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남긴 맛
역사가 담긴 한 그릇
"부대찌개 먹으러 의정부까지 가?"
2월의 어느 토요일, 민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혜가 아침부터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를 검색하고 있었다.
"응. 그냥 부대찌개가 아니야. 원조 부대찌개."
"원조?"
"부대찌개가 의정부에서 시작됐대. 6.25 전쟁 이후 미군 부대 근처에서."
민수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전쟁이랑 관련이 있어?"
"응. 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이랑 소시지로 찌개를 끓여 먹기 시작한 게 부대찌개의 시작이래. 그게 의정부였고."
"그럼 음식에 역사가 담겨있는 거네."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보고 싶었어. 우리가 을지로에서 산업을 봤고, 서촌에서 문학을 봤고, 배다리에서 책을 봤잖아. 이번엔... 음식?"
"음식으로 역사를 보는 거."
"맞아."
아이들을 불렀다.
"애들아, 오늘 의정부 가서 부대찌개 먹을 거야."
"부대찌개?"
준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햄이랑 소시지 들어간 찌개. 너 좋아하잖아."
"좋아!"
"그리고 거기 부대찌개 거리라고, 식당들이 쭉 모여 있대. 구경도 하고."
"또 골목 여행이네!"
서연이가 웃으며 말했다.
한 시간 후, 네 식구는 의정부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오니 '부대찌개 거리 이쪽' 표지판이 보였다.
"유명한가 봐. 표지판까지 있네."
표지판을 따라 10분쯤 걸으니 거리가 나타났다.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 아치형 간판이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여기다!"
식당 거리의 풍경
거리로 들어서자 양쪽으로 부대찌개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오뎅식당', '고향부대찌개', '오뚜기부대찌개', '신흥부대찌개'. 모두 수십 년 역사를 자랑하는 곳들이었다.
"어디로 갈까?"
식당마다 손님들로 북적였다. 토요일 점심시간이라 더 붐볐다.
"저기 '오뎅식당' 어때? 원조라고 써있어."
간판에 '1959년 창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60년 넘었네. 가보자."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홀에 테이블이 빼곡했고, 거의 다 찬 상태였다.
"네 명이요."
자리를 안내받아 앉았다.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1960~70년대로 보이는 흑백 사진들. 미군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옛날 식당 모습.
"진짜 오래됐구나."
"메뉴판 봐. 부대찌개 하나만 있어."
정말이었다. 메뉴는 부대찌개 하나뿐이었다. 크기만 선택할 수 있었다.
"부대찌개 대(大) 하나요."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손님들은 다양했다. 가족 단위, 커플, 친구들.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도 보였다.
"여기 유명한가 봐."
"응. 부대찌개 거리 자체가 관광 명소래."
곧 부대찌개가 나왔다. 커다란 냄비에 햄, 소시지, 스팸, 베이컨, 떡, 라면, 콩, 김치가 가득 들어있었다.
"우와!"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매콤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맛있겠다."
불을 켜서 더 끓였다. 국물이 빨개지며 재료들이 익어갔다.
"먹자."
첫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얼큰하고 고소하고 감칠맛이 났다.
"진짜 맛있다!"
준우가 햄을 집어 먹으며 환호했다.
"이게 원조 부대찌개구나."
밥을 말아 먹으니 더 맛있었다. 매콤한 국물에 밥이 쏙쏙 들어갔다.
"근데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도 해."
민수가 말했다.
"뭐가?"
"전쟁 때문에 생긴 음식이잖아. 슬픈 역사에서 나온 건데, 지금은 이렇게 맛있게 먹고 있어."
지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난과 전쟁의 산물인데, 지금은 K-푸드가 됐지."
"역사가 음식이 되고, 음식이 문화가 되는 거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배가 불렀다.
"이제 뭐 해?"
"거리 좀 걸어보자. 다른 식당들도 구경하고."
부대찌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식당마다 특색이 있었다. 어떤 곳은 전통 방식을 고집하고, 어떤 곳은 퓨전 스타일로 변형했다.
한 식당 앞에는 부대찌개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었다.
"여기 읽어봐."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의정부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며 이 지역에는 미군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가난했던 사람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 소시지 등을 구해 김치와 고추장으로 끓여 먹었습니다. 이것이 부대찌개의 시작이며, 의정부가 원조입니다."
"전쟁 이야기구나."
서연이가 조용히 말했다.
