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발리 헌책방 골목

책 속에 머무는 시간

by seungbum lee

출판도시의 숨은 골목
"파주에 헌책방 골목이 있대."
3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지혜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창밖으로는 봄볕이 따스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파주? 출판단지?"
"응. 근데 출판단지 안쪽에 숨은 골목이래. 블루박스라고."
민수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배다리 헌책방 거리 이후로 헌책방에 대한 애정이 생겼던 터였다.
"블루박스?"
"컨테이너를 개조한 헌책방들이 모여 있는 곳이래. 파란색 컨테이너라서 블루박스. 중고 서점이랑 북카페가 여러 개 있고."
지혜가 사진을 보여줬다. 파란 컨테이너들이 줄지어 있고, 그 안에 책들이 가득했다. 밖에는 작은 정원과 벤치가 있었다.
"분위기 좋다."
"배다리랑은 또 다른 느낌이야. 거긴 오래된 골목이었다면, 여기는 새로 만든 공간이래. 근데 헌책을 파니까 묘하게 어울린대."
"서연이 좋아하겠는데."
딸을 불렀다. 요즘 서연이는 독서에 푹 빠져 있었다. 골목 여행을 다니며 책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서연아, 오늘 헌책방 골목 갈래?"
"진짜?"
눈이 반짝였다.
"응. 배다리보다 더 큰 헌책방 거리래."
"가고 싶어!"
준우도 합류했다. 요즘 그는 만화책에 관심이 생겼다.
"나도 갈래. 만화책 있어?"
"있을 거야. 헌책방이니까."
한 시간 후, 네 식구는 파주 출판단지로 향했다. 서울에서 차로 40분 거리였다.
"멀긴 하네."
"주말 나들이 삼아."
자유로를 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봄이 오고 있었다. 나무들이 연두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파주 출판단지 도착했습니다."
네비게이션 안내가 들렸다. 큰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출판사들의 사옥이었다.
"여기 다 출판사야?"
"응. 한국에서 제일 큰 출판단지래."
건물들은 독특했다. 일반 빌딩과 달리 하나하나가 건축적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저 건물 봐. 책 모양이야!"
준우가 가리킨 건물은 정말 책을 쌓아놓은 듯한 형태였다.
"블루박스는 저 안쪽이래."
출판단지 안으로 더 들어갔다. 조용한 길을 따라가자 파란색 컨테이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다!"

파란 상자 속 책들의 세계
주차를 하고 내렸다. 블루박스는 생각보다 아담했다. 파란 컨테이너 10여 개가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가운데는 작은 정원이었다.
"예쁘다."
정원에는 나무 벤치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조용하네."
배다리 헌책방 거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배다리는 낡은 골목의 정취가 있었다면, 이곳은 현대적이고 깔끔했다. 하지만 책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첫 번째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문발리 헌책방'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30대로 보이는 주인이 반갑게 맞아줬다.
안은 책으로 가득했다. 벽면을 따라 책장이 있고, 바닥에도 책이 쌓여 있었다. 소설, 에세이, 시집, 인문서.
"우와, 책이 엄청 많아."
서연이가 감탄하며 책장을 훑어봤다.
"여기 책들 어떻게 구하세요?"
민수가 주인에게 물었다.
"다양하게요. 사람들이 가져오기도 하고, 제가 직접 찾아다니기도 하고. 출판단지 안에 있다 보니 출판사에서 처리 못 한 책들도 많이 들어와요."
"신간도 있어요?"
"네. 신간 중에서 재고로 남은 것들요. 정가보다 싸게 드려요."
서연이는 벌써 책 몇 권을 골라들었다. 윤동주 시집, 어린 왕자, 그리고 낯선 소설 한 권.
"엄마, 이거 사도 돼?"
"그래. 마음에 드는 거 골라."
준우는 만화책 코너에서 『드래곤볼』 전집을 발견했다.
"이거 사고 싶어!"
"전집은 너무 많아. 몇 권만 골라."
"에이..."
지혜는 에세이 코너를 둘러보다가 한 권을 발견했다. 『느린 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거."
