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탈출기 (逃脫記)2(픽션)

호르무즈의 빛 (The Light of Hormuz)

by 이 범

호르무즈의 빛 (The Light of Hormuz)"Ashem Vohu Vahishtem Asti — 진리(眞理)는 선(善)이며, 선은 최상(最上)이다."


— 아베스타 가장 오래된 기도문 (The Most Ancient Zoroastrian Prayer)반다르 아바스 항구(Bandar Abbas Port)의 새벽은 전쟁의 냄새로 가득했다.페르시아만 수평선에는 군함(軍艦)들의 실루엣이 줄지어 서 있었다.


미 해군 제5함대 소속 구축함(驅逐艦) 세 척이 호르무즈 해협 서쪽 입구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란 혁명수비대 고속정(高速艇)들이 그 주변을 긴장된 긴장된 원(圓)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드론(Drone)들이 소리 없이 오갔다. 항구의 어부들은 배를 내놓지 않으려 했다.강준혁은 항구 변두리 찻집에서 연락책(聯絡策)을 기다렸다.


그의 위성전화(衛星電話)가 진동했다.서울 한결신문 국제부 김지수(金智秀) 기자였다."준혁 오빠, 살아있어요?""살아있어. 반다르 아바스야."


"세상에. 지금 외교부(外交部)가 이란 교민(僑民) 전원 철수 권고를 내렸어요. 대사관(大使館)도 비상 철수 절차 시작했고요. 어떻게 나올 거예요?""배로."긴 침묵."해협이 지금 —""알아.""그 연구원 분이랑 같이 있어요?""응."또 침묵.


"그분 문서 — 진짜예요?""진짜야.""그럼 무조건 살아서 나와요. 알았죠?"전화가 끊겼다. 강준혁은 위성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찻잔을 들었다. 이란의 차(茶)는 진했다. 전쟁의 새벽에 마시는 차는 더욱 진했다.


연락책은 유세프(Yusef)라는 이름의 어부였다. 쉰 살에 가까운 그는 강준혁을 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년 전 강준혁이 그의 아들 취업 서류 번역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작았고, 빚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배 하나 있어요. 작아요. 엔진 낡았어요. 하지만 가요." 유세프가 말했다."오만(Oman)까지 갈 수 있어요?"유세프는 잠시 하늘을 보았다."신이 허락하면요."


오전 여섯 시 삼십 분. 해가 뜨기 시작하는 시각.낡은 목선(木船)이 반다르 아바스 항구를 조용히 빠져나갔다. 강준혁은 뱃머리에 앉아 쌍안경(雙眼鏡)으로 수평선을 살폈다.


윤서아는 그의 옆에 앉아 옷 안쪽에 넣어 둔 문서 파우치를 확인했다. 두 한국인이 낡은 이란 어선 위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해협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얼마나 비현실적인 장면인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 선명하게 현실로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두려워요?" 강준혁이 물었다.


"두렵죠. 하지만 —" 윤서아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후라 마즈다는 말했어요. 선한 생각(善思 — Humata), 선한 말(善言 — Hukta), 선한 행동(善行 — Hvarshta).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그 셋 중 하나라도 해당한다면, 길이 열릴 거예요.""셋 다 해당해요."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해요?""당신의 진실이 세상에 나가는 거잖아요. 그게 선한 행동이 아니면 뭐예요."


윤서아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 년을 전쟁터에서 버텨온 기자의 얼굴. 피곤하고 지쳤지만,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은 눈빛. 연구실에서 처음 봤을 때 그녀가 느꼈던 것 — 이 사람은 이름을 묻는 사람이라는 것 — 이 지금 다시 떠올랐다.


"강준혁 씨.""네.""제 이름 알죠?""윤서아 박사님.""그냥 서아라고 불러요."

강준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그럼 저도 그냥 준혁이라고 불러요."바다 위에서, 전쟁의 해협 한가운데에서, 두 한국인은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해협 중앙부에서 긴장이 극에 달했다.미 해군 구축함 USS 래버지(USS Labarge)가 확성기(擴聲器)로 경고를 보냈다. 이란 혁명수비대 고속정 두 척이 목선 쪽으로 접근했다. 강준혁은 즉각 카메라를 들었다. 기자증(記者證)을 꺼내 흔들었다.


영어(英語)로 소리쳤다."Press! Korean journalist! We are civilian(我等은 民間人이다)!"혁명수비대 고속정의 확성기에서 페르시아어(Persian)가 쏟아졌다. 윤서아가 즉각 유창한 페르시아어로 응답했다.


( 차분하고 또렷하게. 그녀는 말했다 — 자신은 한국 국적의 고고학 연구자이며, 국제 고고학 학술회의(International Archaeological Conference) 참석을 위해 오만으로 가는 중이라고. 학술 서류를 보여주겠다고.혁명수비대 병사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동양인 여성이 완벽한 페르시아어로 침착하게 말하는 모습은 그들이 예상한 상황이 아니었다.그 찰나.북쪽 하늘에서 전투기 두 대가 굉음을 내며 저공비행(低空飛行)으로 지나쳤다.