"응. 슬픈 시작이었어."
역사 속의 맛
거리 끝에는 '부대찌개 박물관'이라는 작은 전시관이 있었다.
"박물관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입장료는 무료였다.
전시관에는 부대찌개의 역사가 사진과 자료로 전시되어 있었다. 1950년대 의정부 사진, 미군 부대 사진, 초창기 부대찌개 식당들.
"여기 봐."
한 코너에는 당시 사용했던 조리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낡은 냄비, 주걱, 그릇들.
"진짜 옛날 거네."
또 다른 코너에는 부대찌개의 변천사가 설명되어 있었다.
"1950년대: 미군 부대 잉여 식품으로 시작
1960년대: 의정부 일대에 부대찌개 식당 증가
1970년대: 전국적으로 확산
1980년대: 메뉴 다양화
1990년대 이후: K-푸드로 세계화"
"가난의 음식에서 세계적 음식이 됐네."
민수가 감탄하며 말했다.
영상 코너에서는 옛날 뉴스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1970년대로 보이는 영상에서 한 할머니가 인터뷰하고 있었다.
"그때는 먹을 게 없었어요. 미군 부대에서 나온 거라도 얻어다가 끓여 먹었죠. 그게 별미였어요."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젊은이들은 모를 거예요. 얼마나 배고팠는지."
지혜는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은 맛있는 음식이지만, 당시에는 생존의 문제였구나.
전시관을 나오며 서연이가 물었다.
"엄마, 그때 사람들 정말 많이 힘들었어?"
"응. 전쟁 끝나고 모든 게 부족했어.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
"그래서 미군 부대 음식을 먹은 거야?"
"그게 있어서 다행이었던 거지. 그것마저 없었으면..."
말을 잇지 못했다.
거리를 다시 걸으며 민수가 말했다.
"음식에는 시대가 담기는 것 같아."
"응?"
"을지로에 기술의 역사가 담겼고, 서촌에 문학의 역사가 담겼다면, 여기는 생존의 역사가 담긴 거지."
"부대찌개 한 그릇에."
"맞아."
한 오래된 식당 앞을 지나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의자에 앉아 계셨다.
"저 식당 주인이신가 봐."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 어서 오세요. 식사하고 가세요."
"이미 먹었어요. 그냥 구경하러 왔어요."
"그래요? 고마워요."
"여기 오래 하셨어요?"
"50년 됐어요. 내가 스물다섯 때 시작했으니까."
할머니는 멀리 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이 거리가 정말 북적였어요. 미군들도 많이 오고, 동네 사람들도 오고. 지금은 옛날만 못하지만."
"부대찌개를 처음 만들 때 어떠셨어요?"
"처음엔 부끄럽기도 했어요. 미군 부대 음식 얻어다가 끓이는 거니까. 근데 배고픈데 어쩌겠어요. 그게 전부였으니."
"지금은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니까."
할머니가 웃었다.
"자랑스럽죠. 우리가 만든 게 이렇게 됐으니. 근데 가끔은 그때 생각도 나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맛으로 기억하는 역사
오후가 되어 거리 끝의 작은 공원에 앉았다. '부대찌개 거리 기념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공원 한쪽에는 조형물이 있었다. 커다란 냄비 모양의 조형물에 햄과 소시지가 형상화되어 있었다.
"여기서 사진 찍자."
가족 사진을 찍었다. 조형물을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 쉬며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부대찌개 거리는 어땠어?"
민수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맛있었어!"
준우가 즉답했다.
"나는 슬프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
서연이가 말했다.
"왜?"
"전쟁 때문에 생긴 음식인데, 지금은 다들 좋아하잖아. 슬픈 시작이 행복한 결과가 된 거 같아."
민수와 지혜는 눈을 마주쳤다. 딸이 점점 깊이 생각하게 됐다.
"잘 봤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하지."
"근데 슬픔을 잊으면 안 돼요."
서연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맞아. 잊으면 안 돼. 그래서 기억하는 거야. 부대찌개를 먹을 때마다."
지혜가 노트를 꺼냈다.
"오늘 기록 어떻게 할까?"
"음식 중심으로?"
"응. 근데 단순한 맛집 소개가 아니라, 역사와 함께."
"을지로에서 배운 거처럼. 겉모습만이 아니라 속 이야기까지."
해가 기울 무렵, 네 식구는 다시 거리를 걸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며 식당들에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저녁도 부대찌개?"