책을 펼쳐보니 작은 도시와 골목을 느리게 여행하는 이야기였다. 지금 자신들이 하는 것과 비슷했다.
민수는 사진집 코너에서 『사라지는 골목들』이라는 책을 찾았다.
"이거 우리랑 똑같은데."
책에는 전국의 오래된 골목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각자 책을 골라 계산했다. 배다리 헌책방보다 가격이 조금 더 나갔지만, 책 상태가 좋았다.
두 번째 컨테이너는 북카페였다. '책과 쉼표'라는 이름이었다.
"커피 마시며 책 읽을 수 있어요."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은 카페, 한쪽은 서점이었다. 창가에는 독서용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아메리카노 두 잔, 핫초코 두 개요."
주문을 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블루박스 정원이 보였다.
"여기 좋다."
음료를 기다리며 각자 산 책을 꺼냈다. 서연이는 윤동주 시집을, 준우는 만화책을, 지혜는 에세이를, 민수는 사진집을.
"가족이 다 같이 책 읽는 거 언제 만이야."
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밖에서는 새소리가 들렸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없었다. 오직 책장 넘기는 소리만.

책 속에서 찾은 자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민수가 사진집을 덮으며 말했다.
"여보, 이 책 봐."
지혜에게 사진집을 보여줬다. 한 페이지에는 을지로 철공소 사진이 있었다.
"을지로다!"
"이 사진 찍힌 게 2018년이래. 우리가 가기 전이야."
사진 속 을지로는 아직 활기차 보였다. 철공소마다 사람들이 일하고,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다 사라졌는데."
"그러니까 기록이 중요한 거지. 이 사진 덕분에 2018년 을지로를 볼 수 있잖아."
지혜도 자신의 에세이를 보여줬다.
"이 책도 비슷한 이야기야. 작가가 전국 작은 도시를 여행하며 느린 시간을 경험하는 거."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빠른 여행은 풍경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느린 여행은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도 그런 것 같아."
민수가 말했다.
"골목을 빨리 지나가는 게 아니라, 천천히 걷고, 사람들 만나고, 이야기 듣고. 그러면서 우리 자신도 변하고 있잖아."
"어떻게 변했어?"
"더 깊이 보게 된 것 같아. 표면만이 아니라 속도. 을지로 처음 갔을 때는 그냥 인쇄소가 신기했는데, 지금은 그 안에 사람들 삶이 보여."
서연이가 윤동주 시집에서 고개를 들었다.
"엄마, 이 시 봐. '쉽게 씌어진 시'."
시를 읽어줬다.
"육 개월 동안 나는 시를 쓰지 못했다. / 겨울 한철 생각만 하였다. / 시를 쓰지 못하는 동안도 / 나는 시를 생각하였다."
"윤동주도 고민했구나."
"응. 쉽게 쓰이는 시가 부끄럽다고 했어. 깊이 생각해야 된다고."
민수와 지혜는 딸을 보며 놀랐다. 14살 아이가 시를 이렇게 해석하다니.
"우리 아카이빙도 그래야 하는 것 같아."
지혜가 말했다.
"쉽게 쓰지 말고, 깊이 생각하고."
"을지로에서 배운 거잖아. 거안사위."
커피를 다 마시고 다른 컨테이너들을 둘러봤다. 어떤 곳은 독립출판물 전문, 어떤 곳은 외국 서적 전문, 어떤 곳은 아동서 전문이었다.
"여기 책방마다 특색이 있네."
"응. 배다리처럼."
독립출판물 서점에서는 작가가 직접 만든 책들이 있었다. 손으로 제본하고, 직접 그린 그림이 들어간 책들.
"이거 진짜 작가가 만든 거예요?"
"네. 독립출판이에요. 출판사 거치지 않고 작가가 직접."
"신기하다."
서연이는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나의 골목 일기』라는 제목이었다.
"엄마, 이거 우리랑 비슷해!"
책을 펼쳐보니 정말 비슷했다. 작가가 서울 골목을 다니며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이었다.
"우리도 이런 거 만들 수 있을까?"
"당연하지. 우리도 1년 넘게 기록했잖아."
"진짜로?"
"응. 나중에 우리 기록 모아서 책 만들어보자."
