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말살정책
1930년대 중반, 영광 지역에도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본격적으로 밀려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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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 앞 게시판에는 새로운 포고문이 연일 붙었다.
"창씨개명 실시 - 모든 조선인은 일본식 성명으로 개명할 것"
"신사참배 의무화 - 매월 1일, 15일 신사 참배 필수"
"황국신민서사 암송 - 모든 학교 및 관공서에서 매일 아침 실시"
마을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자신의 이름마저 빼앗기게 된 것이다.
영광경찰서에서는 일본인 관리들이 조선인 유지들을 소집했다. 이산갑에게도 출석 요구가 왔다.
"이산갑 씨, 오늘은 중요한 일로 모셨습니다."
경찰서장이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에 대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주셔야 합니다. 이산갑 씨 같은 분이 앞장서 주시면..."
이산갑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산갑 씨,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습니다."
"그럼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산감입니다. 제 일은 산과 들을 관리하는 것이지, 사람들의 이름을 바꾸도록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찰서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산갑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막대했고, 그를 자극하면 마을 전체가 들고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총독부의 명령입니다."
"총독부의 명령이라도 저는 산감의 본분을 지킬 뿐입니다."
이산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할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경찰서를 나온 이산갑을 산돌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야."
실제로 일본인들은 이산갑을 어려워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이 지역의 명문가였고, 그가 가진 토지와 재산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며칠 후, 조병수가 이산갑을 찾아왔다.
"이 어르신, 제가 좋은 제안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무슨 제안인가?"
"총독부에서 어르신 같은 분을 면장으로 추천하고 싶어 합니다. 어르신이 면장이 되시면..."
"거절하네."
이산갑은 단호하게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면장이 되시면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는데..."
"나는 산감으로 충분하네. 산과 들을 돌보는 것이 내 본분이야."
조병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낮은 자리에 만족하시다니..."
"낮은 자리? 하늘과 땅을 돌보는 일이 낮은 일인가?"
이산갑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산감의 직분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우리의 일이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아."
조병수가 나간 후, 이충헌이 사랑채로 왔다.
"산갑아, 면장 제안을 거절했다지?"
"예, 아버님."
"잘했다. 면장이 되면 일본놈들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이충헌은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산감의 자리가 참 좋은 것이야. 관직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한 것도 아니지.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운 선택이었어."
"그렇습니다, 아버님. 산감으로 있으면 왜놈들의 더러운 일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한도회 일도 할 수 있지."
이산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영광경찰서에서는 일본인 관리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산갑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함부로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너무 큽니다."
"하지만 그가 협조하지 않으면 다른 조선인들도 따라하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지켜봅시다. 그가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한 건드리지 맙시다."
일본인들도 이산갑이라는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조선인 사회의 중심이었고, 그를 자극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이산갑은 산감의 직분을 지키며 일제의 오염으로부터 자신과 마을을 지켜냈다. 화려한 관직도, 큰 권력도 원하지 않았다. 다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서영아, 나는 이렇게라도 우리의 것을 지키고 있네. 자네가 지키려 했던 것들을..."
밤마다 이산갑은 서영을 생각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조용하지만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는 소나무처럼.