"배불러. 다음에 오자."
"응. 다음엔 다른 식당 가보고."
의정부역으로 걸어가는 길, 민수가 말했다.
"오늘 느낀 게 뭔지 알아?"
"뭔데?"
"역사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 을지로 같은 특별한 곳만이 아니라, 이렇게 식당 거리에도."
"그리고 그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고."
"사진으로, 글로, 그리고 맛으로."
지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대찌개는 맛으로 기억하는 전쟁이네."
집에 도착해서 오늘의 기록을 정리했다. 사진은 많지 않았다. 식당 외관, 부대찌개 한 그릇, 박물관 전시물, 조형물.
"사진이 별로 없네."
"이번엔 경험이 중심이었으니까. 먹는 거, 이야기 듣는 거."
민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 전쟁이 남긴 맛'.
글에는 부대찌개의 역사, 할머니와의 대화, 박물관에서 본 것들이 담겼다. 그리고 전쟁의 슬픔이 어떻게 음식으로 승화됐는지.
"이번 글 좀 무겁지 않아?"
지혜가 초고를 읽으며 물었다.
"음식 이야기니까 가볍게 쓸까 했는데, 그러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맞아. 부대찌개는 그냥 음식이 아니니까."
며칠 후 블로그에 글을 올리자, 예상치 못한 댓글들이 달렸다.
"저희 할머니가 의정부에서 부대찌개 장사 하셨어요. 이 글 보니까 할머니 생각나네요."
"6.25 때 우리 할아버지도 미군 부대 근처에 사셨대요. 부대찌개 드시면서 자주 그 시절 얘기하셨죠."
"부대찌개가 이런 의미인 줄 몰랐어요. 다음에 먹을 때 다르게 생각될 것 같아요."
그리고 한 댓글이 민수의 눈길을 끌었다.
"저는 미국 사람입니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의정부에 주둔하셨어요. 부대찌개 이야기 들으니 할아버지 생각나네요. 다음에 한국 가면 꼭 먹어보겠습니다."
민수는 댓글을 지혜에게 보여줬다.
"봐. 부대찌개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어."
"미군들에게도 추억이었겠지."
"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부대찌개는 양쪽 모두의 기억이 된 거지."
한 달 후, 가족은 다시 의정부를 찾았다. 이번에는 다른 식당을 가보기로 했다.
"고향부대찌개 가볼까?"
들어가 보니 지난번 '오뎅식당'과는 조금 다른 맛이었다. 더 얼큰하고 진했다.
"식당마다 맛이 다르네."
"같은 부대찌개인데도."
식사를 마치고 거리를 걸으며 서연이가 말했다.
"엄마, 나 부대찌개 먹을 때마다 오늘 배운 거 생각날 것 같아."
"뭘?"
"전쟁이랑, 가난이랑, 그때 사람들이랑."
지혜는 딸을 안아줬다.
"그거면 됐어. 맛있게 먹되, 역사를 잊지 않는 거."
"응."
부대찌개 거리는 계속될 것이다. 식당들이 문을 열고, 손님들이 오고, 냄비가 끓고.
그리고 그 한 그릇 한 그릇마다 역사가 담긴다. 70년 전 전쟁의 기억, 가난의 기억, 그리고 생존의 기억.
하지만 동시에 희망의 기억도. 슬픔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 폐허에서 음식을 만들어낸 창의성, 그리고 그것이 문화가 된 기적.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은 이렇게 음식으로도 이어졌다. 을지로의 쇳가루, 배다리의 책 냄새, 그리고 이제는 부대찌개의 얼큰한 맛.
모든 것이 기억이고, 모든 것이 역사다.
그날 밤, 민수는 노트 마지막 장에 썼다.
"부대찌개는 전쟁의 맛이다. 하지만 동시에 평화의 맛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살아남아, 함께 둘러앉아 먹을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평화 아닐까."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보였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도 부대찌개를 먹고 있을 것이다.
그 한 그릇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든 모르든, 역사는 계속된다.
맛으로, 냄새로, 기억으로.
그리고 한 가족의 아카이빙에도 새로운 페이지가 추가됐다.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 전쟁이 남긴 맛.
끝나지 않는 여정은 계속된다. 다음은 어떤 골목이, 어떤 맛이,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가족은 기대하며 잠들었다. 내일 또 걸을 골목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