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묻다
창원에서의 사흘째 아침.
민준은 아버지를 따라 텃밭에 나갔다.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텃밭 일을 하는 것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움직였다.
잡초를 뽑고, 흙을 고르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손놀림엔 낭비가 없었다. 민준은 처음에 그것이 답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이 답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리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텃밭 하는 거 재밌어요?"
"재밌다기보다는... 맞다."
"맞다요?"
"나한테 맞아. 이게."
민준은 그 말을 한참 생각했다. 맞다. 적성에 맞다, 체질에 맞다는 뜻이겠지만, 어쩐지 그 말이 '방향이 맞다'는 말로 들렸다.
"저는 지금 하는 일이 저한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허리를 펴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안 맞는 거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간단하지.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길이 아니면 돌아가야 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니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민준은 반박하려다 멈췄다.
아버지의 말이 거칠고 단순해 보였지만, 그 안에 뾰족한 것이 있었다.
오후에 민준은 혼자 산책을 나갔다.
어릴 때 자주 오르던 뒷산이었다. 20년 만이었다. 산길은 예전보다 좁아 보였지만 나무는 더 울창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올랐다.
중간쯤에 오래된 벤치가 있었다. 나무로 만든 낡은 벤치. 민준은 거기에 앉았다. 숨을 고르는 동안 새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을까.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진지하게.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승진? 연봉 인상? MBA 합격? 그것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이루면 다음엔 또 무엇이 기다리는가. 더 높은 직위, 더 많은 연봉, 더 어려운 시험. 끝없이 뻗어나가는 사다리. 꼭대기엔 무엇이 있는가.
그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구름이 움직이고, 빛이 기울고, 산 아래 마을에서 저녁 연기가 피어오를 때까지.
그리고 조용히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껏 남들이 빠르다고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날 저녁 아버지와 마루에 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공장 그만뒀어요?"
아버지는 젊을 때 창원 공단의 공장에서 일했다. 라인장까지 올랐다가 50대에 그만뒀다.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때 아깝지 않았어요? 더 올라갈 수 있었는데."
"아깝긴.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거 아니었는데."
"그럼 뭘 원했어요?"
아버지가 막걸리를 한 모금 마셨다.
"이거."
마당을 바라보았다. 감나무. 텃밭. 고요한 저녁.
"이게 전부예요?"
"이게 전부지. 근데 이 전부가 내 것이잖아."
민준은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남들 눈에 작아 보여도, 자신의 것이면 전부가 된다. 그것이 방향이다.
"민준아."
"네."
"니가 뭘 원하는지 알면, 그리로 가면 돼. 모르겠으면 더 멈춰 있어라. 달리다 보면 방향 잃어."
그것이 아버지의 가장 긴 훈계였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밤.
민준은 오래된 일기장을 꺼냈다. 대학교 때 썼던 것이었다. 먼지가 쌓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표지를 닦고 펼쳤다.
스물두 살의 강민준이 거기 있었다.
'나는 나중에 마케팅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이야기를 아름답게 세상에 전달하는 일을 하고 싶다.'
민준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이야기를 아름답게 세상에 전달하는.
언제부터인가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숫자를 보고 있었다.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이 원했던 것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너무 빠르게 달리느라 그 사실을 볼 시간이 없었을 뿐.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
이번엔 창밖을 보지 않았다. 그 대신 노트북을 열었다. 그러나 보고서가 아닌 새 문서를 만들었다.
빈 화면 앞에서 그는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쓰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첫 줄이었다. 그다음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기차는 서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민준은 달리지 않았다. 그는 앉아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달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는 이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