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화면 앞에서
기일 다음 날이었다.
강민준은 오전 여섯 시에 일어났다. 창밖이 아직 어두웠다. 겨울의 이른 아침이었다.
씻고 커피를 끓였다.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었다.빈 화면이었다.
강민준은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에서 빈 화면 앞에 앉은 것이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처음 기사를 쓰던 날 밤. 열이틀 동안 모은 것들을 문장으로 만들던 밤. 그 밤에 함재식이 폭행을 당했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썼다.
두 번째는 한재원에 대한 기사를 쓰던 날. 한재원은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라는 첫 문장을 타이핑하던 날.
그리고 지금.
세 번째 빈 화면.
이 화면 안에 들어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강민준은 알고 있었다.
한재도의 최후 진술. 재원이는 제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말이 이 기사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전체. 처음부터 지금까지.
강민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뜨거웠다.
취재 노트를 펼쳤다. 첫 번째 페이지. 박기태. 한성타워. 엘리베이터. 그 놈 눈이 이상해.
마지막 페이지. 용인 고택. 소나무. 비석. 수국.
그 사이에 열닷새의 취재와 두 달의 재판이 있었다.
강민준은 노트를 닫았다.
이 기사는 노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살아온 것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강민준은 제목을 먼저 썼다.
재원이는 보고 있었다
그 제목이 화면에 있었다.
강민준은 그것을 읽었다.
맞았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기사 제목이었다.
마지막 기사를 쓰는 밤
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오전 일곱 시였다.
강민준은 처음 문장을 썼다.
한재도 회장은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원이는 제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말이 이 사건의 마지막 문장이 되어야 한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문장을 쓰고 읽었다. 다시 읽었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이 맞았다. 한재도가 한 말로 시작하는 것.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해 인정한 말로.
그다음 문장을 썼다.
이 이야기는 한재원 부회장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그 죽음이 시작이 아니었다. 한재원이 GV-3이라는 구조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그것에 저항하기로 결심했을 때, 혼자 그 저항을 감당했을 때, 그것이 시작이었다.
강민준은 계속 썼다.
박기태가 증인석에서 한 말을 썼다. 저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막지 않았습니다.
함재식이 3년 동안 한 것을 썼다. 혼자서 자료를 모으고, 기자를 기다리고, 증언을 마친 것.
한무경이 기일에 한 말을 썼다. 네가 옳았소. 그 말이 비석 앞에 놓인 것.
서윤아가 수국을 놓은 것을 썼다. 봄에 피었던 것이 겨울까지 남아있는 꽃.
쓰다 보니 해가 올라왔다. 오전이 지나갔다.
점심을 먹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이런 날이 있었다. 쓰는 것이 먹는 것보다 필요한 날.
오후에도 계속 썼다.
이 기사에서 강민준은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기자라고만 썼다. 이 이야기에서 기자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쓰면서, 기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강민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한재원에 관한 것이었다.
저녁이 됐다.
강민준은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쓰기 시작했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웠다. 어떻게 끝내야 하는가.
판결이 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법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사는 끝나야 했다.
강민준은 기사가 법적 결론을 담는 것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사는 그 시점에서 알 수 있는 것들을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한재원이 옳았다는 것.
강민준은 마지막 문단을 썼다.
한재원 부회장이 선택한 것은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 저항이 싸움의 형태가 아니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에서 기자가 배운 것이다. 그는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맞서지 않았다. 다만 진실을 남겼다. 그리고 그 진실이 일 년이 지나서, 세상에 나왔다.
한재도 회장이 법정에서 인정한 것처럼, 한재원은 형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비석 앞에서 인정한 것처럼, 그가 옳았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재판이 남아있고, 판결이 남아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이미 끝났다.
한재원이 원한 것이, 세상에 나왔다.
강민준은 마지막 문장을 타이핑하고 멈췄다.
한재원이 원한 것이, 세상에 나왔다.
그 문장을 읽었다.
맞았다.
이것이 마지막 문장이었다.
강민준은 기사를 처음부터 한 번 더 읽었다. 한 시간이 걸렸다. 읽으면서 수정했다. 불필요한 것을 뺐다. 부정확한 것을 고쳤다. 감정이 앞선 문장을 사실에 가깝게 다듬었다.
밤 열한 시가 됐다.
강민준은 이혜정에게 전화했다.
"기사 완성됐습니다."
이혜정이 잠시 말이 없었다.
"보내."
강민준이 보냈다.
이혜정이 읽는 데 삼십 분이 걸렸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올리자."
"네."
"민준아."
"네."
이혜정이 잠시 있다가 말했다.
"잘했어."
그 두 글자.
강민준은 그 말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자."
전화가 끊겼다.
강민준은 노트북을 닫았다.
창밖을 보았다. 합정동의 밤. 한강이 빛나고 있었다.
