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으로 가는 길
용인으로 가는 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강민준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맑았다. 하늘이 낮게 내려앉지 않았다. 높고 투명했다.
겨울의 맑은 날이었다.
강민준은 이것을 어젯밤에 알았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이. 하지만 맞았다.
씻고 옷을 입었다. 검정 코트를 입었다. 오늘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생각하면서 입은 옷이었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서윤아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기자님, 저 지금 출발해요. 수국 잘 챙겼어요."
함재식에게서도 문자가 와 있었다.
"기차 탔소. 열 시 반에 수원에 도착하오."
한무경의 집사에게서도.
"명예회장님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컨디션 괜찮으십니다."
강민준은 그 문자들을 읽으면서 각자가 오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강민준은 가방을 챙겼다. 노트와 펜을 넣었다. 오늘 기사를 쓰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트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기자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핸드폰에 저장된 한재원의 사진을 한 번 더 봤다.
온화한 눈.
강민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원룸을 나왔다.
합정동 거리가 겨울 아침 햇빛을 받고 있었다. 가게들이 막 문을 열기 시작하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이 적었다. 이른 시간이었다.
강민준은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신분당선을 타고 수원역에서 함재식을 만나기로 했다. 거기서 한무경이 보낸 차를 함께 타고 용인으로 가기로 했다. 서윤아는 자신의 차를 직접 몰고 온다고 했다.
지하철 안에서 강민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이 빠르게 지나갔다. 건물들, 도로들, 다리들. 강민준이 이 이야기에서 다닌 곳들이 그 안에 있었다. 한성타워가 어딘가에 있었다. 합정동이 뒤에 있었다. 한강이 한 번 보였다가 사라졌다.
강민준은 그것들을 보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오늘은 생각하지 않고 느끼는 날이었다.
수원역에서 함재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마의 붕대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이었다. 흉터가 남아있었지만 아물어 있었다. 코트를 입고 있었다. 차림이 평소보다 더 단정했다.
"왔소."
"왔습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한무경이 보낸 차가 역 앞에 와 있었다.
차를 타고 용인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겨울 들판이 지나갔다. 수확이 끝난 들판이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땅이었다. 하지만 그 텅 빈 땅이 겨울 햇빛을 받아 황금빛이었다.
함재식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날씨가 좋구먼."
"네."
"이런 날에 가야 했소."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이런 날에 가야 했소.
맞았다. 이런 날이어야 했다.
용인 고택에 도착한 것은 열한 시가 조금 안 됐을 때였다.
서윤아의 차가 먼저 와 있었다. 서윤아가 차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국을 든 채로.
그리고 한무경이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네 사람이 모였다.
한재원의 묘 앞에서
고택 뒤편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집사가 앞장섰다. 네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한무경이 걸음이 느렸다. 퇴원한 지 얼마 안 됐고, 산길이었다. 집사가 옆에서 부축했다.
강민준은 한무경의 걸음 속도에 맞춰 걸었다.
소나무들이 양쪽에 서 있었다. 고택의 소나무들이었다. 몇 백 년 된 나무들이 겨울에도 초록이었다. 그 사이로 햇빛이 내려왔다.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한 햇빛이 땅 위에 무늬를 만들었다.
오 분쯤 걸었을 때 길이 열렸다.
작은 묘역이었다. 한 씨 가문의 묘역이었다. 오래된 묘들이 여러 기 있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새 것이 보였다.
비석이 있었다.
한재원.
날짜가 있었다. 태어난 날과 간 날.
강민준은 그 비석을 처음으로 보았다.
활자로만 존재했던 이름이 돌 위에 새겨져 있었다.
한재원.
강민준은 그 이름 앞에서 멈췄다.
서윤아가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수국을 놓았다.
연보라와 흰색의 건조 수국이 비석 앞에 놓였다.
봄에 피었던 것이 겨울까지 남아있는 꽃.
서윤아가 손을 모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강민준은 서윤아를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두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의 방식으로 있을 시간이었다.
함재식이 비석 앞에 섰다.
강민준과 다르게 함재식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냥 섰다. 하지만 고개를 숙였다.
오래 숙이고 있었다.
그 고개 숙임 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이 있었다.
함재식이 이 사람한테 3년을 진 것을 갚는 것이었다. 3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혼자 버티고, 다치고, 증인석에 서고. 그 모든 것이 이 고개 숙임 안에 있었다.