미 해군 F/A-18. 해협 위를 가로지르는 무력 시위(武力示威). 동시에 수평선에서 미사일 연기가 올랐다.


이란 해안 기지(海岸基地)에서 발사된 경고 미사일이 해협 동쪽 수면(水面)에 떨어졌다.모든 것이 혼돈(混沌)으로 변했다.혁명수비대 고속정이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미 해군 구축함이 방어 기동(防禦機動)을 시작했다. 그 혼란 속에서, 유세프의 목선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틈을 타 해협 남쪽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전투는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강준혁과 윤서아는 뱃전에 바짝 몸을 낮추었다. 포성(砲聲)이 귀를 찢었다. 불타는 이란 미사일 보트 하나가 그들의 배에서 불과 이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발했다.


불꽃이 수면을 타고 번졌다. 유세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배를 몰았다.강준혁이 윤서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 좁은 목선의 뱃전에서, 호르무즈 해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았다.윤서아가 강준혁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호르무즈(Hormuz)라는 이름이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에서 왔다는 거 알죠?""알아요.""그러면 지금 우리는 — 지혜의 주(主)의 이름을 가진 해협을 건너고 있는 거예요.


"강준혁은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2500년 전의 신이 이름을 남긴 바다. 그 바다가 지금 인간의 전쟁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꽃 사이를 두 한국인이 건너고 있었다. 진실을 품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어쩌면 이것이 아후라 마즈다가 말한 선한 행동이었는지도 몰랐다.


전쟁 속에서 진실을 지키는 것. 불꽃 속에서 서로를 놓지 않는 것.

오전 아홉 시 십오 분.오만(Oman) 해역(海域).목선이 오만 해안경비대(Oman Coast Guard) 선박과 조우(遭遇)했다.


강준혁이 기자증과 여권(旅券)을 꺼냈다. 윤서아는 연구자 신분증과 한국 여권(大韓民國旅券)을 내밀었다. 오만 해안경비대 대원은 위성전화로 어딘가와 통화를 했다. 이십 분이 지났다.강준혁은 숨을 참았다.그리고 대원이 말했다."오세요."


무스카트(Muscat, Oman) 국제공항(國際空港). 오후 두 시.강준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나흘 동안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의 카메라 메모리카드 안에는 윤서아의 문서 사진과 테헤란의 기록들이 담겨 있었다. 한겨레신문 서버에는 이미 위성 업로드(Satellite Upload)가 완료되어 있었다.윤서아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공항 편의점에서 산 생수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로 아라비아해(Arabian Sea)의 눈부신 아침빛이 스며들고 있었다."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강준혁이 물었다."모르겠어요." 윤서아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처음으로 — 모르는 상태가 괜찮아요.""인천행(仁川行) 비행기가 다섯 시간 후에 있어요."윤서아는 잠시 생각했다.


"한국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까요? 이 문서를요.""할 수 있어요. 서아 씨가 가져온 거잖아요. 세상이 들어야 할 이야기예요."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테헤란의 연구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날카롭고 또렷한 눈. 하지만 그 안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었다. 석류(石榴)처럼 붉고, 파라바하르의 날개처럼 자유로운 것."준혁 씨.""네.""이름을 묻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요.""네."


:제 이름은 윤서아예요. 서아. 기억해요."강준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웃었다. 사 년간의 전쟁터에서, 수많은 이름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버텨온 기자가 짓는, 가장 인간적인 웃음이었다."기억해요. 윤서아."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공항의 아침빛이 유리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먼 수평선 어딘가, 호르무즈 해협은 여전히 불타고 있을 것이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건넜다.


두 한국인이, 2500년 된 신의 이름을 가진 바다 위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 지혜의 주(主)는 아마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빛은, 언제나 어둠을 건넌다.


에필로그 (Epilogue — 終章)서울, 그로부터 석 달 후.《한결신문》 1면에 강준혁의 기사가 실렸다."파라바하르의 암호 — 13세기 조로아스터교 지도, 이란 비밀 핵 터널망을 폭로하다"


(The Faravahar Code: How a 13th-Century Zoroastrian Map Revealed Iran's Secret Nuclear Tunnel Network)기사 바이라인(Byline)에는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강준혁 기자 · 윤서아 박사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은 윤서아에게 중동 고대 문명 특별 연구직(特別硏究職)을 제안했다. 그녀의 아베스타 고문서 연구는 그해 가을 국제 고고학 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Archaeology)에 게재되었다. 논문 서두에는 이런 헌사(獻辭)가 적혀 있었다."아흐마드 카리미에게 — 이란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그들이 무스카트 공항에서 나란히 탔던 인천행 비행기 창문 너머로, 마지막으로 보였던 것은 — 아라비아해 위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였다.마치 파라바하르(Faravahar)의 날개처럼, 수평선을 향해 펼쳐지는 빛이었다.


Ashem Vohu — 진리는 선이며, 선은 최상이다."
아베스타 (Avesta), 기원전 100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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