강민준은 침대에 누웠다.
잠이 왔다. 빠르게 왔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깊은 잠이었다.
기사가 나가는 아침
다음 날 오전 여덟 시, 기사가 올라갔다.
《한국시사주간》 웹사이트 메인. 탐사보도팀 이름으로.
재원이는 보고 있었다 — 한성그룹 사건, 한 사람의 이야기로
강민준은 편집국 자리에서 기사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화면을 바라보았다.
제목이 있었다. 자신이 쓴 제목. 기사가 있었다. 자신이 쓴 문장들.
반응이 시작되는 데 오 분이 걸리지 않았다.
SNS에서 공유가 시작됐다. 포털에서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댓글들이 달렸다.
강민준은 그 반응들을 확인하지 않았다.
기사가 나갔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반응은 세상이 알아서 할 것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함재식이었다.
"기사 봤소."
"어떻습니까."
"마지막 문장이 좋았소."
"감사합니다."
"이제 다 됐소?"
강민준은 그 질문을 받았다.
이제 다 됐는가.
어제 기일에서 함재식이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어제는 마지막 기사가 남아있었다. 지금은 기사가 나갔다.
"네. 다 됐습니다."
"고생했소."
함재식이 전화를 끊었다.
서윤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기자님 기사 읽었어요. 마지막 문장에서 눈물이 났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한 건 저예요."
한무경의 집사에게서도 문자가 왔다.
"명예회장님이 기사를 읽으셨습니다.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오래 읽으셨습니다."
강민준은 그 문자를 읽었다.
아무 말씀 없이 오래 읽으셨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혜정이 편집국 안에서 강민준에게 걸어왔다. 자리 앞에 서더니 말했다.
"대표이사가 이 기사 보고 아무 말도 안 했어."
"좋은 겁니까."
"좋은 거야. 뭔가 하려다가 못 한 거야."
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혜정이 돌아서려다가 멈췄다.
"한재원 기사 세 편. 첫 번째, 두 번째, 이번 것. 나중에 단행본으로 묶자."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이혜정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편집국이 평소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기자들이 타이핑하고, 전화하고, 회의하고. 강민준의 기사가 나간 날도 편집국은 편집국이었다.
강민준은 그것이 좋았다.
세상이 이 사건으로 잠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계속 돌아간다는 것. 그 돌아감 안에서 이 기사가 조용히 자리를 잡아가는 것.
독심술에 대하여
점심 이후, 강민준은 편집국을 나와 한강변을 걸었다.
이 이야기에서 강민준이 여러 번 걸었던 길이었다. 합정동 한강변.
겨울 한강이었다. 강물이 낮은 햇빛을 받아 은빛이었다.
강민준은 걸으면서 생각했다.
독심술에 대하여.
이 이야기가 끝나면서 이 능력에 대해 처음으로 다시 생각했다.
삼십사 년 동안 이 능력과 함께 살았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자신이 안다는 것이 어릴 때는 무서웠다. 다른 사람들이 숨기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때로는 부담이었다.
기자가 되면서 이 능력이 자신의 방식이 됐다. 눈을 읽고,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것.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독심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할 수 있는 것.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이 느끼는 것을 읽는 것. 두려움, 결심, 피로, 후회, 체념, 안도. 그것들을 읽는 것.
할 수 없는 것. 그 감정이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 한 번의 읽기로 한 사람을 다 아는 것. 그리고 죽은 사람의 눈을 읽는 것.
한재원의 눈을 읽지 못했다.
사진에서도, 비석 앞에서도.
하지만 강민준은 이 이야기를 통해 한재원을 알게 됐다. 그 사람이 남긴 것들을 통해. 그 사람을 알았던 사람들을 통해. 그 사람이 선택한 것들을 통해.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이 이 이야기가 독심술에 대해 가르쳐준 것이었다.
읽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들은 것, 받은 것, 함께 있었던 것. 그것들도 앎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독심술이 흔들렸던 순간.
이혜정을 의심했던 새벽. 자신이 본 것이 진짜인지 의심한 순간. 그 흔들림이 이 이야기에서 강민준을 가장 취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이 나쁜 것이 아니었다.
흔들린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함재식이 말했다.
맞았다.
완벽하게 읽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흔들리면서도 계속 읽는 것이 목표였다.
강민준은 한강변 벤치에 앉았다.
차가운 벤치였다. 하지만 앉았다.
이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이 왜인지 강민준은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이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재원도 같은 능력을 조금 갖고 있었다고 이혜정이 말했다. 그래서 강민준을 알아봤다고.
같은 것을 가진 두 사람.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살아서 그 죽음을 기사로 썼다.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강민준은 판단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이야기가 이렇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강민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오래 흘러온 강.
강민준은 그 강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다음 이야기가 있을 것이었다.