빚을 갚는 것이었다. 하지만 빚을 갚는 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는 종류의 빚이었다.
강민준은 비석 앞에 섰다.
한재원.
강민준은 이 이름 앞에서 독심술을 쓰려 하지 않았다.
쓸 수도 없었다. 돌이 반응하지 않았다. 동공이 없었다. 근육이 없었다.
하지만 강민준은 그 이름 앞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읽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말로 옮기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이 사람이 여기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사람이 강민준을 믿었다는 것.
그 두 가지가 이 비석 앞에서 강민준에게 왔다.
강민준은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한다는 말을 받았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말했다.
그리고 다 했습니다.
완벽하게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박기태를 더 읽었어야 했고, 홍준기를 더 빨리 추적했어야 했습니다.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만큼은 할 수 있었습니다.
강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보였다. 겨울 하늘. 맑고 높았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햇빛이 내려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무경이 비석 앞으로 걸어왔다.
집사가 부축하려 했다. 한무경이 손을 저었다.
혼자 걸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지만 멈추지 않고.
비석 앞에 섰다.
서윤아와 함재식이 옆으로 물러섰다. 강민준도 물러섰다.
한무경이 비석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강민준은 읽었다.
이 이야기에서 한무경의 눈을 네 번 읽었다.
처음은 후회와 내려놓음이 반반이었다. 두 번째는 결심이 있었다. 세 번째는 가벼움이 있었다. 병원에서 봤을 때는 간절함이 있었다.
지금.
지금 한무경의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있었다.
후회, 결심, 가벼움, 간절함.
그리고 그 위에 하나가 더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로서의 눈이었다. 아들 앞에 선 아버지의 눈. 오래 만나지 못한 아들 앞에 처음 선 것처럼. 하지만 이 만남이 말이 닿지 않는 만남이라는 것을 알면서.
한무경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들렸다.
"재원아."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한무경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강민준은 그 침묵을 읽었다.
준비했던 말이 막히는 것이었다. 실제 앞에 섰을 때, 준비했던 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었다.
한무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옳았소."
그 네 글자.
강민준이 병원에서 한무경에게 들었던 말.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던 말.
이제 그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직접 나왔다.
"네가 옳았소. 나는 틀렸소."
한무경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강민준은 한무경의 눈을 읽었다. 눈물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눈물이 마른 것이었다.
하지만 눈물이 있었어야 할 자리가 보였다. 그 자리가 텅 비어있는 것이 눈물보다 더 무거웠다.
"재원아, 미안하오."
그 말이 겨울 소나무 사이에 놓였다.
바람이 없었다. 소나무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햇빛만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고맙소."
강민준은 그 말에서 잠시 멈췄다.
고맙소.
미안하다는 말 다음에 고맙다는 말이 왔다.
무엇에 대한 감사인가.
강민준이 읽은 것은 이것이었다.
한재원이 아버지에게 화를 품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한무경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무경에게 고마웠다. 아버지를 원망할 자격이 있었는데, 그것을 품으면서도 용서하세요, 라고 했던 것.
아들이 아버지를 용서한 것에 대한 감사였다.
한무경이 비석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이었다. 겨울 돌이었다. 하지만 한무경이 손을 얹었다.
잠시 그렇게 있었다.
강민준은 그 장면을 보았다.
읽지 않았다. 그냥 보았다.
어떤 것들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다.
서윤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닦지 않으면서.
함재식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강민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소나무 사이의 햇빛이 비석 위에 내려와 있었다.
수국이 비석 앞에 놓여 있었다.
각자가 남기는 것
한무경이 비석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집사가 다가와 부축했다.
한무경이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강민준, 서윤아, 함재식.
한무경이 말했다.
"이 아이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맙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말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였다.
네 사람은 잠시 더 그 자리에 있었다.
강민준은 그 시간 동안 각자가 무엇을 남기는지 생각했다.
서윤아가 남기는 것. 수국. 그리고 이 사람을 기억하는 것. 새 직장을 찾으면서도, 새로운 삶을 살면서도, 이 사람을 기억하는 것.
함재식이 남기는 것. 3년의 시간. 그 시간이 이제 법정에서 처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이 비석 앞에서 완성됐다.
