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시간들
효자동에서 망대골목으로
"춘천 한 번 더 갈래?"
효자동에서 돌아온 지 2주 후, 민수가 제안했다. 주말 저녁, 거실에서 TV를 보던 중이었다.
"또? 효자동 또 가?"
준우가 물었다.
"아니, 다른 곳. 망대골목이랑 죽림동."
"거기는 뭐 있는데?"
"효자동이랑 가까운데, 완전히 다른 분위기래.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언덕 동네."
지혜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해방촌 같은 곳?"
"비슷한데 규모는 작고, 더 가파르대. 그리고 옛날 모습이 더 많이 남아있고."
서연이도 노트북을 덮고 왔다.
"거기 뭐가 특별해?"
"일단 망대가 있어. 옛날에 화재 감시하던 망루. 그리고 1950년대에 지은 성당도 있고."
민수가 검색한 사진을 보여줬다. 가파른 계단, 좁은 골목, 오래된 집들. 그리고 언덕 위의 망대와 성당.
"분위기 완전 다르다."
"효자동이 평지 벽화마을이었다면, 여기는 언덕 옛날 동네."
"그리고 육림고개라고, 청년들이 카페 만든 골목도 있대."
"성수동 패턴이네."
"맞아. 낡은 시장 골목이 힙한 카페 거리가 된 거."
"재미있겠다. 가자!"
다음 주 토요일, 네 식구는 다시 ITX를 탔다. 이번에는 춘천이 익숙했다.
"두 번째 춘천이네."
"응. 근데 완전히 다른 곳으로."
춘천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탔다.
"죽림동 주교좌성당으로 가주세요."
"아, 성당 가시는구나. 거기서 망대골목 가시는 거죠?"
"네, 어떻게 아세요?"
"요즘 그렇게 가시는 분들 많아요. 성당 보고, 망대골목 걷고, 육림고개 카페 가고."
"그게 정석 코스인가 봐요."
"그렇죠. 춘천 근현대사 투어."
10분쯤 가니 언덕이 나타났다.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자 거대한 성당이 보였다.
"저게 주교좌성당이구나."
성당 언덕에서 바라본 시간
택시에서 내려 성당 앞에 섰다. 1950년대에 지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석조 건물이네."
회색 돌로 쌓아 올린 고딕 양식의 성당이었다. 첨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70년 넘었다는 게 신기해."
성당 문이 열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천장이 높았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바닥에 색색의 무늬를 만들었다.
"조용하다."
몇몇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가족은 조용히 뒤쪽 벤치에 앉았다.
"종교는 없지만, 성당은 좋아."
민수가 작게 속삭였다.
"평화로워서?"
"응. 시간이 멈춘 것 같아."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성당 옆으로 전망대가 있었다.
"여기서 춘천이 보인대."
전망대에 올라가니 춘천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소양강, 의암호, 그리고 그 사이로 펼쳐진 도시.
"경치 좋다!"
"여기서 사진 찍자."
가족 사진을 찍었다. 춘천을 배경으로.
"저 아래가 망대골목이래."
성당 아래로 빼곡히 들어선 집들이 보였다.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정말 가파르다."
"계단 많겠다."
성당에서 내려와 망대골목으로 향했다. 성당 뒤편으로 좁은 계단길이 시작됐다.
"여기부터가 망대골목이야."
첫 계단부터 가팔랐다. 양쪽으로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해방촌보다 더 좁은데?"
"그리고 더 오래된 것 같아."
집들은 대부분 30~40년은 된 것처럼 보였다. 페인트가 벗겨진 벽, 낡은 대문, 녹슨 난간.
"여기 사람 살아?"
한 집 안에서 TV 소리가 들렸다. 살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지혜가 말했다.
"해방촌 생각나."
"나도. 언덕 동네고, 좁고, 오래됐고."
"근데 해방촌은 카페가 많았잖아. 여기는..."
"아직 안 들어온 것 같아. 원래 모습 그대로."
중간쯤 올라가니 작은 공터가 나왔다. '망대'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가 망대구나."
작은 2층 건물이 있었다. 옛날 화재 감시용 망루를 복원한 것이었다.
"올라가볼까?"
좁은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니 사방이 뚫려 있었다. 망루 구조였다.
"여기서 화재 감시했구나."
춘천 시내가 360도로 보였다.
"화재 나면 여기서 바로 보였겠다."
망루 옆 안내판을 읽었다.
"1960년대까지 이 망대에서 소방관들이 24시간 화재를 감시했습니다. 전화가 없던 시절, 화재 발견 즉시 종을 쳐서 알렸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네."
