보지 못한 그래피티들을 찾아서.
한 벽에는 커다란 눈이 그려져 있었다. 벽 전체를 차지한 눈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워."
준우가 뒤로 물러섰다.
"왜 눈을 그렸을까?"
"지켜보는 거 아닐까? 우리를."
"누가?"
"예술이? 아니면 사회?"
또 다른 벽에는 문구가 있었다.
"YOUR VOICE MATTERS"
"너의 목소리는 중요해."
서연이가 또 노트에 적었다.
"이 문구 좋다."
"왜?"
"목소리를 내라고 하잖아. 그래피티도 그런 거 같아. 벽에 목소리를 내는 거."
민수는 딸을 보며 놀랐다. 13살 아이가 그래피티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맞아. 그래피티는 목소리야.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골목 끝자락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 벤치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여기서 쉬어가자."
앉아서 왔던 골목을 되돌아봤다. 알록달록한 벽들이 이어져 있었다.
"1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지혜가 말했다.
"뭘?"
"우리가 이렇게 골목을 다니고, 사진 찍고, 글 쓰고, 아이들이랑 함께 역사를 배우고."
"나도. 그냥 을지로 인쇄소 구경 한번 가자고 한 게 이렇게 될 줄."
"근데 좋아.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시간이 된 것 같아."
서연이와 준우는 벤치에서 뛰어내려 그래피티 앞에서 놀고 있었다. 벽을 배경으로 춤추고, 포즈 취하고, 웃고.
"저 모습도 기록이네."
민수가 사진을 찍었다. 그래피티 앞에서 노는 아이들, 겨울 오후의 햇살, 평화로운 순간.
"삼송 그래피티 골목은 우리한테 뭘 가르쳐준 것 같아?"
한참 후 지혜가 물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응?"
"을지로에서 우리가 배운 건 거안사위였잖아. 평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는 것. 근데 여기서 배우는 건... 변화는 자연스러운 거고, 영원한 건 없다는 것?"
"그래피티처럼."
"응. 덮어씌워지고, 바래지고, 사라지고. 근데 그게 나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아카이빙도 언젠가 사라지겠네."
"아마도. 우리가 죽으면, 블로그 사라지면."
"그래도 괜찮아?"
민수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괜찮아. 기억은 남을 거야. 사진은 남을 거고, 아이들 기억 속에도."
"그리고 우리가 만난 사람들 기억 속에도."
"맞아."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겨울 해는 짧았다.
"돌아갈까?"
"응."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 마지막으로 한 그래피티를 봤다.
"ART IS FREEDOM"
"예술은 자유다."
"멋진 마무리네."
차에 올라타며 준우가 물었다.
"다음엔 어디 가?"
"글쎄. 어디 가고 싶어?"
"나는 또 그림 있는 데!"
"나는 책 있는 데."
서연이가 끼어들었다.
"그럼 둘 다 있는 데 찾아보자."
집으로 가는 길, 민수와 지혜는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삼송 그래피티는 가벼웠어."
"응. 무겁지 않고."
"근데 의미는 있었어."
"변화, 자유, 표현."
"그리고 영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집에 도착해서 사진을 정리했다. 호랑이 그래피티, 날개 펼친 새, 거대한 눈, 그리고 수많은 문구들.
"제목 뭘로 할까?"
"'삼송 그래피티 골목, 벽에 핀 외침들'?"
"외침?"
"응. 그래피티가 외침 같았어. 작가들의 외침. 자유를 향한, 표현을 향한."
"좋다."
민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피티의 의미, 변화의 아름다움, 영원하지 않음의 가치.
"이번 글은 좀 철학적이네."
지혜가 초고를 읽으며 말했다.
"그래피티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
며칠 후,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반응은 뜨거웠다.
"저도 삼송 그래피티 다녀왔는데, 이런 깊은 의미가 있는 줄 몰랐어요."
"아이들과 함께 가서 변화에 대해 이야기 나눠야겠어요."
"그래피티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네요. 감명 깊었습니다."
한 달 후, 가족은 다시 삼송을 찾았다. 그동안 변한 게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저기, 새 그림 있다!"
지난번 청년이 그린 새 그림 옆에 새로운 그래피티가 생겼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었다.
"벌써 변했네."
"그래피티니까."
그리고 한 벽은 완전히 새 그림으로 덮여 있었다. 지난번에 봤던 문구는 사라지고, 추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저 문구 좋아했는데."
서연이가 아쉬워했다.
"사진 남아있잖아. 그리고 네 노트에도."
"맞아."
그날 서연이는 또 하나를 배웠다. 기록의 중요성을. 사라지는 것을 기억하는 법을.
삼송 그래피티 골목은 그렇게 계속 변했다. 매일, 매주, 매달. 새로운 작품이 생기고, 옛 작품은 사라지고.
하지만 한 가족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날 본 호랑이, 날개 펼친 새, 거대한 눈, 그리고 수많은 외침들.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은 계속되었다. 이제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삶의 철학이고, 가족의 역사이고, 아이들의 교육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삼송 그래피티처럼, 영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고. 그리고 그 기억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고.
벽에 핀 외침들은 오늘도 울려 퍼진다. 누군가의 귀에, 누군가의 마음에.
그리고 그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래피티는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