언제 올지 몰랐다. 어디서 올지 몰랐다. 하지만 올 것이었다.
기자에게 이야기는 항상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민준은 그 이야기를 읽을 것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흔들리면서도.
The End of the Story
이야기의 끝
저녁이 됐다.
강민준은 합정동 원룸으로 돌아왔다.
방 안이 조용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코트를 걸었다. 가방을 내려놓았다.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기사 화면이 아니었다. 빈 문서를 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읽은 눈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떠올렸다.
박기태의 눈. 두려움. 나중에 안도.
서윤아의 눈. 두려움과 신뢰. 나중에 따뜻함.
함재식의 눈. 3년의 무게. 나중에 가벼움.
한상민의 눈. 오래된 피로. 나중에 비어있음.
홍준기의 눈. 눌린 죄책감. 나중에 결단.
한재도의 눈. 체념과 단단함. 그리고 최후 진술에서 형으로서 처음 보인 것.
한무경의 눈. 후회, 결심, 가벼움, 간절함. 그리고 비석 앞에서 아버지의 눈.
이혜정의 눈. 분노와 동료애. 그리고 이 이야기 내내 강민준을 지탱한 것.
그리고 한재원.
읽지 못한 눈. 사진 안의 온화한 눈.
읽지 못했지만 알게 된 눈.
강민준은 빈 문서에 한 줄을 썼다.
사람의 눈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
그 문장을 읽었다.
이 이야기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눈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눈을 만나는 것이었다. 읽는 것과 만나는 것은 달랐다. 읽는 것은 해석하는 것이었다. 만나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었다.
강민준은 그 문장 아래에 또 한 줄을 썼다.
만나지 못한 눈도 있었다. 그 눈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눈이었다.
그 두 문장을 읽었다.
기사로 쓸 것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것이 아니었다.
강민준이 이 이야기를 끝내면서 자신에게 쓰는 것이었다.
빈 문서를 저장하지 않고 닫았다.
노트북을 닫았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온 문자가 서윤아였다.
"기자님, 오늘 새 직장 면접이 있었어요. 잘 된 것 같아요."
강민준이 답했다.
"잘 됐습니다."
"기자님 덕분에요."
"서윤아 씨 덕분입니다."
"우리 둘 다 덕분이네요."
강민준은 그 문자를 읽으면서 작게 웃었다.
우리 둘 다 덕분이네요.
그 말이 맞았다.
이 이야기는 혼자 한 것이 아니었다. 강민준 혼자가 아니었다. 서윤아가 USB를 들고 나왔고, 함재식이 3년을 버텼고, 이혜정이 기자증을 지켰고, 한무경이 비석 앞에 섰다.
그 모든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강민준은 그것을 읽었을 뿐이었다.
창밖을 보았다.
합정동의 밤이었다. 한강이 멀리 빛났다.
강민준은 창을 열었다.
겨울 공기가 들어왔다. 차가웠다. 하지만 맑았다.
강민준은 그 공기를 들이쉬었다.
이 이야기가 끝났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강민준은 창을 닫았다.
코트를 다시 입었다.
가방을 들었다.
문을 열고 원룸을 나섰다.
합정동 거리로 나왔다.
겨울 밤이었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거리에 사람이 조금 있었다. 카페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강민준은 걸었다.
방향을 정하지 않고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하지만 걸었다.
이 이야기를 끝낸 사람이 다음 이야기를 향해 걷는 것이었다.
한강이 보이는 곳에 왔다.
강민준은 멈추었다.
한강이 흘렀다.
오래, 오래 흘러온 강.
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도 흘렀고,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흘렀고, 이 이야기가 끝난 지금도 흘렀다.
강민준은 그 강을 바라보았다.
오래.
그리고 돌아섰다.
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를.
겨울 밤을.
다음을 향해.
이 이야기는 끝났다.
조용히.
단단하게.
등장인물 최종 결말
강민준 — 마지막 기사를 완성하고 다음 이야기를 향해 걷는다.
한재원 — 이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 그가 원한 것이 세상에 나왔다.
서윤아 — 새 직장 면접에 합격했다. 한재원을 기억하면서 새 삶을 시작한다.
함재식 — 증언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3년의 빚을 갚았다.
한상민 — 검찰에 협조하며 법원의 판단을 기다린다.
홍준기 — 자수 후 진술을 마쳤다. 법적 처리 진행 중.
박기태 — 자백 후 재판을 기다린다. 막지 못한 것의 무게를 들고.
한재도 —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마쳤다. 재판 결과를 기다린다.
한무경 —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옳았소. 법적 처리 진행 중.
이혜정 — 편집국에서 계속 싸운다. 다음 기사를 준비한다.
사람의 눈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
만나지 못한 눈도 있었다. 그 눈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