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마을

낯선 유럽의 그림자

by seungbum lee


파주의 작은 유럽
"프로방스? 프랑스?"
4월의 어느 주말, 준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야. 파주에 있는 프로방스 마을."
지혜가 태블릿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알록달록한 유럽풍 건물들이 가득했다. 파스텔톤 페인트로 칠해진 3~4층 건물들, 아치형 창문, 작은 골목길.
"진짜 유럽 같은데?"
서연이가 사진을 확대해서 봤다.
"그렇게 만든 거래.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모델로."
민수는 사진을 보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왜? 안 좋아?"
"아니, 그게... 우리가 지금까지 다닌 곳들이랑은 좀 다르지 않아?"
지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을지로나 배다리는 진짜 역사가 있는 곳이었고. 근데 여기는 테마파크?"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서연이가 끼어들었다.
"사진 찍기 좋을 것 같아. 예쁘잖아."
민수와 지혜는 눈을 마주쳤다. 1년 반 동안 진짜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골목들을 다녔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만든 유럽풍 마을은 어떨까?
"그래도 가보자."
민수가 말했다.
"왜?"
"궁금하잖아. 왜 사람들이 여기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다닌 진짜 골목들과 뭐가 다른지."
"비교하는 거?"
"응. 진짜와 가짜, 있는 그대로와 만들어진 것. 그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
"좋아. 가자."
오후 2시, 네 식구는 파주 프로방스 마을에 도착했다. 문발리 블루박스에서 차로 15분 거리였다.
"주차장이 크네."
관광지답게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차들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냈다. 성인 5천 원, 어린이 3천 원.
"돈을 받네."
"상업 시설이니까."
입구를 지나자 갑자자 풍경이 바뀌었다.
"우와!"

만들어진 아름다움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분홍, 하늘색, 노랑, 연두. 파스텔톤 건물들이 골목을 따라 이어졌다.
"진짜 유럽 같아!"
준우가 환호했다.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이었고, 모두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기 포토존!"
한 건물 앞에는 '인생샷 명소'라고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도 찍을까?"
줄을 서서 기다렸다. 10분쯤 지나 차례가 왔다.
"자, 하나 둘 셋!"
분홍색 건물을 배경으로 가족 사진을 찍었다. 다들 환하게 웃었다.
"예쁘게 나왔다!"
골목을 걸으며 건물들을 구경했다. 1층에는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저기 카페 가볼까?"
'프로방스 카페'라는 간판이 붙은 곳으로 들어갔다. 안은 유럽풍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아치형 창문, 빈티지 가구, 조명들.
"아메리카노 두 잔, 딸기주스, 초코우유요."
주문을 하고 창가에 앉았다. 창밖으로 알록달록한 골목이 보였다.
"분위기는 좋다."
민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뭔가 이상해."
지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너무... 완벽해. 인위적으로."
민수도 느끼고 있었다. 건물들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진짜가 아닌 느낌이었다. 디즈니랜드의 성처럼.
"프랑스 가본 적 있어?"
"아니. 너는?"
"나도. 근데 이게 진짜 프랑스 같을까?"
"모르지. 근데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 같아."
창밖을 보니 여전히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건물 앞에서, 골목 중간에서, 계단에서.
"다들 인스타에 올릴 거겠지."
서연이가 자신의 핫초코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나도 올릴 거야."
"그래. 예쁘니까."
음료를 마시고 다시 골목을 걸었다. 건물마다 테마가 있었다. 어떤 곳은 꽃 장식, 어떤 곳은 자전거 장식, 어떤 곳은 분수.
"여기 진짜 잘 만들었다."
"응. 포토존 천지야."
한 건물 2층으로 올라가니 전망대가 있었다. 거기서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여기서 야경이 유명하대."
"밤에 가로등 켜지면 예쁘겠다."
"다음에 밤에 와보자."
전망대에서 내려와 기념품 가게에 들렸다. 프로방스 마을 엽서, 자석, 키링들이 가득했다.
"이거 사고 싶어."
준우가 에펠탑 모양 키링을 집어 들었다.
"에펠탑은 파리인데..."
"근데 예뻐."
"그래, 사자."
계산을 하고 나오며 민수가 중얼거렸다.
"프로방스인데 에펠탑을 팔아."
지혜가 웃었다.
"다 프랑스니까?"
"프로방스는 남프랑스고, 에펠탑은 파리인데."
"관광객들은 신경 안 쓸 거야."