"그때는 이게 첨단이었겠지."
망대를 내려와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숨이 찼다.
"진짜 가파르다."
"옛날 사람들은 이걸 매일 오르내렸다고?"
"대단하다."
피난민의 흔적
계단 중간에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망대다방'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여기 들어가자. 쉬어야겠다."
카페는 오래된 집을 개조한 곳이었다. 낡은 집의 구조를 그대로 살려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어서 오세요."
젊은 여자가 반갑게 맞았다.
"아메리카노 두 잔, 오렌지주스, 핫초코요."
자리에 앉으니 창밖으로 골목이 보였다. 좁은 계단, 오래된 집들.
"여기 분위기 좋다."
주인이 커피를 가져다주며 말을 걸었다.
"서울에서 오셨어요?"
"네. 망대골목 보러 왔어요."
"고마워요. 요즘 찾아오시는 분들 조금씩 늘고 있어요."
"여기 오래 하셨어요?"
"2년 됐어요. 이 집이 원래 제 할머니 집이었거든요. 할머니 돌아가시고 비어있어서 카페로 만들었어요."
"할머니 언제부터 여기 사셨어요?"
주인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6.25 때요. 피난 오셔서."
"어디서 피난 오셨어요?"
"함경도요. 할머니가 스무 살 때 혼자 내려오셨대요. 그리고 이 언덕에 판잣집 지으셨고."
"이 집이 그 판잣집이에요?"
"처음엔 그랬는데, 나중에 조금씩 고쳐서 지금 모습이 됐어요."
민수는 가슴이 먹먹했다. 해방촌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았다.
"힘드셨겠네요."
"평생 힘들게 사셨죠. 여기서 밥 장사하시면서 엄마 키우시고. 할머니 이야기 들으면 눈물 나요."
"그래서 카페를 여기에?"
"네. 할머니 집을 없애기 싫었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사셨던 이 동네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카페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저게 뭐예요?"
"1960년대 망대골목 사진이에요. 할머니가 찍으신 거."
사진 속에는 판잣집들이 빼곡했다. 흙바닥 골목, 아이들의 맨발, 빨래 널린 풍경.
"지금이랑 많이 다르네요."
"그때는 정말 가난했대요. 다들 피난민이었고, 갈 데도 없고. 그래서 언덕에 모여 살았던 거죠."
"지금은?"
"많이 나아졌죠. 집들도 고쳤고. 근데... 사람들은 다 떠났어요. 젊은 사람들은 평지로 가고, 노인들만 남았어요."
카페를 나와 다시 계단을 올랐다. 이번에는 다른 눈으로 봤다. 낡은 집들, 좁은 골목. 그 안에 70년 전 피난민들의 삶이 있었다.
"여기 한 집 한 집마다 이야기가 있겠다."
"응. 6.25의 상처가."
계단 끝에 다다르자 평지가 나왔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시작됐다.
"여기서 내려가면 육림고개래."
"카페 거리?"
"응."
내려가는 계단도 가팔랐다. 하지만 올라갈 때보다는 쉬웠다.
중간쯤 내려가니 한 집 대문 앞에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안녕하세요."
"오, 어서 와요. 구경 왔어요?"
"네. 망대골목 보러 왔어요."
"고생하셨어요. 계단 가파르죠?"
"네, 진짜 힘들었어요."
할머니가 웃으셨다.
"우리는 매일 오르내려요. 70년 동안."
"70년이요?"
"네. 6.25 때 피난 와서 여기 살고 있어요."
또 피난민이었다. 민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서 피난 오셨어요?"
"황해도요. 스물두 살 때."
"여기서 계속?"
"그럼요. 어디 갈 데 있어야 가지. 여기가 내 집이에요."
"힘들지 않으세요? 계단 오르내리는 거."
"힘들죠. 나이 들면 더 힘들고. 근데 익숙해요. 평생 살았으니까."
"자녀분들은?"
"다 평지로 나갔어요. 여기는 불편하다고. 나보고도 같이 나가래요. 근데 난 여기가 좋아요."
"왜요?"
할머니는 골목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여기가 내 인생이거든요. 젊었을 때 여기 왔고, 애들 낳아 키웠고, 이웃들이랑 살았고. 다 여기서 일어난 일이에요."
민수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봤다. 70년의 세월이 새겨진 손이었다.
청춘이 들어선 골목
육림고개로 내려오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낡은 시장 건물들 사이로 세련된 카페와 가게들이 보였다.
"여기가 육림고개구나."
망대골목의 낡음과는 대조적이었다. 깔끔한 간판, 현대적인 인테리어, 젊은 사람들.
"완전히 다른 세상이네."