한무경이 남기는 것. 말하지 못했던 말. 네가 옳았소. 그 말이 이제 이 자리에 있었다. 돌아갈 수 없지만, 이제 말해졌다.
그리고 강민준이 남기는 것.
기사.
기사들이 세상에 나갔다. 사람들이 읽었다. 진실이 드러났다. 재판이 시작됐다.
그것이 강민준이 이 이야기에서 남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
기사를 쓰는 것을 넘어서, 이 자리에 있는 것. 한재원이 선택한 기자로서, 그 선택에 끝까지 답하는 것.
강민준은 그것이 이 이야기에서 강민준이 해야 했던 마지막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사를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것이 필요했다.
서윤아가 강민준에게 말했다.
"기자님."
"네."
"부회장님이 기자님을 잘 골랐어요."
그 말이 단순했다. 하지만 강민준에게 닿았다.
"감사합니다."
함재식이 비석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잘 있으시오, 부회장님."
그 인사가 짧았다. 함재식다운 인사였다.
한무경이 강민준에게 말했다.
"기자 양반."
"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소."
강민준은 고개를 숙였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한무경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집사가 부축해서 걷기 시작했다.
서윤아가 그 뒤를 따랐다.
함재식이 강민준을 보았다.
"가겠소?"
"잠깐 더 있겠습니다."
함재식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갔다.
강민준 혼자 남았다.
마지막 회를 향한 복선
강민준은 비석 앞에 혼자 섰다.
한재원.
이름이 햇빛을 받아 선명했다.
강민준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서윤아에게 받은 사진을 열었다. 온화한 눈.
그리고 비석을 보았다.
사진 속의 눈과 비석을 번갈아 보았다.
같은 사람이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당연한 것이 강민준에게 처음으로 실감됐다.
이 사람이 살았었다.
살았고, 생각했고,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움직였고, 누군가를 선택했고, 그리고 없어졌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소리 내어.
"잘 부탁한다는 말을 받았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담담했다.
"다 했습니다."
바람이 없었다. 소나무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민준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이 자리가 조용하지 않다는 것.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조용하지 않았다.
뭔가가 여기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강민준은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면 작아질 것 같았다.
그냥 두었다.
여기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민준은 비석 앞에서 물러섰다.
수국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건조 수국이 겨울 햇빛 안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봄에 피었던 것이 겨울까지.
강민준은 돌아서서 걸었다.
소나무 사이의 길을 걸어 고택 쪽으로 내려갔다.
햇빛이 길 위에 깔려 있었다. 강민준은 그 햇빛 위를 걸었다.
걸으면서 강민준은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한재원의 기일이 지났다. 그것으로 이 이야기에서 강민준이 해야 할 것들의 가장 중요한 것이 됐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직 한 회가 남아 있었다.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 한무경의 법적 처리가 남아있었다. 함재식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서윤아가 새 직장을 찾고 있었다. 이혜정이 편집국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강민준은 다음 기사를 써야 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기사.
한재도의 최후 진술에서 한 말. 재원이는 제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담은 기사. 이 이야기 전체를 하나로 묶는 기사.
강민준은 그것을 써야 했다.
고택 마당에 도착했다.
한무경이 마당 안에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집사가 옆에 있었다. 서윤아와 함재식이 한무경 옆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햇빛 안에 있었다.
강민준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서윤아가 보았다.
"다녀오셨어요?"
"네."
"어땠어요?"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좋았습니다."
그 말이 전부였다.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서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재식이 강민준을 보았다.
"이제 됐소?"
강민준은 그 질문을 들었다.
이제 됐소.
강민준은 대답하기 전에 생각했다.
이제 됐는가.
기사가 나갔다. 한재도가 법정에 섰다. 한무경이 아들에게 말했다. 서윤아가 수국을 놓았다. 함재식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강민준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 됐는가.
"아직 마지막 기사가 남아있습니다."
함재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쓰고 나서 됩니까?"
"쓰고 나면 될 것 같습니다."
함재식이 작게 웃었다.
이 이야기에서 함재식이 웃는 것을 강민준이 처음 봤다. 아주 작고 짧은 것이었지만.
"어서 쓰시오, 그러면."
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무경이 강민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들어가서 식사하고 가시오."
"감사합니다."
네 사람은 고택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 햇빛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소나무가 그 햇빛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었다.
오래, 오래 서 있어온 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