진짜와 가짜 사이
해가 기울 무렵, 가족은 마을 중앙 광장에 앉았다. 작은 분수가 있고, 주변으로 벤치가 놓여 있었다.
"피곤하다."
준우가 벤치에 누웠다.
"많이 걸었지."
민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두 행복해 보였다. 웃고, 사진 찍고, 즐기고.
"여보."
지혜가 조용히 불렀다.
"응?"
"솔직히 어때? 여기."
민수는 잠시 생각했다.
"예쁘긴 해. 근데..."
"근데?"
"을지로나 서촌이랑은 완전히 다르지. 거기는 진짜 삶이 있었는데, 여기는..."
"무대 세트 같아."
"맞아. 그게 나쁜 건 아닌데, 뭔가 공허해."
지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예쁜데 감동이 없어. 을지로에서는 철공소 할아버지 만나서 가슴이 뭉클했고, 배다리에서는 헌책방 주인 이야기 듣고 울컥했는데. 여기는 그냥... 예쁘기만 해."
"사진은 예쁘게 나오는데, 이야기가 없어."
서연이가 끼어들었다.
"근데 사람들은 좋아하잖아."
"그래. 사람들은 좋아해."
"왜?"
민수가 딸을 바라봤다.
"글쎄. 예쁘니까? 사진 찍기 좋으니까?"
"그럼 그게 나쁜 거야?"
"나쁜 건 아니지. 그냥... 다른 거지."
지혜가 설명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닌 곳들은 진짜 역사가 있는 곳이었어. 사람들이 살았고, 일했고, 슬퍼하고, 기뻐했던 곳. 근데 여기는 처음부터 관광을 위해 만든 곳이야."
"그럼 가짜야?"
"가짜라기보다는... 인조? 테마파크?"
서연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개념인 듯했다.
"근데 엄마, 아빠."
"응?"
"여기 온 사람들은 행복해 보여. 그럼 괜찮은 거 아니야?"
민수는 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맞는 말이었다. 진짜든 가짜든, 사람들이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
"넌 어때? 여기 와서 행복해?"
"응. 예쁘고 재미있어. 사진도 많이 찍었고."
"그럼 됐지."
하지만 민수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찜찜했다. 무엇이 그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해질 무렵,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야경 볼까?"
어둠이 내리자 프로방스 마을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건물마다 조명이 켜지고, 가로등이 골목을 밝혔다.
"우와, 예쁘다!"
정말 아름다웠다. 낮보다 더 환상적이었다. 조명이 파스텔톤 건물들을 비추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진 찍자."
야경을 배경으로 가족 사진을 찍었다. 조명 덕분에 사진이 더 예쁘게 나왔다.
"이거 인스타에 올리면 대박이겠다."
서연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서로 다른 아름다움
밤 8시, 프로방스 마을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민수가 말했다.
"피곤하다."
"많이 걸었지."
차에 올라타며 지혜가 물었다.
"오늘 어땠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말하면..."
민수가 입을 열었다.
"예쁘긴 했는데, 우리가 다녀온 다른 곳들만큼 의미는 없었던 것 같아."
"나도."
"근데 그게 나쁜 건 아니야. 그냥 다른 거지. 을지로는 역사의 무게가 있었고, 배다리는 책의 온기가 있었다면, 여기는... 시각적 즐거움?"
"인스타그래머블?"
"그래. 그 말 딱이다."
서연이가 뒷좌석에서 말했다.
"나는 좋았어. 친구들한테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그것도 중요해."
집으로 가는 길, 민수와 지혜는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이번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
"솔직하게 쓰자. 예쁘긴 했지만, 진짜 골목의 감동은 없었다고."
"그럼 사람들 기분 나쁘지 않을까? 프로방스 마을 좋아하는 사람들."
"나쁜 거라고 쓰는 게 아니잖아. 그냥 다르다고 쓰는 거지."
"좋아. 그렇게 하자."
집에 도착해서 사진을 확인했다. 정말 예쁘게 나왔다. 알록달록한 건물들, 야경, 가족의 웃는 얼굴.
"사진만 보면 완벽한데."
"응. 근데 뭔가 비어있는 느낌."
민수는 노트를 펼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프로방스 마을, 낯선 유럽의 그림자'.
글에는 프로방스 마을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그 아름다움 뒤의 공허함을 담았다. 진짜와 가짜에 대한 고민, 테마파크형 관광지의 의미.
"프로방스 마을은 아름답다. 부정할 수 없다. 건물도 예쁘고, 조명도 멋지고, 사진도 잘 나온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다녀온 골목들에서 느꼈던 것 - 역사의 무게, 사람들의 이야기, 시간의 흔적 - 은 없었다."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다를 뿐이다. 테마파크형 관광지와 진짜 삶이 숨 쉬는 골목은 서로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점점 전자를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짜보다 예쁜 가짜를, 불편한 역사보다 깨끗한 테마파크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짜 골목들은 사라지고 있다."
글을 다 쓰고 지혜에게 보여줬다.
"좀 비판적이지 않아?"
"그래?"
"아니, 솔직한 건 좋은데... 프로방스 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분 나쁠 수도."
"그럼 어떻게 고칠까?"