서연이의 눈이 반짝였다.

책으로 이어지는 여정
오후가 되어 블루박스 정원 벤치에 앉았다. 햇살이 따뜻했다.
"여기서 책 읽기 좋겠다."
각자 산 책을 꺼내 읽었다. 가족 모두 조용히 책에 빠져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 민수가 사진집을 덮으며 말했다.
"문발리는 어떤 곳일까?"
"헌책방 골목?"
"그것도 맞는데... 나는 책의 집 같아."
"책의 집?"
"응. 출판단지니까 책이 태어나는 곳이잖아. 근데 블루박스는 그 책들이 쉬러 오는 곳 같아. 새 책으로 팔리지 못한 책들, 누군가 읽고 내놓은 책들."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새 주인을 만나는 곳."
"맞아. 순환이지."
서연이가 끼어들었다.
"책도 집이 필요하구나."
"그래. 사람처럼."
준우는 만화책을 읽다가 물었다.
"아빠, 우리 집 책들도 여기 올 수 있어?"
"응. 네가 다 읽고 안 볼 책 있으면 여기 가져올 수 있어."
"그럼 다른 애가 읽겠네?"
"그렇지."
"좋다!"
해질 무렵, 블루박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바퀴 걸었다.
"사진 찍자."
파란 컨테이너 앞에서 가족 사진을 찍었다. 모두 손에 책을 들고.
"이 사진 나중에 우리 책 표지에 쓰자."
서연이가 말했다.
"우리 책?"
"응. 엄마 아빠가 만든다는 골목 아카이빙 책."
민수와 지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만들자."
차에 오르며 지혜가 말했다.
"오늘 좋았다."
"나도."
"배다리는 역사의 무게가 있었다면, 여기는... 평화?"
"맞아. 조용하고 편안하고."
"책이 주는 평화."
집으로 가는 길,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책을 읽었다. 차 안은 조용했지만 풍요로웠다.
"여보."
지혜가 조용히 불렀다.
"응?"
"우리 1년 넘게 골목 다녔잖아."
"응."
"이제 슬슬 정리할 때 된 것 같아."
"정리?"
"응. 지금까지 쓴 글이랑 사진 모아서 진짜 책으로 만드는 거. 서연이 말처럼."
민수는 잠시 생각했다.
"좋은데. 근데 누가 읽을까?"
"아무도 안 읽어도 괜찮아. 우리 가족 기록이니까. 나중에 서연이, 준우가 크면 볼 수 있게."
"그것도 좋고... 혹시 알아? 누군가는 관심 있을 수도."
"응. 을지로 글에 댓글 많이 달렸잖아."
"그래. 해보자."
집에 도착해서 오늘 산 책들을 책장에 정리했다. 배다리에서 산 윤동주 시집 옆에 오늘 산 책들을 나란히 꽂았다.
"우리 책장도 점점 채워지네."
"골목 여행의 흔적들로."
그날 밤, 민수는 노트를 펼쳤다. 지난 1년 반 동안의 기록들을 다시 읽었다.
을지로, 후암동, 성북동, 익선동, 은평한옥마을, 염리동, 서촌, 송월동, 배다리, 밤리단길, 삼송 그래피티,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 그리고 오늘의 문발리.
"많이 다녔다."
각각의 골목마다 이야기가 있었다. 만난 사람들, 본 풍경들, 배운 교훈들.
"이걸 어떻게 엮지?"
지혜가 옆에 앉았다.
"시간 순서대로?"
"아니면 테마별로? 역사, 예술, 음식, 책..."
"둘 다 해도 좋을 것 같은데. 1부는 시간 순서, 2부는 테마별 에세이."
"좋아."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책의 구성을 논의했다. 제목도, 목차도, 어떤 사진을 쓸지도.
다음 날, 민수는 독립출판을 하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책 만들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어?"
"당연하지. 어떤 책인데?"
"골목 아카이빙. 1년 반 동안 가족이랑 다닌 서울, 경기 골목들."
"오, 재미있겠는데. 자료 있어?"
"글 13편, 사진 수백 장."
"충분해. 한번 만나서 얘기하자."
