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속도로
복직 첫날.
민준은 7시 대신 8시에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뛰어타지 않았다.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3분을 기다렸다.
회사에 도착한 것은 8시 52분이었다. 9시 회의 시작 8분 전.
박성태 팀장이 그를 보며 말했다. "다 나았어요? 확실히 좀 달라 보이는데."
민준은 미소 지었다. "좀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회의는 똑같이 진행됐다. 숫자들, 목표들, 화살표들. 그러나 민준은 그 회의 중에 처음으로 한 가지를 건의했다.
"이번 캠페인, 실제 소비자 인터뷰를 좀 더 깊이 있게 진행하면 어떨까요? 숫자 너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한 달 정도요."
"한 달이요? 빠르게 가야 하는데."
"방향이 맞으면 속도는 따라옵니다."
팀장이 멈칫했다. 누군가 '오호' 하는 소리를 냈다. 민준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민준은 소비자 인터뷰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대형마트, 골목 상권, 온라인 커뮤니티, 노인정, 초등학교 앞 문방구.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 숫자가 아닌 삶을.
처음엔 효율이 낮아 보였다. 그러나 한 달 뒤, 그 인터뷰에서 건진 단 하나의 통찰이 캠페인 전체를 바꿨다.
"사람들은 제품보다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 슬로건이 들어간 광고가 나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유 수, 검색 증가율, 브랜드 호감도가 모두 뛰었다.
팀장이 말했다. "강 차장, 이번엔 진짜 제대로 했네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더 기뻤던 것은 실적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었다. 은퇴한 공장 노동자, 갓 결혼한 신혼부부,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그들의 이야기가 마케팅이 되고, 그 마케팅이 세상에 나갔다.
스물두 살의 민준이 원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 해 말, 인사 시즌.
승진 명단에 민준의 이름이 올랐다. 부장 승진.
그것이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지금은 기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기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차이를 민준은 알았다.
퇴근길에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버지, 승진했어요."
"그래? 잘됐다."
"네."
"이제 더 바빠지겠네."
"아니요, 저 이제 좀 다르게 살려고요."
"어떻게?"
"빠르게 말고, 제 방향으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거면 됐다."
그것이 아버지의 축하였다. 짧고 단단하고, 충분했다.
봄이 왔다.
민준은 주말 아침을 달리지 않았다. MBA 학원을 끊었다. 인맥 모임에서 탈퇴했다. 대신 그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대학 때 잠깐 썼던 에세이를 다시 꺼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
블로그에 올렸다. 처음엔 읽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 썼다. 이번엔 조회수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회수가 낮아도 멈추지 않았다.
세 달 뒤, 한 독자가 댓글을 달았다.
"이 글 읽고 울었어요. 제 이야기인 것 같아서요."
민준은 그 댓글을 한참 바라봤다.
한 사람의 마음에 가닿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 전부였다.
1년이 지났다.
강민준 부장은 아직도 KM전자에 다니고 있었다. 연봉은 더 올랐고, 팀은 커졌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일 때문에 패닉 어택이 오지 않았다. 퇴근이 매일 11시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답장을 미루지 않았다.
여전히 바빴다. 그러나 이전과 달랐다.
이전의 바쁨은 쫓기는 것이었다. 지금의 바쁨은 걸어가는 것이었다. 둘 다 움직이지만 다른 것이었다. 방향이 있는 걸음은 느려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어느 날 저녁, 민준은 회사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서울의 노을이 빌딩 사이로 흘러내렸다. 누군가 달리고 있었다. 정장 차림에 가방을 든 채 지하철역으로. 1년 전의 자신이었다.
그는 그를 불러 세우고 싶었다. 말해주고 싶었다.
'조금 느려도 괜찮아. 그 방향이 맞으면.'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져 있었다.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는 6시 47분이었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밥을 해먹기로 했다. 처음으로.
그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그로부터 3년 뒤, 강민준은 회사를 나와 작은 마케팅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대기업 클라이언트보다 동네 가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일을 했다. 수입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오전 10시에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골목 떡볶이 집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그 글이 세상에 나가서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좋았다.
아버지는 텃밭에서 여전히 감자를 캤다.
민준은 한 달에 한 번 창원에 내려갔다. 텃밭 옆에 쪼그리고 앉아 흙을 만지며, 아버지와 별 말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리고 방향을 찾기 위해선, 때로는 멈춰야 한다. 가장 용감한 일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리는 방향을 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