첫 번째로 들어간 곳은 '고개 위 서점'이었다. 작은 독립서점이었다.
"서점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책들이 가득했다. 한쪽은 서점, 한쪽은 카페였다.
"아메리카노 두 잔, 레몬에이드 두 개요."
책장을 둘러봤다. 춘천 관련 책들이 많았다. 그리고 독립출판물들도.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망대골목 사람들』.
"이거 봐."
책을 펼쳐보니 망대골목 주민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사진도 많았다.
"여기 있는 거 사도 돼요?"
"네, 저희가 만든 책이에요."
서점 주인이 대답했다.
"직접 만드신 거예요?"
"네. 저랑 친구들이 망대골목 주민들 인터뷰해서 만들었어요."
"대단하다."
책을 샀다. 나중에 천천히 읽어보고 싶었다.
육림고개를 천천히 걸으며 가게들을 구경했다. 핸드메이드 악세서리 가게, 빈티지 옷가게, 작은 갤러리.
"성수동 느낌 나는데?"
"응. 낡은 곳에 청년들이 들어온 거."
"근데 규모는 훨씬 작고."
"응. 그래서 더 아담한 느낌?"
한 카페 앞에서 멈췄다. '육림다방'이라는 레트로 간판이었다.
"여기 들어가보자."
안으로 들어가니 1970년대 다방 느낌으로 꾸며져 있었다. 빈티지 가구, 오래된 포스터,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LP 음악.
"분위기 좋다."
주문을 하고 앉으니 주인이 다가왔다.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망대골목 보고 내려왔어요."
"아, 그러셨구나. 저희가 망대골목 아래쪽이거든요."
"여기 언제 오픈하셨어요?"
"1년 됐어요. 원래 이 건물이 옛날 양복점이었는데, 비어있어서 카페로 만들었어요."
"육림고개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요?"
"한 3년 전부터요? 젊은 친구들이 하나둘 가게 열면서 소문 나기 시작했어요."
"망대골목 주민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처음엔 경계하셨어요. '젊은 애들이 와서 시끄럽게 한다'고. 근데 저희가 노력했어요. 인사도 열심히 하고, 명절 때 떡도 돌리고."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어요. 가끔 카페에 들러서 차도 마시시고. 어르신들 오시면 저희가 공짜로 드려요."
"좋은 방법이네요."
"공존해야죠. 저희가 먼저 온 분들한테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카페를 나오며 민수가 말했다.
"여기는 성공적인 것 같아."
"뭐가?"
"공존. 망대골목 주민들이랑 육림고개 청년들."
"서로 존중하니까 가능한 거겠지."
해가 기울 무렵, 다시 망대를 찾아갔다. 저녁 풍경을 보고 싶었다.
망루에 올라가니 춘천에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예쁘다."
망대골목도 불이 켜졌다. 집집마다 노란 불빛이 들어왔다.
"70년 전에도 이랬을까?"
"판잣집에도 불이 켜졌겠지. 호롱불이나 촛불."
"그때 사람들은 뭘 생각했을까."
"살아남는 것? 내일을?"
"그리고 고향?"
서연이가 조용히 말했다.
"황해도, 함경도 고향 말이야. 돌아가고 싶었겠다."
민수는 딸을 안아줬다. 18살이 된 서연이는 이제 역사의 아픔을 이해하는 어른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춘천 시내로 나갔다. 막국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오늘 어땠어?"
"힘들었어. 계단."
준우가 먼저 대답했다.
"나는... 슬펐어."
서연이가 말했다.
"왜?"
"할머니들 이야기. 70년 동안 그 언덕에서 사셨다는 게. 고향도 못 가시고."
"전쟁이 그런 거야. 사람들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것."
"우리는 운이 좋은 거네. 전쟁 없는 시대에 태어나서."
"그래. 그래서 더 기억해야 하는 거야. 전쟁의 아픔을."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민수와 지혜는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망대골목은 해방촌이랑 또 달랐어."
"어떻게?"
"해방촌은 변하고 있었잖아. 카페들이 들어오고. 근데 망대골목은 아직 그대로야."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
"응. 그게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좋은 건 원래 모습이 남아있다는 거고, 슬픈 건..."
"사람들이 늙어간다는 거."
"그리고 곧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
집에 도착해서 『망대골목 사람들』 책을 펼쳤다. 주민들의 인터뷰가 생생했다.
"김순자 할머니, 83세. 6.25 때 함경도에서 피난 와서 망대골목에 정착. 남편은 전쟁 중 실종. 혼자 세 자녀를 키우며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사진 속 할머니는 오늘 만난 그 할머니였다.