그렇게 책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서연이도 동참했다. 자신의 골목 노트에 그린 그림들을 스캔해서 책에 넣기로 했다.
"내 그림도 들어가?"
"당연하지. 너도 작가야."
"우와!"
준우는 표지 디자인을 제안했다.
"파란색 어때? 블루박스처럼."
"좋은데!"
3개월 후, 책이 완성됐다.
제목은 『골목, 그 안의 시간들 - 한 가족의 서울·경기 아카이빙』.
표지는 파란색 바탕에 블루박스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뒷표지에는 을지로 철공소 풍경.
독립출판으로 100부를 찍었다.
"드디어 나왔다!"
책을 펼쳐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 1년 반의 여정이 300페이지에 담겨 있었다.
첫 장을 서연이에게 주었다.
"네가 첫 독자야."
서연이는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자신의 그림이 곳곳에 들어가 있었다.
"진짜 책이다!"
준우에게도 한 권 주었다.
"이거 학교에 가져가도 돼?"
"그럼. 자랑해."
며칠 후, 블로그에 책 출간 소식을 올렸다.
"1년 반 동안의 골목 여행을 책으로 엮었습니다. 독립출판이라 서점에는 없지만, 원하시는 분께 보내드립니다."
반응은 뜨거웠다. 100부가 일주일 만에 다 나갔다.
"추가로 찍어야 할 것 같아."
"그러자."
그리고 뜻밖의 연락이 왔다. 한 출판사에서였다.
"책 잘 봤습니다. 정식 출간 의향 있으신가요?"
민수와 지혜는 눈을 마주쳤다.
"우리 책이... 정식 출판?"
"해볼까?"
"해보자!"
6개월 후, 『골목, 그 안의 시간들』은 정식 출간됐다. 서점에도 깔리고, 온라인에도 올라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반응이 좋았다. 골목에 관심 있는 사람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족과 함께 추억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책을 샀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꾸준히 팔리네."
"좋은 거 아니야? 우리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가닿고 있다는 거."
문발리 블루박스의 헌책방 주인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책 잘 봤어요. 저희 서점에도 입고하고 싶은데요."
"진짜요? 고맙습니다!"
책은 블루박스 서점에도, 배다리 집현전에도, 밤리단길 카페에도 놓였다.
그리고 1년 후, 그 책들 중 일부는 헌책이 되어 다시 블루박스에 돌아왔다.
"우리 책이 헌책이 됐네."
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순환이지. 책도 여행하는 거야."
가족은 다시 문발리를 찾았다. 블루박스 서점에 가보니 정말 자신들의 책이 헌책 코너에 있었다.
"누가 읽고 내놓았구나."
책을 펼쳐보니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누군가 열심히 읽은 흔적이었다.
"이 책도 누군가에게 의미였던 거야."
서연이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사람 손으로 갈 거고."
"그게 책의 여행이네."
벤치에 앉아 자신들의 헌책이 된 책을 읽었다. 2년 전 썼던 글인데, 이제는 조금 낯설었다.
"우리도 변했구나."
"응. 그때보다 더 깊이 보게 됐어."
"거안사위도 배웠고."
"책도 만들었고."
해가 질 무렵, 다시 책을 서가에 꽂았다.
"다른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블루박스를 떠나며 민수가 말했다.
"다음은 어디 갈까?"
"글쎄. 이제 책도 냈으니까, 조금 쉬었다가?"
"아니야. 계속해야지. 2권 쓸 거잖아."
지혜가 웃었다.
"맞다. 아직 못 간 곳이 얼마나 많은데."
"수원, 전주, 부산, 강릉..."
"다 가자. 천천히."
문발리 헌책방 골목은 그렇게 한 가족의 여정에 또 하나의 장을 더했다.
책의 집에서, 책을 만나고, 책을 쓰고, 책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순환.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은 이제 단순한 기록을 넘어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작품은 다시 누군가의 여행을 이끌 것이다.
끝나지 않는 여정. 계속되는 기록. 이어지는 이야기.
문발리의 파란 상자들은 오늘도 책들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책들 속에는 수많은 시간이 머물고 있다.
한 가족의 시간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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