"마지막에 균형을 잡는 문단을 추가하는 건 어때? 두 가지 다 필요하다는 식으로."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단을 추가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프로방스 마을 같은 곳도 필요하고, 을지로 같은 진짜 골목도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모든 것이 테마파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모든 것이 낡은 채로 방치되어서도 안 된다."
"이제 좋은데."
며칠 후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예상대로 반응이 갈렸다.
"공감합니다. 프로방스 마을 갔는데 예쁘긴 한데 뭔가 공허하더라고요."
"저는 좋았는데요. 예쁜 사진 많이 찍었어요. 뭐가 문제인가요?"
"작가님 말씀 이해합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 생각해볼 문제네요."
"너무 비판적인 거 아니에요? 그냥 관광지인데."
댓글을 읽으며 민수는 생각했다. 모두가 동의할 수는 없는 주제구나.
한 달 후, 한 독자로부터 긴 메시지가 왔다.
"저는 프로방스 마을 근처에 사는 사람입니다. 선생님 글 읽고 할 말이 있어서 연락드립니다. 프로방스 마을이 생기기 전, 여기는 그냥 평범한 시골이었습니다. 일자리도 없고, 젊은이들은 다 떠나가고. 프로방스 마을이 생기고 나서 관광객이 오고, 일자리가 생기고, 동네가 활기를 찾았습니다. 선생님께는 '가짜'로 보일지 모르지만, 저희한테는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민수는 메시지를 읽고 가슴이 뜨끔했다.
"여보, 이거 봐."
지혜에게 메시지를 보여줬다.
"아..."
"우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본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답장 써야겠다."
민수는 정성껏 답장을 썼다.
"메시지 감사합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알려주셨네요. 프로방스 마을이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 주민들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모든 것에는 여러 면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그날 밤, 민수는 블로그에 추가 글을 올렸다.
"프로방스 마을에 대한 제 글을 읽고 한 주민분이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메시지를 읽고 제가 놓친 것을 깨달았습니다. 프로방스 마을은 관광객에게는 포토존일 수 있지만, 주민들에게는 생계의 터전입니다. 진짜와 가짜, 역사와 테마파크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 배웠습니다."
댓글들이 달렸다.
"멋진 자기반성입니다."
"이런 겸손함이 좋은 글을 만드는 것 같아요."
"저도 함께 배웁니다."
서연이가 아빠의 글을 읽고 말했다.
"아빠, 프로방스 마을 다시 가보고 싶어."
"왜?"
"다른 마음으로 보고 싶어. 이번엔 사진만 찍지 말고, 거기 일하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싶어."
민수는 딸을 안아줬다.
"좋은 생각이야. 가자."
한 달 후, 가족은 다시 프로방스 마을을 찾았다. 이번에는 다른 마음으로.
카페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오래 하셨어요?"
"5년 됐어요. 프로방스 마을 생길 때부터요."
"어떠세요? 장사는?"
"좋아요. 주말엔 손님이 많아서 정신없어요. 서울에서 일하다가 여기 와서 카페 차렸는데, 잘한 것 같아요."
"행복하세요?"
"네. 서울보다 공기도 좋고, 여유롭고. 물론 겨울엔 손님이 적어서 힘들긴 하지만."
기념품 가게 주인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 사시는 분이세요?"
"네. 이 동네서 태어났어요. 프로방스 마을 생기기 전에는 농사 지었는데, 이제는 이 가게 해요."
"더 좋으세요?"
"훨씬요. 농사는 힘들고 돈도 안 되는데, 이건 실내에서 하니까 편하고 수입도 괜찮아요."
그날 프로방스 마을은 다르게 보였다. 예쁜 건물 뒤에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민수는 또 글을 썼다.
"프로방스 마을 재방문기. 이번에는 사진이 아니라 사람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떤 공간이든, 그곳에 사람의 삶이 있다면 진짜가 된다는 것을. 건물이 가짜 유럽풍이어도,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땀과 웃음은 진짜다."
서연이가 옆에서 자기 노트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프로방스 마을의 알록달록한 건물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카페 주인 아주머니.
"서연아, 그림 잘 그렸다."
"고마워. 아빠, 나도 배웠어."
"뭘?"
"겉모습만 보면 안 된다는 것. 속을 봐야 한다는 것."
민수는 딸을 꼭 안아줬다.
"잘 배웠어."
프로방스 마을은 그렇게 가족의 여정에 또 다른 교훈을 남겼다. 섣부른 판단의 위험, 여러 관점의 중요성, 그리고 사람을 보는 눈.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겸손하게, 더 열린 마음으로.
프로방스 마을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은 오늘도 서 있다. 누군가에게는 포토존이고, 누군가에게는 생계의 터전이고, 누군가에게는 배움의 장소로.
모든 것은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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