"이분이다."
민수는 노트를 펼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춘천 망대골목, 언덕 위의 시간들'.
"춘천에는 두 개의 언덕이 있다. 하나는 죽림동 성당이 있는 언덕, 다른 하나는 망대골목이 있는 언덕. 두 언덕 사이로 70년의 시간이 흐른다."
"망대골목은 6.25의 흔적이다. 1950년,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이 가파른 언덕에 판잣집을 지었다. 갈 곳이 없었기에, 살아야 했기에. 그렇게 70년이 흘렀다."
"오늘 우리는 83세 할머니를 만났다. 함경도에서 피난 온 지 70년. '여기가 내 인생'이라고 하셨다. 그 말 속에 담긴 무게를. 돌아갈 수 없는 고향, 피난민으로 산 평생, 그러나 이곳에서 만든 새 삶."
"망대골목 아래에는 육림고개가 있다. 청년들이 만든 새로운 공간. 낡은 시장이 카페로 변하고, 젊음이 들어왔다. 두 세대가 만난다. 70년을 산 노인과 30년을 산 청년.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언덕은 시간을 품는다. 위에는 과거가, 아래에는 현재가, 그리고 그 사이를 우리가 걷는다."
글을 다 쓰고 지혜에게 보여줬다.
"깊다."
"망대골목이 그랬어."
며칠 후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반응은 조용했지만 깊었다.
"할머니 이야기에 눈물이 났습니다."
"다음 주말에 꼭 가보겠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네요."
"망대골목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댓글이 민수를 울컥하게 했다.
"저는 망대골목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입니다. 지금은 서울에 살지만, 명절 때마다 어머니 뵈러 망대골목에 갑니다. 선생님 글 읽고 제가 어디서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수는 답글을 달았다.
"댓글 감사합니다. 망대골목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누군가의 고향이고 삶이고 역사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3개월 후, 춘천시로부터 연락이 왔다.
"망대골목 보존 사업을 시작합니다. 선생님께서 자문위원으로 참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수는 즉시 승낙했다. 수원에 이어 춘천에서도 공식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년 동안 망대골목을 여러 번 찾아갔다.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고, 역사를 기록했다.
특히 83세 김순자 할머니와는 가까워졌다. 여러 번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예요?"
"처음이었지. 피난 왔을 때. 스무두 살, 혼자, 아무것도 없이.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
"그래도 버티셨잖아요."
"버틴 게 아니라 살았어. 살아야 했으니까."
"후회는 없으세요?"
할머니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래 생각하셨다.
"후회... 있지. 고향 못 간 거. 부모님 못 만난 거. 근데 어쩌겠어. 그게 내 운명이었어."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민수는 가슴이 먹먹했다.
1년 후, 『춘천 망대골목 아카이브』가 출간됐다. 춘천시가 공식 발행한 책이었다.
책에는 30명의 주민 인터뷰, 70년 역사, 수백 장의 사진이 담겼다.
책 출간 기념회가 망대골목에서 열렸다. 많은 주민들이 참석했다. 김순자 할머니도 오셨다.
"할머니, 책 받으세요."
민수가 책을 드렸다.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 펼쳐보셨다.
자신의 인터뷰 페이지를 보시더니 눈물을 흘리셨다.
"내 이야기가... 책에..."
"할머니 이야기는 역사예요. 많은 사람들이 읽을 거예요."
"고마워요. 누가 나를 기억해줄 줄 몰랐어."
그날 밤, 민수는 망대에 혼자 올라갔다. 춘천의 야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70년 전 피난민의 삶을, 가파른 계단의 고된 일상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고 깨달았다. 기록은 구원이라는 것을. 잊혀질 뻔한 삶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부부의 골목 아카이빙은 이제 완전히 사명이 되었다. 개인의 취미에서 시작해, 사회적 운동이 되고, 이제는 공식 역사 기록이 되었다.
망대골목은 그 여정의 중요한 지점이었다. 가장 가파르고, 가장 낡고, 가장 아픈 곳. 하지만 가장 진실한 곳.
오늘도 망대골목에는 할머니들이 산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70년을 산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책이 되었다. 사라지지 않고, 기억되고, 전해질 이야기로.
민수는 가끔 망대에 올라 춘천을 바라본다. 성당의 첨탑, 망대골목의 지붕들, 육림고개의 불빛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전쟁의 상처와 청년의 희망이 함께 사는 곳.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민수는 계속 걷는다.
언덕을 오르고 내리며. 시간을 품고 있는 골목들을.
끝나지 않는 여정. 이어지는 기록. 남겨지는 기억.
망대골목처럼,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